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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Pluto 2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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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던가..'동화읽는 어른 모임'의 강연회에 간 적이 있다.  강의주제는 '독서급수제'의 문제점과 독서교육이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뭐 이런 내용이었다.

'독서급수제'란? 서울시교육청에서 선정한 도서목록에 있는 책 내용에 대한 퀴즈를 난이도에 따라 맞추면 급수가 올라가고, 그렇게 매긴 급수를 학교생활기록부에...즉, 내신성적에 반영하는 시험이다. 책의 내용에 따라, 그리고 퀴즈의 난이도에 따라 급수가 매겨지고 '퀴즈'를 풀지 못하면 그 등급에 있는 책은 읽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뭐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중앙일보에 "부산발 교육혁명"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부산시교육청에서 아이디어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앙일간지에서 저런 식의 화끈한 제목으로 보도하면 도/광역시 교육청도 움찔하게 되고, 따라할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그 퀴즈들의 실제 예시는 참말로 가관이었다.

책의 내용에 대한 "형사취조"와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아니..어쩌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들이대는 것이니 형사취조보다 정신건강에 더 해롭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읽고 느낌과 감동을 되새기고 숙성시켜 열린 태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었으면 내용을 100%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처절하게 무식한 발상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제도에서 아이들은 책속에 더 깊이 갇혀 나오지 못하며 글이 지시하는 단순한 뜻에만 목을 매는 책벌레가 되고 말 것이다. 독서급수제란 '괴물'을 국가인권위원회에 고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 도중에 권장도서 목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런 목록이 필요한가 아닌가,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따위에 대해 의견이 오고 갔는데, 한 마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모임에서 권장도서를 선정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다른 사람에게 돈 주고 사주고 싶은 책이 1순위가 된다."

늘 책을 끼고 살기 때문에, 가끔 누군가가 나에게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난감한 경우가 많다. 책을 객관으로 평가해서 그 책이 지닌 보편타당한 가치들에 따라 순위를 매겨 추천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강연자가 한 저 한 마디는 나를 그런 고민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글 머리가 너무 길었다. 어쨌든 나도 남들에게 내 돈 뿌려서라도 사주고 싶은 책이 무언지 생각해보았고, 책의 갈래를 차별하지 않고 만화책도 추천하라고 한다면 김혜린의 작품들-특히 <불의 검>-과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을 첫머리에 올릴 것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최근작 <플루토>는 이제 이야기가 도입 부분을 마무리한 정도에 불과해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지만, 2권까지만 읽고도(사실 은밀한 루트로 4권까지 읽었다) 남들에게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그의 작품들에는 역사성이 두드러지는데 <플루토><20세기 소년>처럼 미래 사회에서 펼쳐지는 얘기라고 해도 과거의 시대에서 이어지는 "역사적 필연성과 법칙성"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가벼운 <야와라>에서도 서울~바르셀로나 올림픽으로 이어지는 80년대 말의 지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주요 등장인물들이 실제 인물들을 패러디했음을 알 수 있고, <해피!>의 테니스여제 니코리치는 그 당시 랭킹 1위 슈테피 그라프를 모델로 했다. 니코리치의 테니스 스타일 뿐 아니라 가정배경, 성격 등 모든 것의 설정이 그라프와 흡사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 이야기에 흠뻑 빠질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이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는데, <플루토>를 읽기 전까지 난 아톰에 별 관심이 없고 '그냥 그저그런 옛날 로봇만화겠거니' 생각했다.(아톰팬들은 분노하겠지만) 그런 연유로 <플루토>를 읽고 나니 <철완아톰>이 무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VD라도 질러버리고 싶을 만큼..

만일 <플루토>가 단순한 리메이크였다면 이렇게 열린 책읽기- 작품의 감상이 다른 부분으로 확산되는 작품읽기-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판<링>, 우리나라판 <링>, 헐리우드판 <링>을 모조리 보아도 <링>의 소설을 보고픈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고 영매, 퇴마..뭐 이런 흥미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작품들이 하나같이 복제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라사와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원작에 더욱 다양한 설정을 넣고 인물들을 색다르게 해석했으며, 스쳐지나갔던 주변 인물들에도 나름대로 찡한 개성과 이야기를 부여한다.

