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본격 마법소녀 리스카 1
니시오 이신 지음, 현정수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니시오 이신 다운 소설. 양장본이 아니란 것은 다소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의 대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作, [검의 대가]


부산에서 학원 다닐 적에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했는데
그 제목 때문에 일단 빼 들고, 잠시 망설이다 샀습니다.


제목인 검의 대가El Maestro de Esgrima 그대로
주인공은 검술 교사Maestro 입니다.
"돈" 하이메 아스트랄로아 -
검의 시대가 가고, 총의 시대가 오던 그런 시대에
마지막 검술 교사가 될지도 모르는 그런 인물....

그야말로 귀족적이고 기사적인 인물인 이 나이든 검술교사가
어떤 음모에 휘말리게 되고, 우연히 그 요체에 접근하게 되고,
그 음모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펜싱을 아주 잘하는 듯-_-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이는데
(최소한 잘 '아는'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펜싱 용어를 모르면 전투씬의 흥미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만
전투씬이 매우 뛰어납니다.

중간에 논검(-_-;;;)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 부분을 조금 옮겨보자면 (대사 사이의 묘사는 일단 생략....)

"돈 하이메, 만일 당신이 공격을 하는 순간 상대가
 두블 아타크 앙 티에르스로 나온다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어요?"
               (중략)
"좋아요. 만일 상대가 앙 티에르스로 공격하는 페인트 모션을 취한다면,
 나는 팡트 드 미즈로 받아칠 겁니다. 아시겠어요? 아주 기본이지요."

"그런데, 당신의 팡트 드 미즈에 상대가 몸을 피하면서 바로 앙 카르트로 공격한다면요?"

"그 경우에는 앙 카르트로 대처한 후, 다시 곧바로 앙 카르트로 공격을 해야겠지요.
 그것만이 유일한 대응방법이니까요."

"돈 하이메, 지금 저를 실명시키려고 하시는 거에요? 아니면, 저를 시험하시는거에요?
 그게 유일한 대응방법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더구나 그게 최선의 대응책도 아니고요."

"부인이라면 뭔가 다른 대안이 있겠습니까?"
                 (중략)
"당신 말씀대로 앙 카르트로 파라드 하되,
 상대방의 플뢰레 끝을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팡트 앙 카르트로
 상대의 팔을 공격하는거에요. 어때요, 괜찮죠?"



....대략 이런 식입니다.
전투씬도 여기서 별반 다르지 않아서

[ 그는 그녀가 팔을 향해 드 미즈로 공격해오자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냈다. ]

...와 같은 식입니다.





소설 자체의 구성도 '삼총사'와 같은 서양식 무협활극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 스릴러적 요소가 더해져 있고,
특히 전투씬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펜싱의 전투씬이 나오는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쯤 읽어보셔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등장하는 명대사

"우리의 목표는 깨끗하고,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결투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측에서 당할 위험의 가능성은 최소화하면서 말이지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두 번의 공격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공격에서는
 오히려 우리 측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요. 최후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
 즉 자신은 살아남는 것과 피치 못할 상황에서 상대방을 죽여 없애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굳이 멋지고 너무 우아한 포즈를 취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검술은, 그 무엇에 앞서, 실질적인 훈련입니다."

"권총은 무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뻔뻔한 도구일 뿐이지요.
 만일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리고 인간이라면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해야 합니다. 저만치 떨어져서, 마치 골목길에서 툭 튀어나온 불량배가 하듯이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칼에는 다른 어떤 무기에도 없는 칼만의 윤리가 존재합니다....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신비>라고 해야 할까요.....
 검술은 기사들의 신비철학입니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젠가, 마지막 검술 교사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이면, 아직은 남아 있는
 숭고하고 명예로운 사나이들간의 1대 1 결투도 함께 무덤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겁니다. ..... ....그리고 이 땅에는 오로지 총싸움과
 골목길에 숨어있다가 함부로 휘둘러대는 주머니칼의 칼부림만이 남게 되겠지요."

"이렇게 한 손에 검을 들고 있으면 저 역시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P.S>
소설 마지막 씬의 표현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아침 햇빛이 창문으로 지금 막 새어들어오는 낡은 방 안의 정경,
바닥에는 어젯밤 격렬한 결투를 벌였던 상대방의 시체,
창 밖으로는 혁명을 부르짖는 시민들의 소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어젯밤의 전투에서 얻은 깨달음을,
'완벽한 공격법'을 되새김질 해보는 늙은 검술가의 모습...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전기 에르나사가 2부 1
쇼코 쯔츠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성전기 에르나사가'.

