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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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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두 사람이 번역했는데, 그에 비해 번역이 너무 명쾌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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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에는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깃털들」, 「체프의 집」, 「보존」, 「칸막이 객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비타민」, 「조심」, 「내가 전화를 거는 곳」, 「기차」, 「열」, 「굴레」, 「대성당」. 여기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 단편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이 아닐까 하며 글 좀 쓴다 싶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단편이 「깃털들」과 같은 단편이 아닐까 한다(후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통계다). 사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에 대해서라면, 저마다 최고로 좋아하는 단편이 다양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사람은 나로서는 다시 읽어보기 전에는 줄거리조차 생각나지 않았던 「칸막이 객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손보미와 신형철은 카버의 중기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정자」같은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먼저 「칸막이 객실」을 들여다보자.  마이어스는 이혼한 이래 팔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이를 보러 스트라스부스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있다. 부자의 마지막 모습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네가 태어났는데" "네까짓 녀석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와 같은 말을 아이에게 했었다.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현재 시점에서 두 달 전에-아이에게서 짧은 편지가 도착한다. "불가사의하게도 아이는 '사랑해요'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고, 그 때문에 마이어스는 이 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야만 했다. (84쪽)" 마시어스 역시 "사랑하는 아빠가"라고 끝맺은 답신을 보낸다. 마이어스는 시간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무리를 해서 생각지도 않은 유럽 여행을 간다. 순전히 아이만을 보기 위해서 불현듯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뭔가 께름칙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트라스부스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들린 로마나 베니스에서 마이어스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스트라스부스로 향하고 있는 기차 안에서, 마이어스는 외투 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아이의 선물을 잃어버린다. 로마에서 산 고가의 일제 손목시계인데, 그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없어졌다. 칸막이 객실에는 독일인으로 생각되는 외국인 뿐이고 그는 시계의 행방에 대해서 묻는 마이어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제스처를 한다. 마이어스는 잃어버린 시계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진실에 대해서 깨우친다. "그때 갑자기 그는 결국 자신은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됐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그는 충격을 받았고, 그 비열한 생각에 잠시 움찔했다(89쪽)" "그에게는 정말 오래전에 이미 자신의 애정을 거둬들이게 행동했던 그 아이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점이었다.(89쪽)" 그 뒤로도 마이어스의 서늘한 생각들은 이어진다. 아이가 마이어스의 청춘을 집어삼키었고 자신의 사랑스러웠던 아내를 알콜중독자로 만들었다고. 그는 정말이지 '자기 인생의 적'인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싶지도 않고 어깨를 토닥거리고 싶지도 않다고. 하여 그는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었다. 맞은편의 외국인은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면서 마이어스에게 "스트라스부스"라고 말한다. 너 스트라스부스 가잖아, 안 내릴 거야? 라고 묻는 투로. 시계는 아마 외국인의 품에 있을 거라고 마이어스는 확신한다(마이어스의 외투 안에는 '기차표'가 들어 있는 지갑과 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다.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혹시라도 기다리고 있을 아들이 서 있나 창밖을 살펴보며 마이어스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젊은 연인들을 본다. 이 젊은 연인 중에 남자가 마이어스의 칸막이 객실로 들어오고 그들은 차창을 사이에 두고 또 절절한 작별인사를 한다. "마이어스는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93쪽)" 마이어스는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지 않았고 젊은 연인이 자신에게 환기한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객실을 나와서 기차가 조차장에 들어갔을 때 객차들이 연결되는 지점까지 간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고 마이어스가 허겁지겁 원래의 객차로 넘어가 자신의 칸막이 객실을 찾지만 젊은 남자도, 마이어스의 여행 가방도 없다. "그는 기차가 조차장에 있는 동안 자신이 타고 있던 객차를 떼어낸 뒤 다른 이등 객차를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오싹함을 느꼈다. (95쪽)" 새로운 칸막이 객차 안에 꽉 들어찬 피부가 까만 외국인들은 마이어스를 환대하며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고 마이어스는 시계도, 여행가방도 잃어버렸지만 더없이 편해져서 이내 잠에 빠져든다. 마이어스가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들은 이러했다. "한순간, 마이어스는 그 풍경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지만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그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잘못된 길이라면 머지않아 그도 알게 될 것이다. (95쪽)