이야기 흐름과 등장인물 설정 뿐 아니라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미래사회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그렸다.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문명의 발달 수준과 현재 한창 진행중인 기술이 미래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 것인지 그의 철학과 관심사들을 알 수 있다. 작품에서 나오는 "제 39차 중앙아시아분쟁"이 현재의 국제정세에 대한 냉소인지, 아니면 "39차"라는 숫자에서 증명하듯, 지금과 같은 미국의 패권으로 일어날 중동지방의 분쟁들이 저렇게나 반복될 거라는 예언을 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대량살상로봇→대량살상무기, 다리우스13세→후세인, 평화유지군→국제연합군(미,영,일,한,필리핀 등)이런 식으로 공식이 성립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등식일지, 아니면 발전방향일지는 읽는 이들 나름의 판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등식이 아니라 발전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작품의 배경이 미래이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하고픈 숨은 이야기가 "미래사회에서 인간성의 회복", "문명의 건강함" 따위가 가능한지 아닌지..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미래사회의 모습이 순전히 자기의 독창성 만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소년>에서는 도시의 주변부는 슬럼가, 중심부는 성벽으로 둘러친 고립으로 배경을 설정했는데 <플루토>는 그런 설정이 한 나라(일본)에서 전 세계까지 설정을 넓혔다. 독일, 일본, 영국의 중심부와 처참한 파괴로 무너진 중동이라는 대비를 통해서 지금의 불평등이 앞으로도 계속 바뀌면서 되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작가는 그간 다양한 자료들을 독파하면서 심후한 내공을 쌓은 흔적이 두드러지는데, 게지히트의 기억삽입과 조작은 필립 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기억을 팝니다>에서 주제로 다루었던 것이고, 인공지능과 사이보그의 발전은 <터미네이터>라든지, 아시모프의 <A.I><바이센터니얼맨>의 설정들을 버무린 듯 하다.

미래사회의 풍경을 묘사한 것도 여러 작품들을 참조해서 발전시킨 것이 분명한데 이것을 독창성의 부족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일게다. 하나의 만화를 그리기 위해 이렇게나 다양한 작품들을 참조하고 섭렵한다는게 그만의 개성과 독창성이 아닐까. 우리나라 만화제작도 이런 철저함과 방대함을 녹여낼 수 있는 제작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문하생들이 단지 연필선 지우고, 라면을 끓이는 일만 하는게 아니라 자료조사, 문헌연구 따위 보다 전문화한 일을 하는 어시스트로 탈바꿈하는 방식 말이다. 이런 제작시스템이 갖춰지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문제..만화저작권의 위상문제, 만화의 예술가치, 사회가치 따위가 많이 좋아질 것으로 믿는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은 모두 읽었는데, <플루토>를 읽고 나니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세계도 상당히 궁금해진다. <메트로폴리스>를 비롯한 그의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고, 그밖에 지금껏 관심 밖에 있었던 로봇애니...읽어야 될게 많다.

한 권의 만화가 하나의 세계를 열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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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못드는밤 2007-01-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라사와나오키 작가의 장점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책이지요. 개인적으로 어두운책이나 영화는 이제 싫어합니다만 나오키작가의 책은 개인 취향을 무시하게 만들지요.후후....리뷰에 적극 공감하게 되네요.
 
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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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온게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였을거다. 늘 붙어다니는 친구가 좋은 책을 읽고 있다며 자랑을 했고 다 읽고 나면 내게도 빌려줄꾸마 했다. 그 말을 하는 녀석 표정은 감동으로 완전히 뻑 가 있었고 디오니소스처럼 도취되어 흐뭇함에 침을 흘릴 정도였다.

"니는 진짜 읽어야 될 책이다. 니한테 딱 맞는 책이다." 녀석은 심상치 않게 나한테 책을 권했고, 나도 그 제목을 유심히 봤다. 그게 바로 이 책이다. 그런데, 그 녀석은 책을 빌려주겠단 호언장담을 지키지 못했고 난 이 책을 두달전에야 읽게 된 것이다.   

녀석이 읽고 있을때 어떤 책인가 싶어 잠깐 표지랑 머리말까지만 읽어봤는데 지은이가 의외의 사람이었다. 중고등학교때 NIE 수업을 하면서 '그래, 세상을 알려면 신문을 읽어야 해. 올바른 생각과 주장을 가지려면 신문의 사설을 스크랩해서 틈나는대로 읽어야지.'하는 다짐했던 시절을 부끄럽게 만든 사람 바로 손석춘이다.

신문이 가장 공정하고 객관의 태도를 가진다는 믿음을 여지없이 깨뜨린 사람도 바로 이 분이시다. 물론 그때 내가 스크랩했던 신문은 찌라시도 못되는 조선일보다. <신문읽기의 혁명>을 읽으면서 우리 언론이 어떻게 친일의 찌꺼기를 정리하지 못했는지 알게되었고, 소설가 김훈의 말마따나 우리나라 언론은 "탄압 당해서 문제가 아니라 같이 붙어먹어서 문제"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런 이 분을 담배냄새 나는 뻣뻣한 신문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소설까지 쓰다니...문학 아비투스(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하지만 마땅한 말 생각안나서)도 갖춘, 꽤 섹시한 글쟁이처럼 느꼈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나 바이올린 켜는 의사처럼 말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난 이 책이 나온지 거의 6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고,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도 줄곧 했던 생각은,

'이게 정말 녀석을 감동먹게 한 그 책이란 말야? 뭐가 그리 감동적이었지? 이거 영 아닌데..'

