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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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전투기 조종사로 12년간 근무하다 전업작가가 되기 위해 제대한 남자. 혹 하루키와 흡사한 전업작가로 전환한 사례다. 예상보단 고요한 문체가 무덤덤 읽혔다. 몇몇 단편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스토리도 나름 괜찮았고. 반면 불륜, 사랑, 욕망에 대한 그렇고 그런 소설들이 주를 이뤘다. 딱히 차별화할 수 있는 것도 기억에 남는 단편이 몇 편 없는 것이 아쉬웠다.

 

10편의 단편소설. 출퇴근길에 읽으면 필시 글맛이 떨어질 것 같다. 새벽 1시쯤, 자기 전 보드카 한잔 마시며 읽기 좋은 소설이다. 보드카 한잔 마시다 필받아 집나갈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단편소설의 주인공처럼 이성을 만나 어떤 얘기든 나누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 소설이다. 소설 분위기에 휩싸여 의도치 않는, 상상하지 못했던 행동을 강요하는, 따라해보고 싶은 이야기들. 불륜이나 그밖에 야릇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분위기에 매료된다는 것 뿐. 남자든 여자든 조용한 바에서 서로 바라보며 이성이나 동성 친구들에게 조차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보는 것, 한번쯤 해보고 싶지 않을까? 정말 친하다 해도 섣부르게 말할 수 없는 것들, 성적인 이야기나 이성의 매력, 미래나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 야릇한 충동적인 경험들까지. 꼭 행동으로 뭔가 저질러야 일탈이라 말하진 않는다. 말로서, 몸짓으로서, 아님 상대방의 뻔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일탈을 경험할 수 있다. 일탈이 부정적인 의미로서만 쓰이진 않는다. 이제껏 '일탈'이란 단어를 그렇고 그런 뜻으로만 쓴 기성세대들의 바보같은 단순함에 우리가 길들여저 있을 뿐.

 

우린 항상 상대방의 시선을 쫓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인물로 판단할지를 걱정하고, 그런 나머지 말할 수 있는 영역의 울타리를 조율한다.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물론 공적, 사적인 특수한 영역에선 그래야 한다. 예를 들어 직장이나 친척들과의 만남 등)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 다시 볼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간관계의 그물에서 건져지는 물고기는 극히 일부다. 그 일부에서도 곧 죽어버리는 물고기가 대다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어차피 다시 볼 물고기들은 100마리 중 1~2마리뿐. 감정에 그저 솔직하면 된다.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고 눈치볼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당신을 기억하거나 영원토록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확률은 '0'% 가깝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판단은 자신이 하는거지 상대방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거의 비슷하지만, 그 중 <어젯밤>과 <플라자 호텔>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편 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작가가 친구에게, 파티에서 얼핏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 허구로 만든 이야기는 역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그렇다고 내가 읽으면서 '이건 실제 이야기였군, 이건 100% 소설이군.' 이렇게 맞추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건 아마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었다는 얘기다. 인생은 뚜껑을 열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살아볼만한 요소일지도...

이 책은 비슷한 단편들이 주로 몰려 있어 신선하거나 전체 다 만족하진 않을 것이다. 읽다보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 단편들 때문이라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재미가 아닌 분위기로 읽어보시길....

그리고 새벽에 바에서 소설같은 대화를 주고 받고 싶은 상대를 생각해보라..만약 있다면 찔러봐도 좋다...대부분 낚일 것이다...

 

인생은 허무하지만, 어차피 소설과 다를 게 없다...

후회따위는 무덤에 들어간 뒤 해도 전혀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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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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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 됐다.'

'아 왜?'

 

'무신경한 인간은 상처를 받아봐야 안다. 찢어져야지. 두고봐라 너도 찢어져야지.'

 

 

제주도에서 읽은 황정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

여행에서 읽기 좋은 책은 추리소설과 짧은 단편소설이 제 맛이다. 둘 다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기에 그렇다. 황정은 작가의 신작을 넣었다. 페이지도 두께도 얇아서 무거운 짐속에 숨어들어기가 좋았다. 사실 읽고 싶었던 책이다.

황정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그동안 몇 권은 읽은 것 같은데 두 번째 장편이라 조금 의아했다. 황정은 하면 <백의 그림자>가 떠올랐지만 그밖에 종종 읽은 단편들도 있었기에 기분탓인가 했다. <백의 그림자>가 196페이지로 장편이라하기엔 뭔가 부족하지 않나 싶은데 이번 소설 역시 <야만적인 앨리스씨> 164페이다. 페이지가 적은데 왜 장편소설인가를 말하자는 게 아니라 황정은 작가의 스타일 때문이라 생각한다. 단순하게 단편소설이 아니니 장편소설아닌가? 특히 황정은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딱히 길게 쓸 필요가 없어보인다. 페이지수는 적으나 읽는 시간은 장편소설과 거의 같았다. 황정은 작가 소설엔 특유의 색깔이 있다. 작가만의 특징이라 뭐라 꼬집어 표현하긴 힘들다. 문장은 시크하다. 스토리는 애매모호하게 흘러간다. 영화를 찍는 듯 장면 장면들을 묘사한다. 그리고 책에서 공간과 시각, 후각을 자극한다. 주인공들은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이고 느리다. 가끔 엉뚱한 말로 독자를 당황시킨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황정은의 표현 방식일 것이다.

