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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 워커 1 - Seed Novel
류승현 글, PUYON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보이드 워커에 나타난 미의식의 부재
시드노벨의 9번째 타이틀, 보이드 워커. 그 광고를 보면서 많은 기대를 했던 작품이지만, 정작 읽어본 느낌은 실망 뿐이었다.
작품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하면서 갖게 되는 작품에 대한 기대에 어긋난 것은 물론, 그 자리를 메꿀 만한 다른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왜 보이드 워커에서 감동을 얻지 못했는가? 그 부분을 지금부터 나름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보이드 워커에 대한 감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미의식의 부재'이다.
우선 작품의 광고 문구를 살펴보자.
- 오늘 나는 친구를 죽여야 했다.
- 그 날...... 학교는 지옥으로 변했다.
이 두 편의 광고는 일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상의 공간이 비일상에 침식당하고, 잔혹한 비일상 속에서 주인공은 "친구를 위하여 친구를 죽이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광고 내용이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의 분위기란 어떤 것일까? 열이면 열 누구나 광고속에 흐르는 비장미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제일 앞에 제시된 일러스트나 뒷표지의 작품 요약 제시문 역시 그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일러스트와 뒷표지에서는 '어둠에 잠긴 바닥으로 소희의 붉은 피가 물감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그가 쓰러트린 괴물의 정체는 바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소녀였다' 라는 식으로 본문에 등장하게 될 비극적 장면을 그대로 제시해주면서, 주인공이 무엇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소녀를 죽일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작품은 이러한 독자의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한다. 독자가 감정이입을 할 만한 장면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품 초반부에서 예상 독자층에게 익숙할 법한 여러 소재들을 제시하면서 독자가 작중 캐릭터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를 한 듯 하나, 불행히도 별 마크를 사용한 어설픈 필터링은 글을 읽어나가는 흐름에 거슬렸으며, 거론되는 사소한 소재 하나 하나에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바람에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트리는 역효과만 일으키고 말았다.
또, 괄호의 사용이 너무 잦은 것도 문제이다. 특이한 용어, 등장 인물 중 몇 명이 사용하는 영어 단어들, 거기에 작품 내 장면에 대한 부연 설명 등을 모두 괄호를 통해 처리하고 있는데다, 이런 것들이 너무 자주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괄호를 통한 부연설명 제시나 원문 제시는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자제하는 것이 어땠을까 싶다. 예컨데 [프리즈(freeze)] 같은 간단한 영어 회화 내용은 굳이 원문과 발음표기를 동시에 제시하지 않더라도 작품 흐름에 무리가 없으므로 원문 혹은 한글표기 중 하나 만을 사용하는 편이 더 나았을 듯 하며, [베리어(사이버 베리어 드래곤의 약자)]라는 식의 작품 내용과는 전혀 관계 없는 소재에 대한 부연 설명은 작품 진행의 흐름을 방해하므로 아예 빼버리는게 나았을 듯 하다.
결국 이런 괄호의 남발이나 작품 내용과는 관계없는 부연설명들로 인해 작품의 맥이 끊어져, 독자가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게 되었다.
한편, 등장인물들의 성격들 역시 문제가 있다.
작품 초반에 캐릭터의 성격을 제시하기 위해 보여준 듯한 빚쟁이들과의 다툼은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를 오히려 방해하는 장면이 되어버렸다.
고교생이 성인 남성, 그것도 전문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직업을 가진 성인 남성을 상대로 나이프를 휘두르는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나 이질적인 장면이다.
더구나 주인공인 준수는 일말의 거부감 없이 그런 일을 해내며, 더 나아가 그런 행동을 한 직후에도 계속해서 쾌활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비록 그 뒷 장면에서 준수가 나이프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제시하고는 있으나, 앞쪽 장면에서의 준수의 행동이 너무나 파격적이기 때문에 준수가 보여준 행동이나 태도를 납득하게 할 만한 공감대를 형성하는데는 실패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독자의 공감대를 조성할 수 없다는 문제는 이후에도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심연에 빠져든 학교에서 함께 공격하던 학우를 공격해 죽인 준수와 그 장면을 지켜본 인호는 친구를 죽인 것에 대한 일발의 죄책감 같은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후에 목격하게 되는 잔혹한 장면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은 잠시 슬픔이나 후회의 감정 같은 것을 보여주지만 금새 태도를 바꾼다.
