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테제 레닌 전집 66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양효식 옮김 / 아고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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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전집 읽기 066<4월 테제>

 

이름만 들었던 그 유명한 ‘4월 테제를 레닌전집 덕분에 읽을 기회가 생겼다.

레닌전집 066<4월 테제>는 레닌이 러시아 2월 혁명소식을 듣고 귀국한 43일부터 420일까지 쓴 글들이 수록되어있다. 한 달 전쯤 읽었는데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내용을 정리해본다. 전집과 별도로 당시 상황은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참고했다.

 

러시아 2월 혁명 소식을 접한 레닌은 밀봉열차를 타고 러시아에 귀국한다. 핀란드 역에 도착하면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레닌의 예상과 달리 볼셰비키들은 그를 마중하기 위해 장갑차 사단과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한다. 핀란드 역에 도착한 레닌은 커다란 꽃다발을 받아 안고 차르응접실의 환영행사로 안내된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대표자격으로 멘셰비키 체이드제가 환영연설로 그를 맞이한다.

 

레닌 동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혁명 전체의 이름으로 귀하의 귀국을 환영합니다. ……현재 혁명적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내외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 혁명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체이드제는 레닌에게 민주파의 결속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한다. 레닌은 그를 무시한 채 자신을 둘러싼 노동자, 병사 군중들을 향해 외친다.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 승리한 러시아 혁명을 맞게 되어 기쁩니다. ……인민이 손에 든 무기를 자국의 자본주의 착취자들에게 돌릴 시간이 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4월 테제

마중 나온 카메네프에게 레닌이 보낸 첫 인사는 핀잔이었다. “당신이 프라우다에 쓴 거, 그 쓰레기는 뭡니까? 우리가 몇 호 보면서 정말로 당신 욕을 했소.” 당시 볼셰비키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국(카메네프, 스탈린, 무라노프)2월 혁명의 성과물을 지키기 위한 조국방위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기울고 있었다.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지지 입장에 가까웠다.

 

프라우다37일 논설에서 자본주의 타도가 아닌 전제정 타도를 현 시기 과제로 선언한다. 315일 카메네프는 전쟁에 조건부지지 입장을 내건다. 전선에서 러시아 군대가 먼저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 중지를 선언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평화협상 압력을 넣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 병사, 농민의 집회를 잘 배치할 필요가 있다.

 

레닌이 스위스에서 2월 혁명 소식을 듣고 러시아로 보낸 일종의 지침인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프라우다는 제대로 기재하지 않는다. 편지 네 편 중 한 편만이 실리고 그마저도 누구라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대의에 반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편집되었다. 이처럼 볼셰비키 지도부는 전쟁을 내란으로!’라는 구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44일 볼셰비키 소비에트 대의원들이 모인 집회에서 레닌은 자신의 견해를 짤막하게 정리한 ‘4월 테제를 낭독한다. 10개 항목으로 구성된 테제는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 및 그와 관련한 권력 및 국가 체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옮긴이 후기에서 정리된 테제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임시정부 하에서도 전쟁의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현 전쟁은 여전히 제국주의 전쟁이지 혁명적 전쟁이 아니다.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전쟁이 끝날 수 있음을 대중에게 설명해야한다.

현 정세의 특수성은 노동계급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자본가계급에게 넘기는 첫 단계에서 노동계급과 빈농계급에게 권력을 넘기는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르주아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한다.

그 밖에 농업강령 개정, 당 강령 개정, 당명 변경,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 등등

 

레닌의 연설에 볼셰비키 대의원들은 당황했다. 일리치(레닌의 본명)가 해외에 너무 오래있어서 사태를 잘 모른다고 속닥거렸다. 레닌의 아내 크롭스카야는 일리치가 미쳐버린 걸로 보일까 봐 두렵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그의 연설에 멘셰비키는 안도했다. “저런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그가 귀국한 것은 잘된 일이다. 이제 그의 권위는 사라졌다.”

 

 

구 볼셰비즘과의 갈등

레닌은 구 볼셰비즘노선을 고물 보관소에나 수용해야 한다며 당의 쇄신을 촉구한다. 당원들은 ‘4월 테제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레닌은 전술에 관한 편지’,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등을 발표한다.

 

카메네프는 레닌의 도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료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직접적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레닌의 테제를 반박한다. 그간 볼셰비키 당의 혁명 노선은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노농민주독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 시기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과정인 만큼 이것을 완수할 노농민주독재를 만들 조건을 조성하는 게 선차적이다. 이는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지지, 혁명적 조국방위입장으로 귀결되었다.

 

레닌은 반박한다. 공식은 일반적인 줄기만 제시할 뿐이며,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수정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린 현재 당의 임무를 규정할 객관적인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구체적인 사태는 기존 볼셰비키의 예상과 다르게, 또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실제 사실들을 연구하는 대신 암송한 공식들을 분별없이되뇌는 것은 옳지 않다.