팬터지 만화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알고 계실만한 바로 그 '성전기 에르나사가'의 후속작(?)입니다.

전작의 엄청난 팬으로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부의 13권은 결국 못구...할 뻔 했습니다.


 왜 13권만 그렇게 물량이 없는건지! 결국 헌책방에서 상태가 괜찮은 걸로 한 질 구입했습니다.

 덕분에 1부 1~12권은 2권씩이네요.)
2부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대로 나와있는 전권을 사버렸습니다.

사실 이전에 이에 대한 악평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도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ㅠ_ㅠ



배경은 '에르나사가'의 시대보다 훠어어얼씬 이후.
무려 컴퓨터가 있고 자동차가 있는 세계입니다.

뭐, 자세한 내용을 밝히면 만화를 보셔야 할 분들이 실망하실테니 넘어가고...

아직 1권 뿐이라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전작이 정통 판타지 느낌이었다면, 이건 신비주의 쪽에 많이 접근한 것 같습니다.
현대를 무대로 비밀결사, 고대의 비의를 이은 마법사들... 등이 충돌하는 세계같달까?
하지만 등장하는 소품들을 보면 역시 다소 이질적인 부분들도 있고....

아직까지는 '다음 권에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남습니다만
전작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어필하긴 힘들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산은 '성전기 에르나사가' (1부)의 애장판을 내달라! 내달라! 내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다르크
소니픽쳐스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때는 1452 년

   태양은 또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오랫 동안 ...

   볼 수 없던


   새롭고 아름다운 나날을 되찾아 주었다.
                   - 크리스티느 드 피잔, <잔 다르크 송(頌)> 中






Jeanne de Arc를 통해 본 지도자들의 정치와 관계


“군인들 앞에서 하느님의 축복이 군기에 내리기를 기원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나는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 용감하게 돌격하라고. 그리고, 나도 또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 잔의 증언, 1431년의 재판 기록에서








- 아크의 잔   Joan of Arc

나는 아크의 잔1)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어떤 면을 좋아하냐 하면, 그 철저한 고증이 마음에 든다. 사소한 틀린 점은 그냥 눈감아 줄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진 트레뷰쳇2) 공성기라거나 블래스트 플레이트3)와 체인메일 호버크4)같은 간단한 갑옷부터 온 몸을 감싸는 풀 플레이트 아머5)까지 온갖 종류의 갑옷들, 충분히 사실적인 전투 장면들은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는 데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잔 다르크라는 인물에 대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영화는 시간적 제약을 받는 매체인 만큼, 영화 속에서 백년전쟁의 배경은 상당히 간추려지고, 축소되어 있다. - 어떤 이는 내가 이야기 해 줄 때까지, 이 영화의 무대가 백년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귀족들과 그들의 사상과 연관지어져 있지 않다. 권력의 암투는 영화의 아주 일부일 뿐이다. 영화는 전투와 - 그리고 잔의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은 잔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려고 상당히 애를 쓴 것 같다. 영화 전체에서 제시되는 의문들 - 읽고 쓸 줄 모르는 농부의 딸을 사자로 선택한 이유는? 어째서 권력도 지위도 없는 여자아이가 선택되었는가? 어째서 버림받았는가? - 은 애써 그녀를 ‘하나의 인간’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은 ‘그녀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살았다’는 것 진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진부한 주제의 뒤편으로 사라진 권력의 암투는 어디로 갔을까?

영화 속에서는 프랑스가 잔을 ’팔아 넘기는’ 부분이 나와있다. 나머지 부분들은 인물의 입을 통해서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나 버리고 만다.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는다. 백년전쟁에 대해서도, 트루아 조약에 대해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오로지 ‘왕은 잔을 이용하고, 후에 배신했다.’ 이것뿐이다. 이래서는 정치도 귀족 이야기도 나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 역사의 진실은...

잔 다르크6)에서는 이 장면이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1430년 초에 파리 시를 국왕에게 인도하는 새로운 음모가 세워졌다. 잔은 그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한 배반자의 밀고에 의해 영국군이 그 계획을 역으로 이용하여 음모자를 체포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국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한 전투 부대를 이끌고 슈리를 출발하여 이르 드 프랑스로 진격했다.