이런 일련이 장면들이 연결되면서, 작품의 캐릭터들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행동을 수행할 뿐인 감정없는 인형처럼 보이게 된다.
캐릭터들의 감정 표현이라는 것은, 마치 '이 장면에서는 이런 감정 표현을 해야 한다'라는 기계적 반응처럼 느껴지며, 인간으로서의 고뇌나 슬픔 같은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감정 표현의 부재가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준수-소희의 관계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준수와 소희는 비극적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는 두 인물이다. 특히 준수의 시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소희가 가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위치는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자리이다. 준수와 소희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리고 독자가 이에 몰입하면 몰입할 수록 이후에 제시될 비극적 장면은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준수와 소희 사이에는 어떠한 적극적인 교감도 주어지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 준수가 소희를 그리는 마음이 표현되기는 하지만, 독자의 감성을 자극해 감정이입을 시킬 만한 장면이 아니라 단순히 준수의 감정이 제시/나열되는 수준에 불과하다.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준수가 소희에게 고백하는 장면 역시 독자에게 감정이입이 될 만한 특별한 장면이 되지 못하고 일상적인 장면 제시로 끝나버린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준수와 소희의 관계에 독자를 몰입시킬수록 작품의 미의식은 극대화 된다. 하지만 내용이 중반 이후로 넘어가게 되는 동안에도 준수와 소희의 관계는 '연인관계'라는 것이 그저 설정 제시 수준에 그쳤을 뿐이다.
결국 독자가 두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할 만한 장면이 없기 때문에, 이후에 일어나는 비극적 사건 - 주인공에게 희생된 사람의 정체가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소녀라는 것 - 에서도 독자들은 별다른 비극성을 느끼지 못한 채 밋밋하게 끝나버릴 뿐이다.
첫부분의 일러스트나 뒷표지에서 이러한 사건을 제시해 버린 이상 해당 장면에서 의외성을 기대하긴 어려우므로, 본문에서는 소희가 준수의 손에 죽는 장면을 더욱 더 비극적이고 비장미가 넘치는 장면으로 제시해야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독자의 감정이입을 끌어들이기 위해 준수와 소희의 관계를 독자들에게 더 와닿을 수 있도록 제시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독자는 작품에 기대하고 있던 비장미를 읽어내지 못한다. 등장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니 사건의 전개 자체에도 빠져들기가 힘들다. 다른 미의식을 읽어낼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 이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어야 할 비장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허무한 감정의 심연만이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후에 남아 있는 반전도 그 효과를 잃을 수 밖에 없다. 반전의 즐거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이 없는 상태에서 흥미는 반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보이드 워커는 단권으로서의 완성도 면에서 실패한 작품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등장 인물들은 마치 인형처럼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내면에서 인간성을 읽어내기 힘들다. 그들은 방금 전에 함께 공부하던 친구를 죽이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그들이 얻게 된 힘에 대해 토론한다. 작품 내에서 제시되는 상황은 처절한 생존의 공간, 비극적인 싸움의 공간이지만 인물들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그런 것들을 읽어낼 수가 없다.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흥미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비록 배경 세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흥미요소로 남아 있지만, 작품이라는 것이 세계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물에 대한 몰입, 감정이입은 사건과 배경에 독자가 빠져들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물이 죽은 소설은 아무리 사건과 배경이 뛰어나더라도 죽은 소설이 될 수 밖에 없다.
부디 다음 권에서는 좀 더 등장인물들이 생동감을 지닌 소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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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보니 장점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혹평이 되어버려서 좀 민망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