 

옛 사고방식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이후 노동자·농민의 지배가 뒤따를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자와 후자가 서로 교차하는, 즉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나란히 존재하는 이중권력 상황이 도래했다. 이중권력이라는 현실에 맞게 볼셰비즘은 보완되어야 한다.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야말로 현실화된 노농민주독재다. 그런데 지금 사태는 어떠한가? 이 현실화된 노농민주독재인 소비에트가 오히려 권력을 임시정부에게 넘기고 있다. 자유주의적, 소부르주아적 경향이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점하고 러시아 대중정치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현 시기 과제는 이런 경향에 맞서 프롤레타리아적 분자들을 결집하고 이들이 다시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를 쟁취해야한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실제 상황에 뒤쳐진 사람이다. 그런데 카메네프는 실제 사실을 연구하는 대신에, 소비에트의 의의를 고민하는 대신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료되었는가, 사회주의를 직접 도입하는 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공허한, 자칭 과학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 현학적인 죽은 문제로 주의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레닌 노선의 승리

레닌의 ‘4월 테제는 멘셰비키는 물론이거니와 고참 볼셰비키들에게 마저 외면 받았다. 그는 전쟁의 성격, 계급 역관계, 소비에트의 의의, 당면 임무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고 설득해야했다. 대중의 오도자가 아닌 진정한 국제주의자라면 당분간 소수파가 될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당의 모든 지구 및 세포 단위들에서 레닌의 테제가 토론에 붙여졌다. 424일 전국 볼셰비키 당협의회 즈음이 되자 대부분의 당 조직들이 레닌의 테제를 지지하게 된다. 불과 3주 전만해도 고참 볼셰비키들에게서 미쳤다는 평가를 받은 테제였다.

 

어느 고참 볼셰키비는 이 변화를 이렇게 평가했다.

레닌이 귀국하기 전까지 우리는 1905년의 노선밖에 알지 못했다. 인민의 창조적인 독자적 투쟁을 보고도 우리는 이들을 지도하지 못했다. …… 우리 동지들은 의회적 수단인 제헌의회 소집을 준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시켰을 뿐 이것을 넘어설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레닌의 구호들을 받아들이면서 …… 우리는 이미 노동자 정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4월 테제의 관한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놀랍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단지 레닌이 선견지명을 가진 천재라고 결론내리기엔 뭔가 찝찝하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유주의자들보다 1,000배나 좌에 그리고 볼셰비키보다는 100배나 좌에 있다고 했다.

 

3월에 비보로그 노동자 지구 평당원들은 프라우다편집국의 제명을 요구한다. 비보로그 노동자들은 집회에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한다고 결의한다. 같은 달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작업장 복귀를 거부한다. 4월에는 차르가 타도되었는데도 전쟁이 계속된 것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이 전선을 이탈한다.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임시정부 입장에 분노한 대중들은 봉기를 일으킨다.

 

모든 혁명의 주요 징표 중 하나는 정치생활과 국가 조직에 적극적·자주적·활동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일반민중의 수가 눈에 띄게 급속하고 급격하고 거세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92p>

 

자유주의자들이 공화국 법률안을 기초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의 편견을 뛰어넘어 수백만의 민중들이 창의에 의해, 자기식의 민주주의를 창조해나가는 것. 이것이 소비에트가 가지는 의의였다. 이제껏 없던 새로운 권력이 생겨나고 있었다. 레닌의 노선은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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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레닌 전집 6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양효식 옮김 / 아고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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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전집 읽기 64<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오랜만에 레닌전집을 읽는다.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제목만 읽는데 벌써부터 어렵다옮긴이에 따르면 이 책은 19167월부터 12월까지 쓰인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 유명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19166월에 완성되었으니 이 책은 제국주의론집필 이후에 쓰인 글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국주의 분석에 입각한 정세규정, 전략전술, 기회주의 경향의 뿌리 등 여러 내용들이 이전 전집들보다 더 꼼꼼하고 풍부하다.

 

그래도 제목에서 보듯이, 레닌전집 64권은 제국주의자체에 관한 내용보단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라는 경향을 반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라는 말이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 이 조류는 제국주의 시대 민족자결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으로 민족자결에 관한 레닌과 볼셰비키의 입장을 거부한다. 레닌은 이를 제국주의 시대 나타난 경제주의라고 규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 사회민주당 내 일부, 부하린, 키엡스키 등에 따르면 제국주의 시대 민족해방전쟁을 불가능하다. 또 민족자결에 찬성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자결은 곧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조국방위입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가장 소리 높여 조국방위를 거부하고 전쟁을 내란으로 바꾸자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지도자 레닌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하에서 자결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회주의하에서는 민주주의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터무니없고 똑같이 구제할 길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진 것이다.” (228p)

 

 

<유니우스 팸플릿에 대하여>

독일 사회민주당 좌익 급진파중 한 명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라는 필명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소책자를 작성한다. 소책자는 지금의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논증과 독일 사회민주당 주류를 비판하는 내용 등으로 이뤄져있다. 레닌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저자(로자 룩셈부르크)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한다.

 

로자는 주장한다.

이 야만의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 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가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 분할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떤 민족 전쟁도 결국 제국주의 전쟁으로 전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반박한다.

현재 전쟁(1차 세계대전)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과장하여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요구되는 구체성으로부터 벗어나선 안 된다. 지금 전쟁에 대한 규정을 모든 전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망각한다면 잘못 된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나 반식민지가 민족 전쟁을 벌이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

 

레닌은 민족 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주장은 민족운동들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훨씬 더 어리석고 완전히 반동적인 태도의 원인이다. 식민지 인민을 억압하는 (유럽)민족의 성원이 민족 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며 박식한 체하는 태도는 곧 배외주의나 다름없다.

 

로자는 주장한다.

외적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최선의 방호벽으로 복무하는 것은 계엄상태가 아니라 계급투쟁이다.” 그러면서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가 혁명에 대항하기 위해 외국침략자를 끌어들이고, 1871년에 부르주아가 코뮌에 대항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외국침략자를 끌어들였던 예시를 들고 있다. 즉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진정한 조국방위는 곧 계급투쟁이며, 따라서 조국방위를 명분으로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레닌은 반박한다.