 

작가 황정은 소설은 시크하고 무덤덤하다. 그리고 옛 문학의 냄새가 난다. 황정은식 소설을 읽으면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난 아직까지는 '호'쪽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재미'는 없다. 가끔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끝까지 읽고 싶은 호기심이 든다. 읽은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정말, 정말 궁금해서 마지막까지 읽게 된다. 엉뚱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상력, 마지막까지 이끌어가는 그 상상력의 줄. 독자인 나는 눈을 가린 채 그녀가 놓은 줄을 잡고 앞으로 가야만 한다. 작가인 그녀의 방식이다. 가끔은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읽어 나간다. 아직까진, 그 방식에 익숙치 않아 끌려간다. 하지만 세 번째 소설부터는 끌려가지 않을 것 같다. 세 번째 소설부터는 스타일의 반복이냐, 아니면 조금 다른 방식의 길이냐의 차이니까.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뜬금없이 노숙인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장을 한 냄새 고약한 남노숙인. 그리곤 고모리라는 마을이 등장한다. 지명의 유래는 무덤. 유래는 유래일 뿐인지만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으로 초장에 독자들에게 분위기를 잡는다. 지금은 하수처리장이 중심에 자리잡은 마을. 상상이 피어난다. 으스스한 마을 분위기에 하수구 섞은 냄새까지. 주인공 앨리시어는 남동생, 아빠, 새엄마랑 이곳에 살고 있다. 남동생은 억눌려 자란 탓에 학교에서 모자란 아이로 취급받는다. 화장실에 간다는 말을 하지 못해 옷에 똥을 싸고 친구들에게 바보라 놀림을 받는다. 그런데 그는 바보가 아닌 평범한 아이다. 형인 앨리시어는 아빠의 무관심과 새엄마의 폭력의 고름에 점점 터지려 하고 있다. 아빠는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자 한 몫 챙기려 자신의 땅에 대충 지은 집을 올려 살고 새엄마는 자식들을 구박하며 살아간다. 그들, 앨리시어와 동생은 자신들만의 사는 방식으로 억압 당하고 맞는 채 꾸역꾸역 살아간다. 개장 속엔 개들이 있다. 문을 열어도 나가지 않는 개들. 어미가 자식을 낳고 자라고 자라서 때가 되면 인간들에게 먹히는 개장 안의 개들.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의 삶의 한이 있고, 엄마는 엄마대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씨발' 같은 사연이 있다. 이어 그 씨발 같은 사연들이 뭉쳐 커다란 씨발로 변신한다. 결국 '이런 씨발'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씨발은 개인적인 욕이 아니라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음)

 

황정은 스타일의 소설도 찰지게 하는 욕도 대화체도 마음에 든다. 첨가물인 재미를 안 넣어서 그렇지만...

다음 장편소설이 기대된다. 그냥 기대가 된다. 그녀의 스타일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아니면 그 스타일로 쭉 이어갈지..

다음엔 페이지가 늘어날까? 줄어들까?

형....

자냐?

씨발...

나 지금 씨발이라고 했다...

형..

나 숨이 막혀서 무서워...

제발 아무 말이나 해줘 제발...

형.....

 

이것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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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역열차 - 14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니시무라 겐타 지음, 양억관 옮김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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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이런 것도 소설이 되는군'

하루키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 오랜만이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사소설이란 장르. 사소설이란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쓴 것이다. 거의 90% 이상 자신의 겪은 일을 그대로 소설로 쓴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저 일기로써의 기능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마음이 드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 입장으론 반반이다. 딱히 내용이라 할 알맹이는 없었지만 감흥은 있었다. <고역열차>는 소설로서의 기능보다는 한 편의 에세이적인 효과가 더 강했다. 물론 장르는 어엿하게 소설이다. 사소설의 맛은 뭐 그런 것이다. 어떤 기분으로 어떻게 읽히는 것인가에 따라서.

 

<고역열차>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니시무라 겐타는 어떤 인물일까? 물론 <고역열차> 소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다. 소설 주인공의 이야기이자 작가의 이야기인 소설. 1967년생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성범죄를 일으켜 구속됐다. 어머니는 곧바로 이혼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가족은 도망 다녀야 했다.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고 삐딱한 겐타는 학교도 잘 나가지 않고 친구도 없었다. 자신은 이미 아버지의 범죄로 인해 인생이 끝나다고 생각했다. 스물다섯 살까지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설을 썼다.