솔직히 말해서 실망했단 얘기다. 학교 선생이 되고부터는 틈나는 시간 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몰려오는 졸음 쫓아가며 책을 읽어야 했고, 그렇게 힘들게 읽은 책에서 스미는 감동이 삶의 보람이고 낙인데... 헛심 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초반부가 흐리멍텅했지만 조금 두꺼운 책이라 '중반부 넘어가면 뭔가 이야기가 되겠지..'하며 계속 읽었는데, 3분의 2쯤 읽었을때 솔직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없이 끝나는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끝났고 지은이가 나름대로 이야기 구조에 공을 들인 듯한 마지막 반전(..이라고 해야하나?)도 영 싱거웠다. 조금 놀란것도 사실이지만, 소설의 주제와 너무 겉돌다 보니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만일 이 책을 내가 여섯 해 전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때 별점을 주었다면 아마 별 5개를 주었을거 같다. 그런데 지금은 별 한개.. 아니, 별 개수가 문제가 아니라 점수를 매기는 것 자체가 별 뜻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손씨가 처음 쓴 소설이라 한계가 있을테지만, 난 이 책은 도저히 소설이 될 수 없고 문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내게 이 책이 맘에 안드는 이유가 북한에 대한 관점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작가의 고집스런 의식이니까. 하지만 난 이 책에서 사람과 삶에 대한 어떠한 진실이나 사실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애들이나 읽는 인터넷 소설과 닮았다고 하면 너무 큰 험담이 될까?

내 순진한 친구는 이 책이 실화라고 믿고 있는데, 녀석이 순진한 탓도 있지만 쓸데없는 기교를 너무 부려 독자를 착각하게 한 반면에(실제로 실화로 믿는 이는 거의 없을거라 생각하지만) 그에 걸맞는 묘사나 이야기 흐름, 사람과 삶에 대한 생생한 진실은 증발해 버린 것이다. 서문과 중간 중간의 말이나 결말 부분의 군더더기는 <장미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은데, 솔직히 좀 유치하다. 

동화와 소설의 차이가 있다면 생생한 묘사와 현실에 뿌리내린 이야기란 점일텐데, 이 책은 그런게 없으니 동화라고 해야 하나? 동화라고 보기엔 생략과 압축의 서술로 느끼는 감동도 없다. 한 마디로 이 책은 그만큼 어중간하다는 얘기다.

"일기 형식으로 이야기를 쓰니까 그리 생생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것 아냐?"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지만, 난 이 책을 일기 형식으로 쓴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생하게 쓸 자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서술은 대충 얼버무리고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자는 불성실함. 그런게 이 책에는 배여있다.  힘들이지 않고 얘기 하고 싶어하고,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이 일방으로 자기 주장만 달콤하게 늘어놓는 그런 태도가 몹시 마땅찮다.  주인공 이진선은 무척이나 고난을 겪는 인물로 나오지만 정작 이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이야기를 쓰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게다. 진실에 뿌리내린 이야기, 생생한 이야기, 세상살이의 거울이 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면 피할 수 없는 고통 말이다.

이진선은 무엇 때문에 혁명을 하려 했을까? 무슨 절실함으로? 이진선은 나이가 70이 되는 후반부에도 삶의 무게나 진중함, 혜안이 없이 스무살 때 처럼 철이 없다. 발전하지 않는 박제된 인간처럼. 어중간한 배경에서 태어나 별다른 계기도 없이 조국을 위해 살려는 현실 없는 고민만 하고, 이도 저도 아닌 확고한 태도와 주장을 가지지 못한채 현실의 흐름만 불평해가는 그런 인물이 내 가까이 있다면 심히 짜증이 날 것 같다.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지...하는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아름다운 실천을 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현실에 때묻지 않고 아름답게 죽어가는 주인공.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리속에 아름다운 집 하나쯤 떠올려봤을테고, 혁명가라면 착취없는 순수한 세상을 누구나 꿈꿨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순수한 열정과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건 이 양반이 지나치게 순수한 탓일까, 아니면 세상이란게 거짓과 위선이 진실과 정의를 집어삼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을 골라도 식상하긴 마찬가지다. 둘 다 맞는 말이란 건 초등학생도 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실패와 오류는 되풀이될테고, "아름다운 집"을 지을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걸까? 아름다운 집을 이 땅 위에 지을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책에선 거기에 대한 해답은 고사하고 희미한 단서도 없다.