로자는 계급투쟁이 침략을 방어하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일반적이며 따라서 현재의 특수한 경우에는 부적절하다.” 이런 주장은 차리즘에 동조하는 이들도 인민들을 기만하기 위해 기꺼이 동의할 내용이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전쟁 와중에 계급투쟁을 한다는 것은 결코 조국방위를 뜻하지 않고 내란을 뜻하는 것인데, 로자의 주장은 전쟁을 내란으로라는 혁명적 강령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니우스의 소책자는, 혁명적 슬로건을 그 결론까지 밀고 가보고 그런 혁명적 슬로건의 정신으로 대중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데 익숙한 비합법 조직의 동지들 없이 혼자뿐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34p)

 

 

<민족자결에 관한 토론 총괄 정리>

볼셰비키 중앙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 편집국과 폴란드 사회민주당 반대파 기관지 <가제타 로토브니차> 편집국은 민족자결에 대해 찬반입장이 나뉜다. 레닌은 이 쟁점을 총괄하여 요약·정리한다.

 

폴란드 동지들은 사회주의에서 자결권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에서는 민족적 억압을 낳는 계급이해가 사라지므로 일체의 민족적 억압 또한 사라질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민족이 경제적·정치적 단위로서 존재할 것이라고 믿을 아무 근거도 없다.”

즉 사회주의 문화권에서는 민족이 사라지니 자결권도 의미도 없다. 사회주의에서 영토적 분리는 자결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공동으로 결정할 문제가 될 것이다.

 

레닌은 반박한다.

모든 반동들과 부르주아들도 강제로 속박된 민족들에게 공동의회에서 자신의 운명을 공동으로 결정할권리를 허락하고 있다. 폴란드 동지들은 쟁점이 되는 자결권(=분리의 권리) 문제를 계속 회피하고 있다. 사회주의 문화권을 말하며 모든 국가 문제는 말소되었다는 투로 의도적으로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는 국가가 없고 당연히 국경문제, 자결권 문제도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없으니 민주주의, 공화제 등 정치적 강령 일체도 불필요해진다.

 

이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1894~1902년의 구 경제주의가 자본주의는 승리했다. 따라서 정치적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라는 식의 논리를 전개했던 것처럼, 이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도 제국주의는 승리했다. 따라서 정치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시간 낭비다!’라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비정치적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에 극히 유해하다.” (42p)

 

사회주의는 경제에 기초한 것이 맞다. 그러나 경제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민족적 억압을 철폐하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것이지만, 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된 국가가 민족적 억압을 철폐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폴란드 동지들은 조국방위 일반을 거부하며 아래처럼 주장한다.

“(병합에)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자의 투쟁의 출발점은 어떠한 조국 방위도 거부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조국 방위는 외국 인민들을 억압하고 약탈하는 자국 부르주아지의 권리를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반박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것도, 혁명적인 것도 없다. 사회주의자는 주적인 대국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모든 봉기를, 그것이 반동적 계급의 봉기가 아닌 이상 지지해야만 한다. “피병합 지역의 봉기를 지지하길 거부한다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병합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즉 제국주의에 의한 병합에는 반대한다면서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은 거부하는 입장은 이들이 이론적 오류로 인해 일관성 없는 병합주의자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론적 오류는 1916년 아일랜드 반란에 관한 일부 좌파들 입장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선 아일랜드 반란을 일부 좌파들은 폭동’, ‘도시 소부르주아 운동으로 규정했다. 레닌은 사회혁명은 민족적 억압에 반대하는 소부르주아를 포함해 성격이 각이한 여러 계급·계층이 참여할 수밖에 없으며, 다양한 색조에도 불구하고 혁명전위가 이를 하나로 묶어세워 지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해방 전쟁에서, 제국주의가 위기를 심화·확대시키기 위해 불러오는 단 하나의 재앙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항하는 모든 인민 운동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매우 가련한 혁명가일 것이다.” (99p)

 

 

볼셰비키 내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경향 비판

레닌은 볼셰비키 내부 부하린-퍄타코프(키엡스키)-보시 그룹의 비마르크스주의적·반볼셰비즘적인 태도를 겨냥하여” <발생하고 있는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경향>, <키엡스키에게 보낸 회답>,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를 집필한다. 이들 그룹은 제국주의 시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부정하고, 당이 민족자결 요구를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은 지금 새로운 경제주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구 경제주의는 노동자는 경제투쟁을, 자유주의자는 정치투쟁을하자는 우경적 오류부터 정치혁명 대신 사회주의적 변혁을 위한 총파업!’을 외치는 좌경적 오류까지 정치혁명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새로운 경제주의도 이와 비슷하게 자결권에 반대한다는 우경적 오류부터 우리는 최소강령(개량 투쟁)에 반대한다. 사회주의 혁명과 모순되기 때문이다는 좌경적 오류까지 좌·우경을 넘나들고 있다.

 

레닌은 이런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와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도 전혀 관련이 없고, 이것을 내버려두면 이데올로기적 혼란 및 사적 분쟁’, ‘알력다툼등으로 번지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에 철저하고 단호하게 이 문제를 규명하겠다고 밝힌다.

 

부하린은 사회주의가 민족적 억압을 철폐할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내므로 당이 이 문제에 관한 정치적 임무를 정식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제국주의에서 자결은 실현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경제적인 이유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때문인지는 밝히지 못한다. 또 자결이 조국방위로 이어진다며 자결을 부정한다.