겐타는 사소설은 "자신의 경험을 서술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8할의 사실에 2할의 픽션을 가미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배제하고 인간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쓰려한다"고 했다.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이렇게 얘기했다. "스물아홉 살 때 폭력 사건으로 경찰에 두 번 체포됐고 기소까지 됐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한 기분이 들었을 때 후지사와 세이조의 작품을 읽었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사람이 쓴 소설을 읽으면서 '서른이 다 되도록 이 꼴로 살아서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고 용기도 갖게 됐다. 정신적인 버팀목이 돼 줬다." 이쯤 되면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겐타의 열아홉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 <고역열차>다. 겐타에선 내일 따윈 없었다. 그정도로 망나니처럼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 일용직 노동으로 번 돈은 다음날 출근할 버스비만 남기고 다 써버렸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고. 일용직 노동도 돈이 떨어지면 나가고 아니면 집에서 빈둥빈둥 놀았다. 그러니 방세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몇 달 밀리면 야반도주하는 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죄인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성범죄를 일으켜 감옥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 자신도 죄수였다. 피해자 가족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음 편히 살 수 없다는 겐타. 돈이 급하게 필요하면 어머니에게 연락하거나 찾아가 행패를 부려 돈을 뜯어낸다. 노동을 하다 우연히 동갑내기 친구(대학생)를 만나 처음으로 우정을 나눈다. 외로움에 미칠 듯 몸을 떨어오던 그에게는 소중한 친구지만 본성은 어쩔 수 없었다. 점점 부러움의 또 다른 이름 열등감으로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그렇게 둘은 헤어지게 된다. 또다시 외톨이가 된 겐타에겐 후회는 없었다. 그저 부러울 뿐이지만 자신은 자질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성범죄를 일으킨 범죄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외톨이가 된 그에게 변화가 있다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뿐.

 

마지막은 허무하게 끝나버리지만 그것 나름대로 멋지다 생각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람의 소설이 상을 받지 못했으면, 출간되지 못했으면 난 그저 그런 소설로 던져버렸을 거다. 그런 삶이라도 자신이 쓰고 싶은 사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그 행동으로 이웃나라인 한국에서 그의 작품을 독자들이 볼 수 있었으니까. 그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 작품을 읽지도 못했고 겐타라는 작가를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선 이런 작가들이 가뭄에 콩 나듯 나오지만 일본에선 종종 볼 수 있었다. 밑바닥까지 내련갔던 인간이 힘을 내어 소설을 쓴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것인가? 일본의 작가 중엔 조폭 출신, 왕따 출신, 범죄자 출신 등등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가 많다. 아마 그들이 쓰는 소설의 내용이 궁금해서 그런 관심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도 역시 떳떳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거야 어쨌든 겐타라는 작가가 사실 부럽다. 그에겐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소설 쓰기라 생각하고 죽어라 썼을지도 모른다. 그가 실제로 어떻게 노력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는 죽음이란 배수의 진을 치고 오로지 소설을 썼을 것이다.

 

나에겐 겐타와 같은 파워는 없는 것일까? 결국 작가가 말했듯이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소설가가 됐는데 이 글을 읽는 너희도 꿈과 희망을 잃지 말아라' 라는 메시지에 그만 감동한 것인가? 큭......

 

이 소설이 그래도 인정받은 건 겐타와 같이 희망없이 살아가는 사람들(프리터족, 니트족)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숫자는 대략 20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결국 문학으로 그들을 구원하리라, 는 것이다. 아무튼 <고역열차>를 읽고 단 한 명이라도 무언가 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면 성공이겠지만..... 나도 소설을 써야 하나......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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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가명으로 쓴

추리소설 <쿠쿠스 콜링> 예약판매 시작!

 

 

 

오홋! 놀라운 소식. ^^/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가명으로 쓴 추리소설 <쿠쿠스 콜링>이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이 책은 조앤 롤링이 2013년 4월 영국에서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 추후 조앤 롤링이 쓴 소설이라 알려졌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앤 롤링은 왜 가명으로 추리소설을 출간했을까? 개인적인 추측으로 두 가지로 보인다. <해리포터> 이후 처음을 시도한 성인 소설 <캐주얼 베이컨시>가 명성에 비해 판매가 부진하자 새로운 시도가 또 다른 부담감으로 작용했고 또 한가지는 마케팅의 일종이였다는 것이다. 작가가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조앤 롤링이라면 스케일이 다르다. 처음 쓴 <해리포터> 시리즈가 세계 2백개국에서 3억8,000만여권이 팔렸는데 그 다음 작품이 당연히 부담되지 않았을까?^^;

 