무랑 - 현재의 세느 에 마르느 - 부근에 이르러 또다시 적군의 저지를 받게 되었을 때 그녀는 - 나중에 그렇게 증언한 바에 따르면 - 성 요한일(7월 24일)이 오기 전에 체포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예감은 일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라니 슈르 마르느를 지나 드디어 콩피에뉴에 도착했다. 그 후부터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적과 싸우고 있는 주민을 격려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동안에 부르고뉴군은 콩피에뉴를 포위하고 있었다. 콩피에뉴를 구출해야 했다. 포톤 드 산트라유와 함께 그녀는 몇 번에 걸친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를 배반하고 부르고뉴군에게 마을을 인도한 소와손의 수비대장 때문에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 안되는 병력과 남게 된 그녀는 5월 23일 아침 콩피에뉴로 돌입했다. 저녁때 그녀는 그곳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조우하게된 부르고뉴군을 간단히 패주시켰지만 때마침 싸움터에 도착한 영국 지원군에게 측면 공격을 당하자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수하 군졸을 모아 퇴로를 뚫고 나아가려 할 때 그녀는 부르고뉴군의 한 병사가 갑옷자락을 당기면서 말에서 끌어내리는 바람에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사람들 - 오빠 피에르 다르크, 급사장 장 드롱, 가스코뉴의 기사인 포톤 드 브르기냥도 포로가 되었다.

책 전체의 역사서 적인 분위기를 볼 때 영화보다는 이쪽이 더 진실성이 있는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서는 ‘프랑스의 병사들은 슬퍼했지만 국왕이나 대신들은 거추장스럽던 양치기 소녀를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배신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치명적인 배신을 당한 잔은 곧 몸값과 교환되어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다.7)

영국은 이 죄인이 악마의 사역을 받았다는 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상당히 노심초사하였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승승장구하게 된 것이 악마의 힘 때문이었으며 영국이야말로 크리스트교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널리 알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 백년전쟁

당시의 지배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백년 전쟁을 살펴보기로 하자.

백년 전쟁은 1339년 플랑드르와 북프랑스에서 양국군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뒤, 1345년 에드워드 III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8)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이듬해 크레시 전투에서 장궁대9)를 활용하여 전력이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칼레시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1347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뒤 양국에 페스트가 유행한 데다 재정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355년 흑태자는 다시 남프랑스를 침입하였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립 VI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장 II세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II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II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거둔 영국군의 일방적 승리는, 독립적 자영농민을 주력으로 한 보병의 장궁대 전법이 프랑스의 봉건 기사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참화와 영국군의 약탈로 농민의 피폐가 격심하여, 58년 농민반란인 자크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는 매우 심한 궁지에 빠졌다.

그 결과 양국 사이에 브레티니화약이 성립되어,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시 등의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하였다.

1364년에 프랑스에서는 장 II세가 죽고 샤를 V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정의 정비와 재정의 재건에 착수하였으며, 아키텐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에 반항하게 하였으므로, 양국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 흑태자의 아우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하였으나 프랑스군의 분전으로 패배하고, 영국 해군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전하였다. 따라서 브레티니화약에서 영국에 할양한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1377년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III세가 죽고 리처드 II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도 1380년 샤를 V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VI세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왕이 모두 미성년이었으며, 특히 영국에서는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난 데다가, 더욱이 리처드왕의 지배에 대한 귀족의 반항까지 겹쳤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1399년 영국에서는 리처드왕이 폐위되고 랭커스터가의 헨리 IV세가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샤를 VI세를 대신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란 상태에 빠졌다.

1413년 헨리 IV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으로 즉위한 헨리 V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14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를 진공, 아장쿠르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대패시켜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하였다.

헨리 5세는 이를 배경으로 1420년 트루아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VI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그러나 샤를 VI세의 황태자 샤를10)과 이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이와 같은 영국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422년 영국의 헨리 V세와 프랑스의 샤를 VI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VI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VII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으므로, 샤를 VII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전황을 승전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바로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다.