 

레닌은 부하린이 과거 경제주의가 자본주의의 도래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연결 못시킨 것처럼 제국주의의 도래를 개량 및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로부터, 제국주의하에서의 민주주의적 요구의 실현 불가능이라고 하는 완전한 혼란이 생겨난 것이다.”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들의 말처럼 제국주의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동시에 대중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적 열망이 생기고, 민주주의적 제도가 만들어진다. 제국주의의 민주주의 부정과 대중의 민주주의 지향이 서로 충돌하며 격화된다. 물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적 개조로는 타도될 수 없다. 경제적 혁명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경제적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훈련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중략)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은 생산수단을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체 인민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전체 근로인민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반프롤레타리아와 소농민을 끌어들여서 그들의 대열, 그들의 힘, 그들의 국가 업무에의 참가를 민주주의적으로 조직하지 않고서는 실행될 수 없다.” (135p)

 

레닌은 제국주의를 타도할 경제혁명은 민주주의 투쟁으로 단련된 프롤레타리아를 필요로 하며,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폐지 및 관리는 이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전체 인민대중이 국가업무에 민주적으로 참가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반향의 각성과 성장은, 민주주의적 저항과 소요의 고조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이 새로운 경제주의는 제국주의와 민주주의 투쟁의 상호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자결은 실현불가능하다는 둥 제국주의 시대는 오로지 제국주의 전쟁만 가능하다는 둥 구체적 분석은 뒤로 한 채 제국주의라는 암송한 단어만 되뇌며 사회주의 운동에 혼란을 주었다.

 

 

감상정리

레닌이 조국방위를 비판하는 글을 심심치 않게 접했는데, ‘민족자결에 관해 논의하는 건 이번 레닌전집 64권을 통해 처음 접했다. 아무래도 민족문제는 좌파 안에서도 꽤나 묵직한 쟁점이기에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레닌은 민족자결 문제를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로 바라보는 듯하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민족자결에 관해 취해야할 입장은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입장과 다를 이유가 없다. 민족자결, 혹은 조국방위는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진보적일수도 반동적일수도 있다. 요컨대 한때 서유럽에서 일어난 민족전쟁은 진보적이었으나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서는 민족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조국방위논리가 동원된다. 기만적인 민족전쟁과 진정한 민족전쟁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들은 모든 조국방위를 거부한다거나 제국주의 시대는 민족자결이 불가능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반화된 문구를 들이밀고, 심지어 민족자결을 포함한 각종 민주주의 요구 전체를 불가능하다거나 불필요하다는 입장에까지 이른다. 레닌은 이들의 이론적 오류가 결국 실천적으로 배외주의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이 새로운 경제주의를 반박하는 중에 당시 혁명에 관한 레닌의 견해가 짤막하게 드러나는 부분도 꽤 흥미롭다. 조금은 코끼리 다리만지는 격 같지만 간단히 몇 자 정리해본다.

1)현재 주 타격 대상은 대국 부르주아지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병합국들의 민족 전쟁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해당국가 내부에도 착취계급인 부르주아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은 우리의 주적인 대국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모든 봉기를 반동적이지만 않다면 지지해야한다고 말한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모든 인민운동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2)소부르주아를 비롯한 다양한 계급·계층이 혁명 동력에 포함된다.

식민지나 반식민지의 민족봉기, 편견에 사로잡힌 소부르주아지 일부의 혁명적 분출, 낡은 사상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대중운동 등이 없는 순수한 사회혁명은 불가능하다. 이들의 참여가 없으면 어떤 혁명도 가능하지 않다. 이들은 각종 편견, 반동적 환상, 약점과 오류를 운동 속에 가져올 것이지만 혁명전위인 선진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대중투쟁을 하나로 묶어세우고 지도하게 될 것이다.

 

3)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주체는 민족자결을 포함한 민주주의 투쟁으로 단련된 노동계급이다.

국제주의적 입장에 따라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 정부에 맞서 내란을 일으켜야겠지만, 이들이 혁명을 수행할 힘을 갖기 위해서는 각국 노동자들이 보다 긴밀하게 결합해야 한다. 이 결합은 병합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촉진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훈련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경제적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

 

4)사회주의 건설은 전체 근로인민대중이 민주적으로 국가에 참여해야만 가능하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생산수단을 관리하는 혁명적 과업들은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소농민도 포함한 전체 근로인민 대중이 민주적으로 조직되어 국가에 참여해야만 실행할 수 있다.

 

구 경제주의든, 새로운 경제주의든 이들의 공통점은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하고 정치투쟁을 거부하는 데 있다.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 이런 조류에 맞서 사회혁명에서 정치투쟁의 불가피함을 말한다. 국가와 정치권력문제에 있어서 레닌은 조야한 경제환원론을 거부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각종 투쟁으로 단련된 선진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급계층의 대중운동을 필요로 한다. 이후 건설과정에서도 노동계급을 포함한 근로 인민대중이 민주적으로 조직되어 국가업무에 참여해야 한다.

 

정치투쟁으로 단련되고 형성된 계급연합이 정치혁명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사회혁명을 시작한다. 내식대로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아무튼 100년도 전에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들이 그 오류로 인해 레닌 말마따나 일관성 없는 병합주의자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오늘날은 과연 어떠한지 물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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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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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정리
파농은 알제리민족해방전쟁 경험을 토대로 탈식민화에서 폭력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했다. 책은 식민지상황이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부터, 농민계급의 자발성, 저개발국 민족부르주아지의 특성 그리고 민족의식과 민족문화까지 폭넓게 다룬다. 별도로 사르트르의 꽤나 긴 서문(1961년 판)이 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유럽인 한 명을 죽이면, 억압자가 한 명 줄고 해방자가 한 명 늘어난다’는 미친 멘트를 시전한다.
 