이 소설의 결말은 「열」의 칼라일의 깨달음과 비슷한 선상에 놓인다.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비록 그게 불가능하게 보였고 그가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287쪽)" 그런가하면 「굴레」의 마지막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마부가 그 고삐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면 말은 방향을 바꾼다. 간단하다. 재갈은 무겁고 차갑다. 이빨은 이런 걸 물어야만 한다면 금방 많은 것을 알게 됐으리라. 뭔가 당겨진다면 그건 떠날 시간이 됐다는 뜻이라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뜻이라고.(322쪽)"


그러니까.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무너져 내린' 인물의 현재와 혹은 그 '파열선'을 찾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면 『대성당』에는 엉망진창이었던 과거의 삶이 인생의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단절선'을 그린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열」이나「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나 「대성당」처럼 마냥 희망적인 조짐은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칸막이 객실」에서 보여주는 마이어스 삶의 '단절선'은 희망적이라기 보다는 서늘하고 사실적이며,「깃털들」역시 그러하다. 잭과 프랜이 버드와 올라의 집을 방문하고서 맞이한 삶의 국면은 적어도 잭과 프랜에게는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으리라... 할 수만 있다면 버드와 올라의 집을 방문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게 삶인 것을. 삶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부부가 겪는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101~102쪽)" 처럼 삶의 높낮이를 바꿔버리는 힘이 존재하기도 하고 「굴레」에서 홀리츠와 베티 가족을 지켜보았던 화자가 덤덤한 목소리로 "뭔가 당겨진다면 그건 떠날 시간이 됐다는 뜻이라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뜻이라고.(322쪽)"라고 전해주듯이 삶의 높낮이라기 보다는 그저 방향을 트는 힘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말하는 지점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기에는 몹시 가슴 아프고 괴롭고 최악이었던 과거여서 그 과거의 길을 쭉 복기하는 채로 이후의 삶의 방향을 돌렸다기 보다는 과거의 삶을 '말소'해버리고 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어떤 지점, 일 것이다. 「칸막이 객실」에서 마이어스의 객차가 바뀌는 것처럼.


카버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단편적인, 조각으로 기워진 사실들이다. 두 권의 소설집,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것들, 역자들의 해설, 작가 연보와 『작가란 무엇인가』에 나와 있는 인터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사실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알콜 중독이었던 카버는 77년 6월에 술을 끊었으며 81년에 중기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냈고 82년에 스승인 존 가드너가 죽었고 첫번째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했고 83년에 『대성당』을 냈다. 『대성당』을 출간하면서 편집자 고든 리시에게 전처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던 것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그보다도 작가 인생의 변화가 작품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카버가 88년에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살아서 우리에게 보여줬을 작품들을 상상해보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카버 특유의 '파열선'을 포착하고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품들도 여전히 있다. 「체프의 집」이라든가 「비타민」, 「보존」같은 작품들. 이번에 읽었을 때 특히 눈에 띄었던 작품은 「보존」이었다. 한마디로, 제목부터가 절묘했다.


