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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스판 -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Z.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 옮김 / 삼인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거대한 체스판을 읽고
: 어느 누구보다 편협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생각보다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다시 읽는 책이라 쉬이 여겼는데, 이해 못한 채로 넘어가는 부분도 속출했다. 하지만 책의 난해함보다 읽는 내내 신경을 긁었던 건 특유의 ‘오만함’이었는데, 덕분에 차분히 감상을 정리하기 힘들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책에서 느꼈던 바를 간략히 줄이자면 ‘지정학적 유연함과 제국주의적 경직성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깐 쉬운 말로 하자면 저자는 겉으론 아닌 척, 쿨한 척 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편협하고 옹졸하다.
지정학적 유연함
책을 따라 읽다보면 옮긴이의 표현대로 마치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세계를 체스판처럼 내려다보며 시공간을 넘나든다. 자신이야말로 인류가 나아가야할 ‘보편적 방향’을 다 안다는 양 체스판 위 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극동을 훑는다. 정서적 거부감과는 별개로 그의 폭넓은 시야를 따라가다 보면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좌파와 우파도, 근대민족국가와 종교국가도, 대륙적 통합과 다원적 분열도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다. 단지 미국이 세계 일등적 지위를 유지하는가? 못하는가?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외에 모든 것은 교조다. 유라시아에서 미국의 지위를 위협할 강국의 부상을 저지 할 수만 있다면 뭐든 좋다. 이런 태도를 우린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미국식 실용주의? 지정학적 유연함? 사실 분단 상황에서 친미냐 반미냐, 반북이냐 종북이냐, 예속이냐 자주냐 치고 박는 입장에서는 이런 태도가 아니꼽긴 하다. 종속국은 이데올로기의 도가니탕인데 비해 제국은 그야말로 초연하다. 마치 노동자들이 아파트 평수로, 정규직 유무로 서로 경계하고 싸우는데 정작 자본가들은 우아하고, 고상한 불합리한 세계의 패러디 같다. 아니 그 반대인가.
교조에 빠지지 않고 지정학적 유연함에 따라 오로지 게임의 승리만을 위해 ‘지정 전략’을 구사하는 이 노쇠한 기사는 승리의 비법을 후대에게 전수한다. 아 참, 비법을 보기 전에 책이 쓰인 시점이 20년 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그는 세계를 <지정 전략적 게임 참가자>와 <지정학적 추축>으로 나눈다. 게임 참가자는 현 상태를 변화하기 위해 힘과 영향을 행사하는 국가다. 지정학적 추축은 지리적 위치나 주위 게임 참가자들의 행동 결과로 결정된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인도는 게임 참가자다.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남한, 터키, 이란은 지정학적 추축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영원한 협력자 영국은? 이 유연한 전략가는 단호히 말한다. 영국은 “과거의 빛나는 월계관에 만족하는 은퇴한 게임 참가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미 특수 관계의 잔재를 떨쳐 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오! 이런, 남한이 ‘지정학적 추축’의 자리를 차지한 걸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야 될 것 같다.
내용을 짧게나마 살펴보자. 미국에게 통합 유럽은 ‘민주적 교두보’다. 유럽과의 동맹은 “유라시아 대륙에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력이 직접 행사될 수 있도록 해 준다” 소위 대서양 동맹 없이 미국의 패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유럽을 묶어둘 ‘유럽’이라는 가치가 미완이라는 것이다. 유럽통합은 대의보단 관료적, 절차적 통합에 가깝다. 유럽은 다시 민족주의적 분열로 치달을 수 있다. 그렇기에 유럽이 전세계 안정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주의를 전파하는 진정한 유럽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이 필요하다. 이 과제 앞에서 미국은 프랑스의 변덕도 독일의 지도력도 감내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러시아는 갈 길을 잃은 ‘블랙홀’이다. 러시아 제국의 해체는 “러시아의 역사적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한 광범위한 토론을 촉발”시켰다. 그간 러시아 역사에서 국가는 민족국가보단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사명의 실행자였는데, 이것이 붕괴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은 러시아가 스스로를 러시아인에 기반을 두는 민족국가에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NATO 동진은 필수적이다. 러시아가 중부유럽에 대해 갖고 있는 집착을 단념하게 해야 한다. ‘유라시아주의’든, ‘슬라브연합’이든, ‘반미동맹’이든 무엇이든 민족국가로 만족하지 않으면 제국적 열망일 따름이다.