이 때문인지 2002년판 서문에서 파농의 동료 알리스 셰르키는 사르트르 서문이 파농이 마치 폭력을 정당화한 거처럼 호도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사르트르가 그냥 사르트르했다. 식민지 민중은 식민지구조에서 내면의 자아가 파괴될 수밖에 없고 (왜냐하면 억압에 항복하면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이고, 저항하면 고문과 죽음의 공포가 따른다) 이 소외를 극복하는데 폭력은 불가피하다.
 
*달리말해 (불합리한) 상황에 종속된 자아가 폭력을 통해 억압적 상황을 극복하는 자아,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표현이 거칠긴 했지만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는 측면에선 사르트르와 파농은 일맥상통해 보인다.
 
(1)폭력에 관하여
탈식민화란 어떤 종의 인간이 다른 종의 인간으로 바뀌는 걸 말한다. 개개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은근슬쩍 전개되지 않는다. 대상화된 사물이던 이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 탈바꿈된다.
 
식민주의는 식민지 민족의 관습, 전통, 신화를 빈곤한 영혼, 악행의 상징으로 만든다.
식민주의는 역사의 창조자이자, 모든 것의 원인이다. “우리가 떠나면 모든 게 사라지고 이 나라는 중세로 되돌아 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식민주의는 무력으로 정통성을 유지한다. 식민지에 세워진 동상은 “우리는 총검의 힘으로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식민주의는 식민지 민족에 이분법을 강요한다. 탈식민화는 이 강요된 이분법을 제거함으로써 민족의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민족주의 정당은 식민지 체제에서 작은 이윤을 얻는 시민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노동자 정부라는 추상적인 구호를 가지고 투쟁하지만 자기나라에서 앞세워야 할 구호는 민족주의적인 것이어야 한다. 


*파농이 말하는 민족주의 정당은 민족 부르주아지를 말하는 듯하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 민족정당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구호의 경우는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민족해방전쟁에서 민중이 동원되면 개인의 의식에 공통의 대의, 민족의 운명, 집단의 역사 같은 관념이 싹튼다. 해방전쟁을 통해 각 개인이 덩어리로 된다.


 *여기서 생각해볼 쟁점은 ‘개인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로 되는가?’에 있지 않나 싶다. 수카르노는 분쟁은 인종, 종교차이 때문이 아니라 욕망이 달라서 생긴다고 했는데, 파농도 이해관계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이와 비슷한 관점이지 않았나 싶다.
 


(2)자발성의 강점과 약점
(민족)정당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도시의 노동계급, 공무원 등 소수세력을 중시한다. 식민지 프롤레타리아는 식민지 체제로부터 수혜를 입는 계급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민족정당은 농민을 불신한다. 식민주의가 지배를 위해 농촌을 정체시켰기 때문이다. 식민지 농민은 기존 사회구조에 집착하지만 규율을 잘 지키고 이타적이고, 공동체를 앞세운다.
 
민족 부르주아지와 봉건 영주, 도시와 농촌, 서구화된 가치와 봉건적 가치가 충돌한다. 착취에서 수혜를 누리는 원주민과 배제된 원주민 사이에 적대감이 돈다. 식민주의자들은 이 적대감을 이용하여 민족 정당과 싸운다. 부족주의/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이용한다.
 
(민족)정당은 농촌지역을 조직하지 못한다. 조직가를 투하하지만 농민의 전통적 사회, 도덕적 권위를 박해할 뿐이다. 이런 조직화 실패가 불신과 적대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후 독립이 달성된 뒤에도 농촌 주민들은 정부가 제시한 구조개혁을 따라잡지 못한다. 이는 변화를 이끄는 민족정당이 당의 목적, 국가적 추세, 국제 정치 쟁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당 내부에 두 가지 성향(합법적/비합법적)이 병존한다. 소수파들이 탄압을 피해 도시로 떠나고 농민들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에게 군사훈련, 정치교육을 하고 무장투쟁이 시작된다. 농촌에서 시작된 반란은 도시 주변부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통해서 도시로 전파된다. 각 지방마다 소규모 정부가 구성된다. 민중은 법을 제정하고, 자아를 되찾고, 스스로 주권을 획득한다.
 
*파농은 이론적인 면보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쟁 경험을 바탕에 두고 썼다. 민족정당에 대한 그의 설명은 민족부르주아지라는 계급적 측면과 더불어 당시 알제리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하고 읽어야 할 듯하다. 이는 농민들의 특성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농민들은 ‘도덕적 가치관을 유지하고 민족에 대한 순수한 헌신성이 있다’는 언급에서도 근거는 명확치 않다. 다만 민족해방과정에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측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과 기존 이론과 달리 농민이나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주요 동력으로 본 것은 주목할 만하다.
 
농민과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자발적인 충동이라는 점에서 약점을 갖는다. 이런 자발적 충동은 자기부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도부는 진정 해방하려면 집단을 계몽해야한다. 정치는 신비화의 수단이 아니라 투쟁을 명료화하는 것이다. 농민봉기는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일반 대중의 평균적인 의식 수준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다. 단지 불굴의 용기나 멋진 구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민주의는 족장에게 뇌물을 주고 앞잡이로 세운다. 룸펜 프롤레타리아도 활용한다. 각종 유화조치를 통해 일부 지지를 얻는다. 국민적 통합을 무너뜨리려 한다. 이제 대중의 정치교육은 역사적 필연성으로 요구된다. 민중에게 사태를 설명해야한다. 양보를 하는 주체는 식민주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민중은 무차별적인 민족주의로부터 사회경제적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민중 지도부가 조직하고 교육하는 폭력만이 대중에게 사회적 진실을 이해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런 투쟁이 없으면 분화되지 않은 대중은 여전히 중세의 삶을 지내며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다.
 