샌디의 남편은 석달 전에 해고된 뒤로 늘 소파 신세다. 남편은 매일 밤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고 살아간다.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살아가려 하지만 샌디에게 이런 생각을 막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어딘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샌디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자신에게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녀는 고맙게 여겼다. 하지만 자기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또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64~65)” 그러던 어느 오후, 샌디가 퇴근하고 돌아와 프레온이 빠진 냉장고를 발견한다. 녹은 음식과 아이스크림 등으로 냉장고는 엉망진창이다. 그녀와 남편은 냉동실에 있던 것들을 꺼내어 일단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들은 중고 냉장고를 파는 사람이 있나 신문의 광고면을 훑어보다가 창고 경매를 한다는 글을 발견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밖에 한 번 나가서 바람도 쐴 겸 냉장고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고 나가자고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이렇다.평생 경매에는 한 번도 안 가봤어. 이제 와서 그런 곳에 가고 싶지는 않아. (73)” 그러나 어쨌든 그는 아내에게 가겠다고 말한다. 그녀가 외출하기 전에 먹을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소파에서, 늘 보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읽다가 이내 잠들어버린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빠와 경매에 가곤 했던 것을 떠올린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뒤로 아빠는 딸과 경매장에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아빠는 결국 경매에서 산 차에서 일산화탄소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죽었지만... 그녀는 지금 아빠와 엄마가 그립다. 요리가 완성되었고 식탁으로 남편이 가까이 오자 그때서야 샌디는 알아차린다. 냉동식품을 올려두었던 식탁 아래로 물이 계속 떨어지며 물이 고였다는 걸. 그녀는 남편의 맨발 옆에 고인 물을 쳐다보며 그 발에서 시선을 뗄 수 없고, 그 맨발은 식탁에 앉지 않고 다시 소파가 있는 거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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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편집에 실려 있는 카버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춤 좀 추지 그래?」에 나오는 젊은 커플은 우연히 한 중년 남자의 가라지 세일에 들러서 상품을 흥정하고 술에 취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춘다. 그녀는 춤을 출 때 남자에게 말한다. 아저씬 절박해 보인다고. 그리고 몇 주 후에 애인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 나이 든 남자에게서 얻은 것들이 '쓰레기' 같다고 말한다.


「정자」의 젊은 부부는 한때 '계획'과 '희망'이란 게 있었지만 남편인 '나'는 모텔의 청소부와 바람을 피웠고 그 때문에 '나'의 아내 '홀리'는 '자기 안의 뭔가가 죽어버렸다'고 말하며 술을 마시고 운다. 소설 말미에 홀리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도시 외곽의 좁은 흙길을 달리다가 낡은 집에 이르러서 물을 한 잔 청했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집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부부를 안으로 들여 먹을 것을 주고 집을 구경시켜주었다. 부부는 집 뒤쪽의 정자도 보았다. 칠이 벗겨지고 지금은 돌보지 않는 정자지만 집주인이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서 음악이 연주되었고 사람들은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홀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나이를 먹게 되면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어. 위엄 있게. 그리고 평화롭게.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 집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남편에게 묻는 거다. "이제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어떤 집에 들어가서 물 한 잔을 부탁하는 거." 


「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는 어떠한가. 클리프의 아내인 '나'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마당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웃 집과 경계를 이루는 울타리에서 이웃인 샘 로튼을 만난다. 그는 장미 잎사귀를 갉아먹는 민달팽이들을 유인해 잡는 중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친구 사이였지만 술을 마시고 말다툼을 한 뒤로 서로 울타리를 만들고 멀어진 클리프-'나'의 남편-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시다시피 난 포기해버렸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한동안 일이 그렇게 되어갔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 집에는 아직도 울타리가 서 있죠. 하지만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봉지」의 화자인 '나'는 출장 중에 새크라멘토에 들러 아버지를 몇 시간 방문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 이 년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로, 이야기의 요점은 분명하다.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바람을 피웠다는 거다. 아버지는 샐리라는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던 초창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침실 침대 곁에 그-남편-의 사진을 놓아두었어. 처음에는 사진이 거기에 있는 게 신경이 쓰이더구나. 하지만 얼마 후에는 익숙하게 되었지. 사람이 뭔가에 어떤 식으로 익숙해지는지는 잘 알지?"