처음 쓴 성인소설이 반응이 영 미덥지 않았으니 또 다시 시도하는 추리소설 또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거라 생각한다.
일단 가명으로 출간해서 추이를 지켜보고 잘 팔리면 그것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것이고 안 팔리면 '사실 그 책 내가 썼소!'이 한마디면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작가로선 전혀 손해볼 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명성 때문에 책이 잘 팔리는 게 싫어서 한번 가명으로 내고 싶었다,고 하면 그녀의 도전정신에 고개를 끄덕일 거고 그럼 <쿠쿠스 콜링>은 다시 재조명 받는다. 결론은 이번 시나리오는 조앤 롤링이 '로버트'라는 가상의 추리작가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가명으로 추리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책에 조앤 롤링이란 이름 대신 '로버트'란 이름만 넣었을 뿐인데 느낌은 완전 달라진다. 그 판매는 실제 어땠는가 하면, 초반 판매는 부진했다고 한다. 몇몇 언론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판매는 그저 그런 정도? 그러다 조앤 롤링이 썼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곧바로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당연한 결과였지만...^^

 

 

<쿠쿠스 콜링>의 내용은 군인 출신 탐정이 한 모델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쿠쿠스 콜링> 시리즈를 계속해서 가명으로 꾸준히 출간한고나서 몇 년 후, 사실을 밝혀 팬들에게 인정받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작가의 명성을 빼고 오로지 작품으로만 승부했었더라면....
참고로 해외에서의 평가는 대체로 평이했다. 해리포터와 탐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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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이 정말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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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 그림만으로 이렇게 웃겨도 되는건가?

센스, 유머 쩌는 이 조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잠시 했지만 이 책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답이 '땡'하고 나온다. 웃기고 찌질하고 바보같은 인간들의 총집합. 성석제 작가님의 유머와 장난끼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 책의 제목 '이 인간이 정말'이란 단편소설이 포함돼 있다. 그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어찌나 남자가 찌질 붕신같은지 내가 읽으면서도 쌍욕이 절로 나왔다. 돈 많은 남자가 엄마가 주선하는 선자리에서 인간이 살면서 보여지는 총 찌질함을 깔끔(?)하게 보여준다. 갑부 엄마를 둔 백수 아들. 엄마가 하도 보라고 해서 나왔으니 부담갖지 말고 레스토랑에서 맛난거 먹고 서로 이야기나 하다 가자는 것이다. 여자는 그저 웃을 수밖에. 맛있는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찌질한놈의 주둥이 신공이 펼쳐진다. 스테이크가 나와서하는 하는 말인데, 호주산 소고기부터 한우, 일본 와규, 마블링이 어쩌고 저쩌고....사람이 먹을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소비되는 물의 총양, 전세계 인구의 절반이 쌀을 주식으로 하고, 우리의 입맛은 엄마의 뱃속에서 엄마가 자주 먹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로 결정되고, 소고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젖소의 품종, 닭의 일생, 인도의 인구, 남자가 여자보다 여섯 배 더 벼락을 맞는다는 사실 등등 주절주절...여자는 침묵으로 일괄했다. 어찌나 이놈이 쫑알쫑알 거리는지...선보러 와서 정신 이상한 놈이 계속 이상한 얘기를 지껄이는데 제정신이면 밥이 목에 넘어갈까 싶다. 결국 여자는 참다 못해 이만 가자고 하고 먼저 보낸다.

마지막, 조신하고 조용하게 멘트 "됐다 새끼야, 제발 그만 좀 해라."

 

<이 인간이 정말>은 8편의 단편소설이 있다. 여러 계간지에 발표한 소설로,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다양한 상황별로 웃음이 나오는 단편도 있고 감동코드가 있는 단편, '컥'소리 나게 만드는 단편도 있다. 8편의 단편 중 기억에 남는 소설은 세 편 있었다. <이 인간이 정말>, <남방>, <홀린 영혼>이다. (이 인간은 제외하고) 두 편 다 마지막엔 에스프레소 뒷맛 같은 씁쓸함이 남지만.

<남방>은 라오스 여행에서 만난 '박'이란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여행지에서 불쑥 낯선사람이 등장하는 단편소설을 종종 읽었는데 <남방>은 왠지 한국의 중년 남자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고 남일 같지 않았다. <홀린 영혼>에선 잘생기고 키도 큰 구라쟁이 친구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실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문들만 무성했던 친구 이주선.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데 단 한 친구, 오세호(주인공, 화자)만 자신의 구라인지 진실인지 모를 것들을 주절주절 이야기를 건낸다. 이 소설 역시 마지막엔 씁쓸한 여운으로 끝맺는데, 지금 우리들의 보여주기식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같았다.

 

오랜만에 읽은 단편소설은 역시 짜릿했다. 어떤 소설을 먼저 골라 읽을까? 하는 그 설렘. 하루키가 말하는 비스킷통처럼,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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