중앙아시아 전략은 이런 입장의 연속으로 보인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일종의 ‘인종적 가마솥’이다. 이런 내적 취약함은 (막대한 자원이 있는) 이 지역이 러시아의 영향으로 기울 위험이 있다. 부족적 정체성에서 벗어난 근대적 민족의식이 필요하다. 이슬람 부흥 같은 새로운 민족주의는 러시아의 재통합을 막아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터키와 이란의 역할 확대는 환영할만하다. 터키의 세속주의든, 이란의 이슬람주의든 이 지역은 지정학적 다원성을 확립해야한다.
마지막 극동부분에 가서는 중국을 ‘극동의 닻’으로 비유한다. 살짝 의아했다. 왜 일본이 아니라 중국일까? 일본은 독일과 같은 전범국이지만, 독일과 달리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있다. 독일은 ‘유럽’이라는 대의에 복속할 수 있었지만, ‘아시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은 서양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시아에 있지만 일본은 아시아가 아니다. 이러한 조건이 일본의 지정 전략적 선택을 크게 제약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브레진스키는 유라시아 서쪽에서 유럽과 같은 역할을 거대 중국이 하길 바라는 것이다. 미·일 동맹의 역할은 거대중국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거대중국이 미국의 이익과 양립 가능하도록 연착륙하는데 있다.
제국주의적 경직성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내용을 한번 훑어보았다. 유럽은 민족주의를 벗어나 범유럽주의를 추구해야한다. 러시아는 유라시아나 슬라브적 정체성을 버리고 (근대적) 민족국가가 돼야한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종교적·민족적 각성이 필요하다. 그가 내놓은 처방들을 쭉 보노라면 이념, 종교 같은 어떤 가치판단에도 연연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주의’는 민주주의, 다원주의, 자유주의라는 보편적 가치 앞에선 무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이 보편적 가치는 곧 미국의 가치다.
이것이 브레진스키가 미국은 다른 나라에 개입해도 된다는 낯 뜨거운 말을 ‘선의’에 가득 찬 채로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는 책 말미에서 진심 어리게 세계의 안정과 평화야말로 “미국이 최후의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통해 남겨 놓아야 할 대표적 유산”이라 강변한다. 자신을 세계평화와 일치하는 사람이 얼마나 초연할지 상상이나 가는가? 아마 지구 반대편에서 수만 명이 죽는 사건 정도는 인류평화를 향한 여정에서 ‘부수적 피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 언제나 제국주의자들은 침략의 명분으로 상대보다 더 ‘고귀한 가치’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이 종교적 개종에서 문명화, 근대화, 민주주의 그리고 세계평화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 남은 거라곤 ‘지구평화’나 ‘우주평화’정도다. 침략에 붙는 딱지는 계속 달랐지만 본질은 똑같았다. 바로 내 말을 따르는가 안 따르는가. 이것이 범유럽주의는 되지만 범아랍주의는 안 되는 이유다. 감히 말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동일한 깃발아래(그것이 좌파이론이든, 민족주의든) 모여서는 곤란했다. “만일 남부 지역이 단일한 국가의 지배에 복속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동쪽이 미국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단결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우세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진스키가 말하는 ‘지정학적 다원성’이란 곧 분할통치를 뜻할 뿐이다. 즉, 그는 편협한 제국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 이념을 교조로 취급하며 우습게보았지만 정작 스스로가 제국의 통치 이념을 전파하는 이데올로그에 불과했다.
<거대한 체스판> 이후로 20년이 지났다. 마치 거인이 된 양 세계를 내려다보던 제국주의자의 대단한 ‘지정전략’은 지금 어떠한가? 여기에 대한 답은 그가 역대 제국들에 한 평가로 대신하고자 한다.
“문화적 부패, 정치적 분단 그리고 재정적 인플레이션이 로마 제국을 인근 야만족의 침입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던 것이다.”
“피곤과 부패, 쾌락주의와 경제적 후퇴 그리고 군사적 창의성의 쇠퇴 등이 중국을 좀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전략가는 세계를 다 꿰뚫어보는 양 명석함을 뽐냈지만, 실상은 자만과 오만으로 한 치 앞도 보지 못했다. 그는 책 말머리에서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 나아갈 학생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는데, 진리는 지식과 명석함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후대에게 몸소 보여줬다는 점에선 뛰어난 스승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