「목욕」의 스코티 어머니도 그렇다. 스코티는 생일날 차에 치였고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녀는 아들의 병실 창가에서 주차장을 내려보다가 자동차 한 대가 멈추고 긴 외투를 입은 어느 여자가 거기에 타는 것을 본다. 그녀는 자기가 바로 그 여자라고 상상해보려 한다.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의 '나'는 남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다. 남편과 친구들이 낚시를 하러 가서 우연히 소녀의 사체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곧장 신고를 하는 대신 그 사체가 물에 떠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일단 고정을 시킨 다음에 예정대로 그들의 휴일을 보낸다. 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소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마음 먹은 날, '나'는 식사를 하며 남편이 쳐다볼 때마다 아들에게 우유나 토스트 등을 더 먹을 거냐고 묻는다. 아내가 장례식에 다녀온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일을 치르기 위해 아내의 옷을 벗긴다(딴에는 며칠간 이상해 보였던 아내를 되돌리려는 행위다). 아내는 밖에 있는 아들이 오기 전에 서두르라면서 남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니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아버지를 죽인 세번째 이유」에 나오는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였던 더미는 또 어떠한가. '더미'라는 이름처럼-'더미'는 '바보' 또는 '벙어리'라는 뜻이다-부족한 한 사내가 바람난 아내 때문인지 물고기에 미쳐서인지 점점 삶의 수렁으로 빠져들다가 아내를 죽이고 자살한다. 화자인 '나'는 자신의 아버지도 더미의 죽음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더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아버지-는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고.


「심각한 이야기」나 「대중 역학」, 「한 마디 더」에 나오는 부부들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남편은 이미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살거나, 그들에게서 이제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카버의 인물들은 대체로 「정자」의 바람난 남편, 드웨인이 이야기하듯 "이제 모든 것이 옛날과 같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에 대해서 피츠제럴드-생각해보니, 카버도 그렇고 피츠제럴드도 그렇고 그들은 '술'에 관해서 문제가 있었다-의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내리다 the crack-up」에 나오는 말이 그 어느 문장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손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당신이 어떤 측면에서는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그 때가 되고 나서야 당신은 그것을 느끼게 된다."


위의 카버의 인물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대개 이런 설명들을 한다. 사실 설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설명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일이 일어났다거나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든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천 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콩트와 단편을 이렇게 비교했다. 콩트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구축된다고. (과거의 나처럼) 카버의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면 이 질문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카버의 소설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카버를 우리 앞에 좀더 친숙하게 끌어 앉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신형철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며 (나처럼) 무릎을 칠 사람도 많으리라.


"단편 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삶에서 하나의 파열선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뒤집어 말하면 '삶을 가로지르는 아주 미세한 파열선 하나'를 포착하기만 해도 단편소설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불과 50매가 채 안 되는 레이먼드 카버의 「정자」, 황정은의 근작 중에서 특별하게 카버의 어떤 정수를 탁월하게 체현하고 있는 「야행」, 어떤 거대한 사건도 거창한 행위도 없이 진행되는 줌파 라히리의 가족소설 등은 어째서 훌륭한 단편소설이 될 수 있었는가. 우리 삶을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갉아먹는 파열선이 그 소설들에 있기 때문이고, 그를 통해 우리가 이미 늦은 뒤에야 깨달았을 어떤 파열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신형철,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장편소설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단상」(『문학동네』 2010년 봄호) 중에서"


마지막으로 신형철은 그 파열을 감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뛰어난 관찰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사진을 보았을 때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저 '형형하다'라는 옛스런 표현으로는 부족한데, 카버에 대해 "본질적으로 리얼리스트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단순한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뭔가 꿰뚫어보는 듯한 심오한 면이 있다"라고 하루키가 밝힌 바 있듯이, 그의 눈에서 나는 하루키가 말한 바와 비슷한 그 무엇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사진인데도.


 

 

 

 

 