*자발적 정념으로 시작한 투쟁은 객관적 가치로 보완되어야 한다. 정념에서 스스로 역사적 가치를 선택하고 실천하는 의지로 탈바꿈해야 한다. 실천-이론의 변증법이 작동해야 한다. 지도부가 교육하는 투쟁을 통해 이원론적 민족주의에서 사회적 진실로 나아간다. 새로운 인간은 자발성만으로 탄생되지 않는다.
 


(3)민족의식의 함정
민족의식은 모든 사람의 내적인 희망을 아우르는 결정체가 아니며, 대중동원의 결과도 아니다. 도리어 민족적 노력과 민족 통합을 해치는 편견이다. 민족 부르주아지의 지적 나태함, 정신적 빈곤의 소산이기도 하다.
 
식민지 체제 붕괴 후 민족 부르주아지는 저개발 상태의 부르주아지다.
이들은 생산적 산업이 아닌 중개업 분야에서만 활동한다. 이들은 무역부분을 국유화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발달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식민지 시대 유산인 부당 이득을 자신들이 수취하게 해달라는 의미다. 이들은 새로운 방식을 찾지 못하고 식민지 시절 토착 생산물에 의존하던 기존 농업생산 방식에 갇힌다. 독립 후에도 국민경제는 여전히 원료를 수출하며 유럽에 딸린 소농민으로서 미완성 상품을 취급한다. 이들은 부르주아지 특유의 역동적이고 선구자적 특성이 없다.
 
대지주 계급은 농업 생산 국유화를 요구한다. 식민지 시절 이주민들이 소유했던 농장을 통째로 차지해 자기지역에 영향력을 늘리기 위함이다. 이들은 새로운 농업기법을 도입하지 않는다. 이들은 국가적 노력이라는 명목 하에 농업노동자에게 막대한 노동을 강요한다. 이들은 일체의 위험을 거부하며 이윤을 재투자하지 않고 자기 과시에 사용한다.
 
지배계급은 민족주의로부터 초민족주의로, 쇼비니즘으로, 최종적으로는 인종주의로 옮아간다. 식민주의에 맞선 아프리카 통일이라는 이념은 이제 미시민족주의에 갇히게 된다. 이런 분위기는 대중에게까지 전파된다. 특정 영토를 중심으로 흑인이나 아랍인의 개념을 국한하자고 요구한다. 식민주의 이전의 지역 간 종족 간 증오심이 다시 등장한다. 아프리카 통일 이념은 지역주의로 변질된다. 민족 부르주아지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얻는다.
 
신생국의 경제노선은 신식민주의로 흐르게 된다. 예산은 기부금과 차관으로 균형을 맞춘다. 외국인들은 매년 차관을 주고 각종 이권을 따낸다. 민족 부르주아지는 민중을 착취해 얻은 이윤을 외국으로 수출한다. 자기 나라에 투자하지 않고 외국 채권을 구입한다. 부르주아지 지배기 동안 구조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식민주의자들이 남긴 경제, 사상, 유산을 떠안은 것 밖에 없다. 저개발국의 부르주아지는 외국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이들은 진정한 부르주아지가 아니다. 즉 부르주아 단계 이론은 맞지 않다.
 
결론적으로 당이 이끄는 대중과 혁명적 원칙으로 무장된 지식인이 공동노력으로 이 쓸모없고 유해한 중간층을 가로막아야 한다.
 
식민지 경제에서 중개업을 초기에 국유화해야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 국유화란 도매업, 소매업을 민주적 형태로 재편하는 걸 뜻한다. 일반대중을 정치훈련을 통해 끌어들이지 않으면 국유화는 성공할 수 없다. 대중의 정치훈련은 수만 명을 동원하는 대중 집회가 아니다. 대중을 어린이가 아닌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사가 제기한 질문에 진정 답하고 싶어 하는 나라, 주민의 두뇌까지 발달시키고 싶어 하는 나라라면, 믿음직한 정당을 가져야 한다. 당은 정부가 가지고 노는 도구가 아니라 민중의 수중에 있는 도구다. 정책을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민중이다. 당은 권력기관이 아니라 민중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의지를 표현하는 조직이다. 당은 행정부가 아니라 대중의 적극적인 대변인이며 청렴한 옹호자다.
 
*앞서 민족정당에 대한 파농의 비판이 당 일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민족 부르주아지를 염두에 둔 비판이었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파농은 진정한 정당을 말했는데, 이는 앞서 민족해방전쟁에서 자발성이 가진 약점과 연관되어 보인다. 당은 민중의 자발적인 정념이 역사적 가치를 지향하는 의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즉 당은 실천-이론(의식)의 변증법을 담보해야한다. 욕망, 이해관계를 뛰어넘으려는 파농의 문제의식이 느껴진다.
 
당은 민중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당 지도부는 농촌 지구에 살아야 한다. 농촌 대중과 접촉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고립된 개인은 문제를 이해하는데 고집스럽지만, 집단이나 촌락은 당혹스러울 만큼 빠르게 문제를 이해한다. 민중은 더 이해할수록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걸 깨닫는다. 필요한 건 세포다. 대중이 서로 만나서 토론하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민중은 아주 빠르게 사회의식을 확립한다. 위험의 가능성은 민족주의 단계 이전에 사회의식 단계에 도달할 경우다. 이 경우 민중은 사회적 정의를 격렬하게 요구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는 원시 부족주의와 통하는 측면이 있다. 반대로 대중에게 민족주의만 제공한 민족 부르주아지는 실패한다. 민족주의가 사회, 정치적 필요에 관한 의식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다. 민족주의는 명확해져야 한다.
 