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의 영국군을 격파하였으며, 그뒤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그 결과 그 해 샤를 VII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샤를 VI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조약은 사실상 그 뜻을 상실하였다. 그 다음해인 1430년에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으로 인도된 끝에, 31년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435년 동안이나 항쟁을 계속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툴에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내에 멘․보르도․칼레․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1445년 양국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히 타결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VII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패전으로 영국에서는 랭커스터왕조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家)의 반항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샤를 VII세는 이와 같은 영국 내의 혼란을 틈타 기엔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4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인 보르도시를 맹공격, 이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의 승리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이 고조된 점과, 샤를 VII에 의하여 보병․포병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이 강화되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 잔 다르크  Jeanne d'Arc

당시의 지배계층의 중심적 사상은 기사도였다.

이것은 전투에서는 상당히 불합리한 면이 많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상식이었다. 그 규정된 룰 안에서 -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 권모술수들을 대단한 전략가인 양 생각하며 행동해오던 그들에게 잔의 행동은 돌발적이며 예측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잔은 그녀 스스로 증언한바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기 이전에 움직였다. 기사들이 ‘기사도적 난관’에 부딪쳐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더라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아주 단순한 전투일 뿐이었다.

실제로 많은 기사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포로를 잡고 몸값을 받는’ 일이었다. 그들은 적의 전의가 높다면 다음 번의 행운을 기대하며 미련 없이 뒤로 물러서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잔은 달랐다. 그녀는 성전의 기치를 세우고 최후의 최후까지 싸웠다. 잔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휘관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프랑스군은 맹렬히 공격했고 영국군은 그들이 늘 하던 대로 ‘강력한 방어에 부딪쳐’ 퇴각해야만 했다.

잔의 이러한 무모한 돌진을 가르쳐 혹자는 ‘그녀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그들의 몸을 방패로 삼았던가’ 라고 말하지만, 그 무모한 돌진의 결과는 대부분 승리로 끝났다.

연대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잔이 출현하기 전에는 2백 명의 영국군이 4백 명의 프랑스군을 쉽게 물리쳤지만, 이제 그와는 반대로 2백 명의 프랑스군이 천 명의 영국군을 무찌를 만큼 사기가 충천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영국군은 ‘잔과 싸우지 않기 위해서’ 군대를 기피하는 자들에게 벌을 줘야 했으며 지휘관들도 공공연히 ‘지옥의 마법사와 싸워야 했다’는 패전 변명을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잔 다르크는 역사가들이 백년 전쟁이라고 이름 붙인 기나긴 전쟁에서도 가장 극적인 부분을 연출해 냈다. 증오감으로 그녀를 추궁하여 패전의 책임을 덮어씌운 영국군의 행위는 결국 그녀가 순교자로서 연출함으로서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다.11)






- 정치와 전쟁에 있어서 기사도의 중요성

양쪽 군대가 신의 가호를 간절히 바란 것은 당시 사회상과도 큰 연관이 있다.

군대는 결국 사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개개인을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다면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흔히 말해지지만 결국 군대 구성원의 전투 한계치를 설정해야만 한다.

그 군대의 핵심을 이루는 장교들은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는 기사도에 의하여 살아간다. 기사도의 첫 번째가 ‘교회의 수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들에게 ‘신의 가호’라는 말이 주는 영향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말단 병사들까지 기독교의 신앙은 절대적이었던 시대였으므로 ‘신의 가호’가 군대의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중세 귀족들의 삶을 지탱하는 사상은 기사도였다. 비록 그들의 삶의 태도가 이론으로서의 기사도와는 꽤나 어긋나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크리스트교 정신의 정수가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리스트교도가 서로를 헐뜯고 싸워온 역사를 지닌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예들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백년전쟁 중에도 있었다.

1415년 영국의 헨리 V세는 아쟁쿠르 전투 직전 프랑스인과 대치하러 간다. 저녁 때 그는 실수로 산개기병들이 그에게 숙소로 지정해준 마을을 지나쳐 간다. 그런데, 왕은 ‘매우 칭송할만한 명예 의식을 지닌 사람으로서’ 전투복 차림으로 후퇴하지 않도록 정찰중의 기사들에게 막 갑옷을 벗게 명령한 참이다. 이제 왕 자신이 갑옷을 입은 채고 그 역시 그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왕은 있는 그 곳에서 밤을 지새기로 하고 이 새로운 계획에 맞춰 전위부대를 재배치시킨다.12)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중세의 기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모범적인 기사로서 행동하기 위해서 지름길을 사용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일은 그들의 기사로서의 자기만족에는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 군주론

잔이 활약했던 15세기의 프랑스는 통일 국가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왕령의 주위에는 대제후들의 영토가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전통적인 부르타뉴령 혹은 부르봉  공령이었으며 어떤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4세기 말에 백합꽃의 친왕들의 영지로 만들어진 앙주 공령, 부르고뉴 공령, 오를레앙 공령 등인데 이 자체가 전통적 제후령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대제후들은 독자적인 법제와 재정과 재판권, 그리고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자주 대립되었으며 또 왕국의 이해관계와도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왕국안에 반 독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또다른 왕국이 수립되어 있는 셈이었다.