"그는 문을 닫고 주스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런 다음 입을 헹구고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거실로 갔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붙였다. 그는 이 모든 게 망가지려면 미치광이 한 명에 횃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청바지 다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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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을 처음으로 읽을 때가 기억난다. 소설이 윤리책 같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위도식하며(여기서 이미 살짝 질투가 났고) 처자식 있는 유부남이면서 여행에서 만난 게이샤와 헛된 연애를 일삼는 시마무라에 도통 동화되기 힘들어서, 정확히 말하면 반감이 심해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의 훌륭함을 미처 음미할 수 없었다. 과연 나는 어떤 독서를 한 것일까?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 나의 이같은 태도는 '경험적 독자'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경험적 독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 읽는 방식에 관한 법칙을 따로 갖고 있지도 않다. 그는 텍스트를 종종 자신의 감정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는데, 이 감정은 텍스트 밖에서 올 수도 있고 텍스트에 의해서 유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우스운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것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후에 같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웃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장면 하나하나가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우리가 느꼈던 슬픔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경험적 독자로서 당신은 그 영화를 분명 잘못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과 관련된 <잘못>인가? 그것은 영화감독이 염두에 두고 있는 관객들, 즉 자신들이 사적으로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를 웃으면서 따라가는 관객들의 유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관객(혹은 책의 독자)을 나는 모델 독자라고 부른다. 이런 독자는 텍스트가 협력자로서 기대할 뿐만 아니라 창조해 내려고 하는 이상적 유형이다. 한 텍스트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 텍스트 고유의 모델 독자를 즉각 선정할 수 있게 해주는 신호인 셈이고, 이 경우의 모델 독자는 어린아이거나 적어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초월한 어떤 무엇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이다.

 

나의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가 출판된 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 친구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움베르토에게. 내가 자네에게 우리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슬픈 얘기에 관해서 말해 준 기억은 없네만, 자네는 경솔하게도 그걸 자네 소설에서 써먹었더군.> 사실 내 책에는 <카를로 백부>와 <카테리나 백모>에 관한 몇몇 에피소드가 소개되는데, 이들은 야코포 벨보라는 등장인물의 아저씨와 아주머니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실존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어떤 아저씨와 아주머니(소설에서와는 이름이 다른)의 이야기를 약간 수정하여 소설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나는 <카를로 백부>와 <카테리나 백모>는 그의 친척이 아니라 나의 친척이고, 따라서 그것은 베낀 이야기가 아니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에게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게 사과했다. 그는 나의 소설에 너무도 몰두한 나머지 거기에 나오는 몇몇 사건들이 자신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전시(내가 회상했던 바로 그 시기)에는 비슷한 일들이 여러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그는 숲 속에서 개인적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을 찾은 것이다. 내가 숲을 거닐면서 인생에 관해,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관해 좀 더 알고자 모든 경험과 발견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숲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창조되는 것이니 만큼 내가 숲에서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실들과 감정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최근에 나온 나의 두 저서 『해석의 한계』와 『작가와 텍스트 사이』에서 말했듯이, 나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 텍스트를 백일몽으로 이용하는 것이 전적으로 금지된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흔히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백일몽은 공적인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이야기의 숲에서 마치 그 숲이 우리 자신의 정원인 양 거닐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임의 법칙을 준수해야 하는데, 모델 독자는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전술한 내 친구는 그 법칙을 잊고 작가가 원하는 모델 독자의 기대가 아니라 경험적 독자로서 자기 자신의 기대를 개입시킨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하버드에서 한 문학 강의』, 손유택 옮김, 열린책들, 2009, 21-24쪽

문학이 한 개인에 미치는 '치유' 효과를 언급하며 혹자는 '모델 독자'라는 개념에 반감을 품을지도 모르지만,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움베르토 에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숱하게 <이용하기만 하였던> 텍스트들이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음을 고백한다. '아전인수'격으로 텍스트를 소유하는 것보다얀 ​모두가 거니는 숲을 훼손하지 않고 향유하는 것이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그리고 문학에게나 정확한 방식이 아닐까.

​무엇보다, 어떤 게임을 하면서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서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은,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의 정수를 끝내 깨달을 수 없을 그 사람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움베르토 에코의 견해가 특히 유용할 사람이 있다면 습작생이라고 생각한다. 습작하는 시기에 서로 모여 합평하는 자리가 때때로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서로가 서로의 '경험적 독자'가 위험이 높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일면식을 터서 작가에 대해 어느 정도 선입견이 ​생겨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일수록 상대가 정한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고 상대가 공들여 마련한 숲을, 세계를 망치지 않고 걷도록 하자. 위기철 작가의 '작가처럼 읽고 독자처럼 쓰라'는 조언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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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버의 중기 단편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목욕」이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전신이 되는 작품인데, 이 두 작품을 잘 비교하면 그간 카버가 어떻게 변했는지(혹은 편집자 고든 리시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카버의 면모에 대해서)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단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빽빽하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조금 놀랐다.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대가'라고 불리는 카버치고, 그러니까 채워넣기보다 생략하고 비우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이끌어 갔던 스타일이 미묘하게 변했구나, 느껴서였다.