소설의 주인공은 지은이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오히려 소설보다는 지은이가 더 걱정된다. 민주언론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게 한 공이 있는 사람으로서,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 사람이 사는 세상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없다면 그가 얼만큼이나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이들과 생생하게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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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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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지라 나는 책을 읽을 시간이 참 많은 편이다. 방학이 되면 수십권씩 쌓아놓고 보는데, 이번 방학때는 생태와 자연을 다룬 책들을 주로 읽었다.

자연과 가까운 삶을 소개하고 설명한 책은 참 많이 있겠지만 많은 이들한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래된 미래>,<조화로운 삶>,<월든> 이렇게 세 권을 읽었는데 <오래된 미래>가 문화인류학의 관점으로 쓴 책이라면 <조화로운 삶>과 <월든>은 자연과 생태순환에 가까운 삶에 대한 체험기록이 되겠다.

그래서 이 두가지 책을 비교해 볼 수 밖에 없었는데, 소로우는 보통의 교양만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큼 널리 알려진 생태론자이자 문학가이다. 소로우가 19세기 중엽의 사람이고 거꾸로 살기 시작한 1세대쯤 되니 그 이후의 모든 모험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조화로운 삶>에는 소로우의 저작을 자주 인용하고 군데군데 소로우 사상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소로우는 얽매이지 않은 삶을 추구했다면 니어링 부부는 치밀하고 계획된 생활을 했고, 지켜야 할 원칙을 고민해 이후의 생태운동가들에게 지침을 주었다는 점이 될것이다. 그런 차이점이 있는 만큼 <월든>은 자연과 상징의 어투와 말법으로 쓰여졌고, <조화로운 삶>은 논리가 치밀한 말투로 쓰여졌다.

<월든>을 펼치면 속표지에는 역자 강승영 씨가 이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소로우가 살다간 흔적을 직접 찾아다니기도 하고 그 당시의 시대배경, 역사사실을 방대하게 조사했다고 하는데, 건방진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참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친절한 역자 주를 읽으면서 '참 번역하느라 고생했구나'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와 문화 배경에 대한 무지라는 우리 나라 번역물의 고질병은 상당히 해결했다고 여겨지지만, 또 다른 고질병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 같다. 어투가 일본식, 영어식으로 범벅이 되어있는게 아닌가.

"~의 ~의 ~의"가 잇달아 나오는 일본식 말투라든지, "~화시키는" 식의 잘못쓰고 있는 매김씨, "~었었다"식의 이중과거형... 우리 말과 글을 집어삼키는 잘못된 말법의 총집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소로우는 자연의 언어, 너른 들판과 숲의 내음이 풍기는 언어로 이 위대한 책을 썼는데, 번역한 말투는 영판없는 "딱딱한 실내의 언어""논문식 언어""유식한 체 하는 언어"로 뒤바뀌어졌다. 읽다가 하도 짜증이 나서 몇번이나 그만 읽을까 생각했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고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싶어 짜증을 참아가며 겨우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조화로운 삶>은 번역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지금껏 읽은 책 중에 이렇게 번역을 깔끔하게 한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니.. 어색한 말법과 일본식 말투, 영문법 말투, 잘못된 한자말을 내 능력으로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평소에 자연에 가깝게 살아가고 깨끗한 말을 쓰려고 애쓰는 시인의 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 역자가 설명을 첨가하거나 주를 전혀 덧붙이지 않았지만 치밀한 논리의 말투에다 영혼까지 불어넣었다고 할까..

물론 <월든>의 역자도 나름대로 애쓰긴 했지만, 평소 어떤 삶을 사는지가 이와 같은 차이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자연을 노래한 책을 번역하는 것, 자연의 조화를 아는 사람이 자연에 가까운 삶이 기록된 책을 번역하는 것... 게다가 우리 나라에서 출판된 영한사전은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게 아니라 영어를 한자말과 일본식 말투로 번역했으니, 잘못된 나침반과 항해지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자 강승영 씨는 <월든>과 소로우를 100%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했지만 머리로만 이해했지 마음으로,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문화배경, 역사사실, 작가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충실한 만큼 절반의 점수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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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란1 2006-04-1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구입할때 역자를 관심있게 보는 편입니다. 서평을 아주 잘 쓰셨네요.
얼마전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다가 번역이 너무 엉망이어서 정말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우리말을 우리글을 바로 쓰고 있는지 새삼 반성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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