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을 처음으로 읽을 때가 기억난다. 소설이 윤리책 같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위도식하며(여기서 이미 살짝 질투가 났고) 처자식 있는 유부남이면서 여행에서 만난 게이샤와 헛된 연애를 일삼는 시마무라에 도통 동화되기 힘들어서, 정확히 말하면 반감이 심해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의 훌륭함을 미처 음미할 수 없었다. 과연 나는 어떤 독서를 한 것일까?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 나의 이같은 태도는 '경험적 독자'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경험적 독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 읽는 방식에 관한 법칙을 따로 갖고 있지도 않다. 그는 텍스트를 종종 자신의 감정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는데, 이 감정은 텍스트 밖에서 올 수도 있고 텍스트에 의해서 유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우스운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것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후에 같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웃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장면 하나하나가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우리가 느꼈던 슬픔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경험적 독자로서 당신은 그 영화를 분명 잘못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과 관련된 <잘못>인가? 그것은 영화감독이 염두에 두고 있는 관객들, 즉 자신들이 사적으로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를 웃으면서 따라가는 관객들의 유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관객(혹은 책의 독자)을 나는 모델 독자라고 부른다. 이런 독자는 텍스트가 협력자로서 기대할 뿐만 아니라 창조해 내려고 하는 이상적 유형이다. 한 텍스트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 텍스트 고유의 모델 독자를 즉각 선정할 수 있게 해주는 신호인 셈이고, 이 경우의 모델 독자는 어린아이거나 적어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초월한 어떤 무엇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이다.
나의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가 출판된 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 친구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움베르토에게. 내가 자네에게 우리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슬픈 얘기에 관해서 말해 준 기억은 없네만, 자네는 경솔하게도 그걸 자네 소설에서 써먹었더군.> 사실 내 책에는 <카를로 백부>와 <카테리나 백모>에 관한 몇몇 에피소드가 소개되는데, 이들은 야코포 벨보라는 등장인물의 아저씨와 아주머니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실존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어떤 아저씨와 아주머니(소설에서와는 이름이 다른)의 이야기를 약간 수정하여 소설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나는 <카를로 백부>와 <카테리나 백모>는 그의 친척이 아니라 나의 친척이고, 따라서 그것은 베낀 이야기가 아니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에게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게 사과했다. 그는 나의 소설에 너무도 몰두한 나머지 거기에 나오는 몇몇 사건들이 자신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전시(내가 회상했던 바로 그 시기)에는 비슷한 일들이 여러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그는 숲 속에서 개인적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을 찾은 것이다. 내가 숲을 거닐면서 인생에 관해,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관해 좀 더 알고자 모든 경험과 발견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숲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창조되는 것이니 만큼 내가 숲에서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실들과 감정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최근에 나온 나의 두 저서 『해석의 한계』와 『작가와 텍스트 사이』에서 말했듯이, 나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 텍스트를 백일몽으로 이용하는 것이 전적으로 금지된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흔히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백일몽은 공적인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이야기의 숲에서 마치 그 숲이 우리 자신의 정원인 양 거닐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임의 법칙을 준수해야 하는데, 모델 독자는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전술한 내 친구는 그 법칙을 잊고 작가가 원하는 모델 독자의 기대가 아니라 경험적 독자로서 자기 자신의 기대를 개입시킨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하버드에서 한 문학 강의』, 손유택 옮김, 열린책들, 2009, 21-24쪽
문학이 한 개인에 미치는 '치유' 효과를 언급하며 혹자는 '모델 독자'라는 개념에 반감을 품을지도 모르지만,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움베르토 에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숱하게 <이용하기만 하였던> 텍스트들이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음을 고백한다. '아전인수'격으로 텍스트를 소유하는 것보다얀 모두가 거니는 숲을 훼손하지 않고 향유하는 것이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그리고 문학에게나 정확한 방식이 아닐까.
무엇보다, 어떤 게임을 하면서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서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은,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의 정수를 끝내 깨달을 수 없을 그 사람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움베르토 에코의 견해가 특히 유용할 사람이 있다면 습작생이라고 생각한다. 습작하는 시기에 서로 모여 합평하는 자리가 때때로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서로가 서로의 '경험적 독자'가 위험이 높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일면식을 터서 작가에 대해 어느 정도 선입견이 생겨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일수록 상대가 정한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고 상대가 공들여 마련한 숲을, 세계를 망치지 않고 걷도록 하자. 위기철 작가의 '작가처럼 읽고 독자처럼 쓰라'는 조언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