이러한 변화는 작품 초반부터 감지된다. 「목욕」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나오는 빵집 주인은 이야기를 전환시키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스코티 엄마의 시선에 의해서 빵집 주인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특히, 여기서 카버 식의 인물관찰법이 나온다. 이건 우리나라 손보미 작가에게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인데(내가 생각하기로는),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삶을 자신의 삶과 병치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빵집 주인은 신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저 최소한의 말들, 필요한 정보만 오갔을 뿐 즐거울 만한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고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연필을 쥐고 계산대에 몸을 숙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 덜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른세 살의 애 엄마인 그녀가 보기에 사람들에게도, 특히 빵집 주인과 비슷한 연배-그러니까 자기 아버지 또래의 중늙인이들-에게도 아이들이 있겠지만 케이크나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인생의 특별한 시기는 이미 지나간 게 틀림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있겠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여하튼 카버는 스코티 엄마의 시선에 비치는 빵집 장수를 최대한 퉁명스럽게 그린다. 마치 작품 마지막에 빵집 장수가 아이를 잃은 두 부부에게 생각지도 않은 위로를 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극적효과를 계산해 넣은 것처럼. 이것도 약간 카버치고는 '짜여진 듯' 느껴져서 눈여겨 보았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묘사와 인물이 하는 생각에 할당하는 부분도 대폭 늘었다.


남자는 병원에서 집으로 차를 몰고 갔다. 거리에서 그는 차를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몰았다. 지금까지의 인생은 괜찮았다. 일과 아버지의 역할,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남자는 운이 좋았고 행복했다. - 「목욕」

지금까지 그의 삶은 순탄하기만 했고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대학도, 결혼도, 경영학 고급과정 학위를 받기 위해 다시 다닌 일 년의 대학생활도, 투자회사에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게 된 일도, 아빠가 된 것도. 그는 행복했고,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형제자매들은 다들 자리를 잡았으며 대학친구들은 모두 사외에 나가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래. 기도하고 있어." - 「목욕」

"기도했어."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하는 법을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니까 또 되네. 기도라고 해봐야 눈을 감고 그저 '하느님, 우릴 도와주세요. 스코티를 도와주세요'라고 말한 게 다지만. 그것 빼고는 어려울 게 없으니까. 말이야 다 준비돼 있으니까 당신도 기도하고 싶으면"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벌써 했어." 그가 말했다. "오늘 오후에, 아니, 벌써 어제구나. 당신 전화 받고 병원으로 차 몰고 오는 동안 기도했어. 내내 기도하고 있었어." 그가 말했다.

"잘했어." 그녀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들이 이 곤경 속에 함께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는 그 곤경이 자신과 스코티에게만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내내 함께 있으면서 도왔음에도 그녀는 하워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기뻤다.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혼수상태에 빠진 스코티가 무슨 검사를 받기 위해 스코티의 침대를 끌고 갔던 간호보조원-「목욕」에는 '잡역부'라고 표현되어 있다-도 ​「목욕」에 없던 캐릭터가 생겼다. 검은 머리칼, 짙은 얼굴빛에 하얀 작업복을 입은 두 사람은 외국인이다.