이들 대제후들과 국왕과의 유대란, 취약한 봉건적 인연 때문이었을 뿐, 충성심은 믿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점은 잔의 충실한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오를레앙의 사생아’로 훗날 백작이 되는 듀노아도 프라그리의 난 때는 샤를 드 부르봉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었으며, 잔이 ‘미남 공작님’이라 불렀던 아랑송 공작도 1456년에 그녀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후에 노르망디에서는 영국군의 상륙을 도와주는 배반행위를 하였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반면에 아래 계급일수록 자신이 ‘프랑스 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확실했다.

잔은 ‘아버지가 충실한 프랑스 인인 것처럼’ 자신도 프랑스 인이라는 기치로 싸움에 임했으며 그것은 대다수 병사들에게도 모토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기사도라는 아름다운 사상의 이름으로, 결코 허락될 수 없는 추악한 일을 해 온 군주들과는 달리, 진정으로 국가를 지켜온 것은 그들 제 3 계급이었던 것이다.






- 끝맺으며...

잔은 1429년 5월 8일, 오를레앙을 탈환한다.13) 1430년 5월 23일에 체포되며 다음 해 5월 30일에 화형 당한다. 1439년 가짜 잔다르크가 나타난다.

1450년, 샤를 VII세는 잔의 재판에 대하여 재조사를 명령하고, 그 성과로 1456년 7월 7일에는 명예회복 판결이 내려진다.

그 후로 500여 년이 흐른 1920년, 잔은 카톨릭 교회에 성녀로 추앙 받게 된다.

처음에 ‘시농의 소녀’로서 여로에 오를 때만 해도 잔은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였다. 그녀는 10명의 박사를 상대로 ‘기적은 오를레앙에 가서 보여드리지요’ 라고 당당하게 소리친 다음 그 한해동안 5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5세기에 이르러, 잔은 기사도를 상징하는 10명의 인물에 추가된다. 정확히는 헥토르, 시저, 알렉산더, 여호수아, 다윗, 쥬다스 마카비우스, 아더, 샤를마뉴, 고드프로아 드 부이용,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의 10명에 덧붙여져 기사도를 상징하는 11번째 인물이 됨과 동시에 그들 중 유일한 여성의 지위를 차지한다.14)

이렇게 되어 잔은 전쟁에 있어서의 기사도적 관념을 타파함으로서 그녀 이후의 기사들의 모범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화려한 전투장면으로 가득 찬 영화로 시작하여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역사서를 두루 훑어본 이 글은 끝을 맺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속5센티미터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벗꽃이 떨어지는 속도 - 초속 5 센티미터

 

니노미야 히카루의 『베이비 리프』의 한 장면이면 다 설명됩니다. (......)
     


     점점...
     점점 윤곽이 흐려져 간다.

     이젠 재현할 수 없다.
     손짓도
     표정도...

     기억에는
     추위도
     온기도
     소리도 없다.

     마치
     벚꽃속에
     파묻힌 것 같지 않은가?



     즐거움도
     기쁨도
     괴로움도
     초조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공백조차
     그녀와 관련된 모든 감정은

     언제나 풀 볼륨으로 울리고 있다.


                    - 니노미야 히카루, 『베이비 리프』 中





....마지막까지 보고 나니 딱 저 장면이 생각나더라구요.
(얘네들은 『허니문 샐러드』에서 연결되지만.)


뭐, 사람마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애절하고 아쉬운 옛 사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껏 우울해졌지만, 한 편으로는 주인공인 타카기가 부러워지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아마, 앞으로는 그 옛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사건과 마주할 때마다
조금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기분으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하는, 사랑을 했던, 사랑을 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P.S>
엔딩곡 One more time ....가사가 한 줄 한 줄 가슴속을 후벼파네요. 어흐흑



P.S>
"our fates were always interwined, but never joine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