민족의 살아있는 표현은 민중 전체의 움직이는 의식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관적이고 계몽된 행동이다. 집단적 운명의 구축은 역사적 차원에서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에 관한 파농의 입장은 양면적으로 보인다. 민족주의가 형식적이고 이원론에서 그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반대로 민족주의를 도달하지 않고 (파농의 표현을 따르면) 사회의식에 도달하는 것을 경계한다. 앞서 파농은 정치는 신비화가 아니라 투쟁의 명료화라고 했는데, 민족주의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라는 기표는 민족부르주아지에 의해 형식주의(신비화)에 갇힐 수도 있고, 정치훈련과 교육을 통해 구체적 내용(명료화)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파농이 단순히 민족주의를 거부했다고 보지 않는다. 민족주의와 사회의식 한쪽만을 취할 수는 없다. 민중이 지향의 일치를 통해 집단적 운명을 구축하기 전에 사회의식만을 가졌을 때 파농은 부족주의라 표현했지만, 자칫 경제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다.
 
 
(4)민족문화에 관하여
정당 내부와 주변에 원주민 문화인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식민지 이전 시대를 야만으로 보는 식민주의 이론에 맞서기로 결심하지만 식민주의는 별 반응이 없다. 이들은 식민지 이전 시대 존재했던 민족문화를 탐구하여 서구문화에 위축되지 않는 정당한 근거를 찾으려 한다. 이런 과거 민족문화에 대한 요구는 오늘의 체념을 넘어 희망을 발견하려는 의지다. 심리-정서적 안정이라는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식민주의는 왜곡된 논리에 의해 피억압 민중의 과거를 왜곡하고 파괴한다. 식민지 지배가 원주민 사회의 어둠을 밝혀주기 위한 것이라고 납득시킨다. 자신들이 떠나면 식민지는 즉각 야만과 타락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심기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식민주의는 어머니로서 근원적으로 불행한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식민주의는 이런 주장을 아프리카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원주민 지식인도 서구 문화에 맞서 다른 문화의 존재를 찾을 때 ‘아프리카 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지난 20년간 원주민 문학은 민족 문학이 아니라 흑인 문학이었다. 흑인정신(네그리튀드)라는 개념은 논리적이라기보다 백인의 모욕에 맞선 감정적인 대응인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문화인은 민족문화가 아닌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역사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탓에 자칫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수도 있다.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보여주고, 자신들의 견해와 유럽인의 견해를 비교하는 정도에 그친다. 이런 태도는 통상적이며, 서구 문화인이 퍼뜨린 거짓에서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흑인 정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역사적 특징이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한계에 맞닥뜨린다. 아메리카 흑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당면한 문제가 다르며, 주관적 감정이 누그러진 뒤에 서로의 객관적인 문제가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문화는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는 일차적으로 민족적이기 때문이다. ‘흑인-아프리카 문화’ 혹은 ‘아랍-무슬림 문화’를 향한 운동은 반드시 민족문화를 지향하지 않는다. 문화는 시사적인 사건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원주민 지식인의 태도는 신앙의 모습을 보인다. 이는 민중과 마지막 연계가 끊어지는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에 의해 나타난 징후적 행위다. 원주민 지식인은 서구 문화의 우월성에 맞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필요성을 느낀다. 자신이 점점 소외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원주민 지식인은 서구문화를 탐식했기 때문에 이런 탈피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하다.
 
서구 문화에 동화된 단계에서 뿌리를 찾는 단계를 거쳐 투쟁단계에 이른다. 이 단계에서 전투적인 문학, 민족적인 문학이 나온다. 이것은 민족의 증거를 문화로써 보여주는 게 아니라 민중이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는 투쟁 소에서 민족의 존재를 구체화한 것이다. 그저 과거 유물 몇 가지를 아무렇게나 나열한다고 해서 식민주의가 부끄러워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관습과 대립한다. 전통에 접근하려는 욕구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민족에 반대하는 걸 뜻한다. 민중이 식민주의에 맞서 투쟁을 시작할 때 전통의 의미는 변화한다. 참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려는 원주민 지식인은 민족의 진실이 우선 민족의 현실에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로 향하는 것은 내적 리듬이 결여된 재현 예술이며, 삶보다는 죽음을 연상시키는 정적인 예술이다. 이미 낡아 거부된, 민중이 도중에 밟고 지나간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민족문화는 민속 연구도 아니고, 민중의 참된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추상적 인민주의도 아니다. 민족문화는 민중이 스스로 창조하고 존속시키는 행동을 사유의 영역에서 묘사하고 정당화하고 찬양하기 위한 모든 노력의 총체다.
 
문화는 민족의 취향, 금기, 성향 등의 표현이다. 문화가 생존하기 위한 조건은 민족해방과 국가의 부활이다. 비존재의 문화는 현실성을 지닐 수 없고 현실에 영향을 줄 수도 없다. 자아의 의식은 의사소통의 문을 닫아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아의 의식은 의사소통을 확실히 보장한다.
 
*민족문화에 관한 설명은 앞선 <민족의식의 함정>에서 보인 문제의식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민족주의가 스스로를 형식적으로 제한하는 이원론에 빠질 위험이 있듯이, 민족문화의 경우도 흑인정신(네그리튀드)과 같이 고정된 정체성에 갇힐 위험이 있다. 파농은 그럴수록 문화가 시사적인 것과 멀어지며, 문화는 일차적으로 민족적이라는 걸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민족의 과거 유물, 문화적 증거도 민족문화가 아니다.
 