스코티가 검사를 받은 다음날 스코티의 혈액을 체취하러 온 '기술자'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캐릭터를 부여받았다. 「목욕」에서는 여자인지도 남자인지도 몰랐던 그녀는 하얀 슬랙스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병실에 등장하여 피를 뽑다가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거예요? 이렇게 예쁜 애가."라고 부모에게 묻는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부부 앞에서 시종일관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서 정말 바보 같아 보였던 의사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이름까지 부여 받았다. 닥터 프랜시스. 그리고 지면을 더 할애 받아 정말 '낙관적인 바보'(혹은 '선의에 가득차 있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의 전형스런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 의사는 미남인데다가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이 부부에게 도움을 주는 게 없다. 시종일관 스코티는 괜찮을 거라며 거짓 희망만 주다가 스코티가 죽은 다음에야 풀이 꺾인다. 작품 초반에 볼룩한 배를 가진 중늙은이인데다가 덜떨어지고 퉁명스러워서 스코티 엄마가 처음에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빵집 주인과는 정반대다. 이런 '분명한' 인물의 대조도 카버에게는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라 흥미로웠다. 이제껏 카버를 읽으면서 아 이 작가는 짜여진 듯 쓴다기보다 뭔가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유독 이 작품에서 그런 것들을 굉장히 가다듬고 정돈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굉장히 '공들여'썼구나 느끼면서도 뭔가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카버가 아니라서 당황하기도 했다.

의사는 미남이었다. 그의 피부는 윤기가 흐르고, 햇빛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스리피스 양복을 입었으며, 밝은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셔츠에는 커프스 단추를 달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의사는 청중과 함께 있다가 이제 막 돌아온 거야. 그는 특별한 메달을 받았어. - 「목욕」

의사는 그을린 어깨에 어깨가 떡 벌어진 미남이었다. 그는 줄무늬 넥타이에 아이보리 커프스단추가 달린 푸른색 스리피스 양복을 입고 있었다. 회색 머리칼을 머리 양쪽으로 잘 빗어넘겨서 이제 막 연주회에 갔다 온 사람처럼 보였다.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햇빛에 그을려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해 보였다. 그는 침대로 가서 소년을 진찰했다. - 「목욕」

문이 열리고 닥터 프랜시스가 들어왔다. 이번에 그는 다른 양복에 다른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잿빛 머리칼을 양옆으로 잘 빗었으며 막 면도를 한 사람처럼 보였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목욕」에서는 스코티가 죽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스코티의 엄마가 병원에만 있다가 쉬기 위해 잠시 집에 와서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먼젓번 남편이 목욕을 하기 위해 집에 들렀을 때 남편이 영문도 모르고 받았던 그 전화 말이다. 스코티 엄마는 아직 전화가 어디서 걸려왔는지 모른다(독자는 빵집 장수라는 것을 알지만).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다. 누군지 모를 그 목소리가 "그래요, 스코티와 관련된 일로 전화드렸습니다."하고 말하는 걸로 끝이 난다. 이렇게 스코티의 죽음을 암시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독자에게는 좀 생뚱맞고 당황스러운 결말이었다. 물론 이는 고든 리시의 (지나친)편집 탓인 것 같지만 말이다.

하여간 『대성당』을 출간하면서 레이먼드 카버는 예전만큼 고든 리시의 손길을 빌리지 않았고 그 덕에 고든 리시가 일찍이 삭제해버렸던 위로를 주는 결말을 다시 가져왔다. 「목욕」에서는 생일 케이크에 대해서 잊어버린 아이의 어머니에게 위협적인 전화를 거는 것으로만 역할을 다 하는 빵집 주인이, 그에게 화가 나서 찾아온 아이의 부모를 맞아서 여태까지 제대로 먹지 못한 부부에게 갓 구운 빵을 건네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결말 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수록된 「청바지 다음에」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고든 리시는 비슷한 편집을 했다(고든 리시는 카버에게서 다른 문학 작품에 대한 언급이나 고급 문화가 묻어나는 부분, '기도 장면'처럼 종교적인 열망을 드러내는 부분을 다 없앴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작품 마지막에 제임스 패커가 병이 악화된 이디스 패커-아내-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을 삭제해버린 듯하다.  

「청바지 다음에」도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었는데,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몇몇 작품들이 너무 생략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처럼 이 작품도 상당 부분을 독자의 짐작으로 채워넣어야 했던 작품이지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궤를 같이 한다고 느꼈던 지점은 이러하다. 두 작품 모두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정말 좋았던 문장, 그러나 왠지 카버스럽지 않아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하도 걱정해서 온몸이 저절로 투명해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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