난해하기도 했지만, 파농의 이런 입장을 이해하는 데서 ‘비존재의 문화는 현실성 지닐 수 없다’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흑인정신이든 과거유물이든 그것은 비존재의 문화다. 민중이 식민주의에 맞서 투쟁에 나설 때서야 비로소 존재의 문화가 가능하다. 파농이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받아들였다.
 
(5)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에서는 식민지 체제와 해방전쟁으로 인해 생긴 정신질환을 사례별로 소개한다. 해방전쟁 전 알제리인의 높은 범죄율을 토대로 서구는 “북아프리카 원주민은 본능적인 삶을 지니며, 간뇌의 통제를 받는 원시적 생물”이라는 의학적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해방전쟁이 시작하자 알제리인의 범죄는 줄어들었다. 해방전쟁이 알제리 민중을 재통합했고,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결론에서 파농은 동지들에게 유럽을 떠나라, 유럽을 버려라, 유럽을 흉내 내지 말자고 외친다. 유럽을 비난할 필요도 유럽을 따라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제3세계가 할 일을 새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고 새로운 인간을 정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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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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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와 경합으로써 좌파, 접합으로써 포퓰리즘
민주주의와 반대된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이 실은 민주주의의 주요 구성요소가 된다는 통찰이 돋보입니다. 통찰이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그러면서 현실(유럽)정치와 잇는 걸 보면서 감탄하면서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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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화사 외 42인 지음, 한국여성민우회 엮음 / 궁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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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마냥 어려운 이론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적잖은 남성들이 나와 비슷한 연유로 투덜거리거나 따지는 걸 보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불만은 다소 부당하다. 페미니즘만 그럴까? 어떤 철학이나 사회이론도 내 삶과 접점이 없다면 어려운 말공부처럼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깐 문제는 페미니즘에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삶과 연결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삶과 연결시키는 방법은 각자가 누구이고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책 속의 이들이 성에 따라 잣대가 다른 등목, 동경에서 시작한 여장놀이 그리고 자녀교육의 어려움 등 삶에서 부딪혔던 부분이 모두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삶과 연결시키는 문제는 여전히 어렵지만, 일단은 ‘함께 살기’에서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 ‘삶’이라고 했을 때 그 앞엔 언제나 ‘함께’라는 말이 생략되어있다.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만드는데서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는 중대한 문제다. 우리가 책 제목처럼 ‘무례와 오지랖’에 맞서 온전한 자신을 지켜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온전한 개인이 함께 살기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개인이 있어야 진정한 관계가 가능하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릴 온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온전함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인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쪽이 억압하거나 의존하는 관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억압과 의존은 인간을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방해한다. 


아쉽게도 인류가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않은 이상에야 ‘억압’과 ‘의존’은 형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사회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지와 별개로 그런 불의한 사회에 태어난다. 때로 인간은 불가피하게 그런 상황에 체념해 숙명론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상황을 인지하고 극복하기도 한다.


나는 각종 철학과 이론이 인간이 후자로 나아가게 하는 버팀목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한다고 멋대로 규정한다. 아마 노예제니, 절대왕정이니 하며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오는데도 우리가 처한 불의한 상황을 직시하도록 하는 어떤 사상, 이론 등이 있었을 것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성별이분법이나 강요된 여성성, 가부장제, 모성애 이데올로기 등 책 속의 이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무엇이 내 삶을 온전하지 못하게 하는지 인식하고 나아가 극복하고자 했다. 


책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글쓴이는 사회적으로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등목을 할 수 없다는 데서 여성의 몸이 남성의 몸과 다르게 정의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성의 몸은 성적공간으로 환원되고 대상화된다. 인간 존재의 다양한 결이 환원과 대상화를 통해 축소되고 억압된다. 


성별이분법도 인간 존재를 축소시킨다. 퀴어의 존재를 지운다는 당연한 측면을 자처하더라도 남성성/여성성이 강제된다. 여장놀이를 추억하던 글쓴이는 자신의 여장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강요된 여성성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지 않을까 고민한다. 결론적으로 글쓴이는 ‘여장하기’가 자신 안의 다양한 특질을 발견하는 기회로, 성별이분법이 강요한 정체성을 뛰어넘는 시도가 되길 기대한다.


다만, 정체성과 관련해선 한 가지 짚고 싶은 게 있다. 특정 정체성(남성성/여성성)이 사회적으로 강요되었는가, 아니면 내 안에서 비롯되었는가를 구분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올바른 접근도 아니라 생각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획득된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정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인가에 있다고 본다. 인간 존재의 다양한 결을 포함해가며 확장하는 정체성인가? 아니면 존재를 축소시키는 정체성인가? 인간을 몇 가지 특질로 환원하는 정체성은 인간을 억압한다. 책 속 글쓴이가 고민한 것처럼, 똑같은 ‘여장하기’라도 여성성을 강화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성별이분법을 흔드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여장하기’뿐만 아니라 때때로 정체성 정치라고 비난받는 개념들인 젠더, 민족, 계급 등에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다. 


모성애 이데올로기는 여성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인간의 다양한 면을 축소시킨다. 책에서 자녀교육이 잘 풀리지 않는 글쓴이는 모성도 이데올로기라는 인식을 통해 내 인생은 마이너스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처럼 주체의 자기인식은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론 특정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한 구조를 극복하는 게 필요하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역할을 사적영역으로 축소하여 의존적 존재로 만든다. 모성애 이데올로기는 존재의 억압이자 의존적 상황의 표현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린 함께 살며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만약 그 관계에서 한쪽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아니 온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계라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살기 위한 출발점이자, 꼭 거쳐야 할 징검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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