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편집에 실려 있는 카버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춤 좀 추지 그래?」에 나오는 젊은 커플은 우연히 한 중년 남자의 가라지 세일에 들러서 상품을 흥정하고 술에 취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춘다. 그녀는 춤을 출 때 남자에게 말한다. 아저씬 절박해 보인다고. 그리고 몇 주 후에 애인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 나이 든 남자에게서 얻은 것들이 '쓰레기' 같다고 말한다.
「정자」의 젊은 부부는 한때 '계획'과 '희망'이란 게 있었지만 남편인 '나'는 모텔의 청소부와 바람을 피웠고 그 때문에 '나'의 아내 '홀리'는 '자기 안의 뭔가가 죽어버렸다'고 말하며 술을 마시고 운다. 소설 말미에 홀리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도시 외곽의 좁은 흙길을 달리다가 낡은 집에 이르러서 물을 한 잔 청했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집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부부를 안으로 들여 먹을 것을 주고 집을 구경시켜주었다. 부부는 집 뒤쪽의 정자도 보았다. 칠이 벗겨지고 지금은 돌보지 않는 정자지만 집주인이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서 음악이 연주되었고 사람들은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홀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나이를 먹게 되면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어. 위엄 있게. 그리고 평화롭게.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 집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남편에게 묻는 거다. "이제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어떤 집에 들어가서 물 한 잔을 부탁하는 거."
「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는 어떠한가. 클리프의 아내인 '나'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마당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웃 집과 경계를 이루는 울타리에서 이웃인 샘 로튼을 만난다. 그는 장미 잎사귀를 갉아먹는 민달팽이들을 유인해 잡는 중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친구 사이였지만 술을 마시고 말다툼을 한 뒤로 서로 울타리를 만들고 멀어진 클리프-'나'의 남편-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시다시피 난 포기해버렸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한동안 일이 그렇게 되어갔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 집에는 아직도 울타리가 서 있죠. 하지만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봉지」의 화자인 '나'는 출장 중에 새크라멘토에 들러 아버지를 몇 시간 방문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 이 년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로, 이야기의 요점은 분명하다.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바람을 피웠다는 거다. 아버지는 샐리라는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던 초창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침실 침대 곁에 그-남편-의 사진을 놓아두었어. 처음에는 사진이 거기에 있는 게 신경이 쓰이더구나. 하지만 얼마 후에는 익숙하게 되었지. 사람이 뭔가에 어떤 식으로 익숙해지는지는 잘 알지?"
「목욕」의 스코티 어머니도 그렇다. 스코티는 생일날 차에 치였고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녀는 아들의 병실 창가에서 주차장을 내려보다가 자동차 한 대가 멈추고 긴 외투를 입은 어느 여자가 거기에 타는 것을 본다. 그녀는 자기가 바로 그 여자라고 상상해보려 한다.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의 '나'는 남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다. 남편과 친구들이 낚시를 하러 가서 우연히 소녀의 사체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곧장 신고를 하는 대신 그 사체가 물에 떠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일단 고정을 시킨 다음에 예정대로 그들의 휴일을 보낸다. 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소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마음 먹은 날, '나'는 식사를 하며 남편이 쳐다볼 때마다 아들에게 우유나 토스트 등을 더 먹을 거냐고 묻는다. 아내가 장례식에 다녀온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일을 치르기 위해 아내의 옷을 벗긴다(딴에는 며칠간 이상해 보였던 아내를 되돌리려는 행위다). 아내는 밖에 있는 아들이 오기 전에 서두르라면서 남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니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아버지를 죽인 세번째 이유」에 나오는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였던 더미는 또 어떠한가. '더미'라는 이름처럼-'더미'는 '바보' 또는 '벙어리'라는 뜻이다-부족한 한 사내가 바람난 아내 때문인지 물고기에 미쳐서인지 점점 삶의 수렁으로 빠져들다가 아내를 죽이고 자살한다. 화자인 '나'는 자신의 아버지도 더미의 죽음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더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아버지-는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고.
「심각한 이야기」나 「대중 역학」, 「한 마디 더」에 나오는 부부들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남편은 이미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살거나, 그들에게서 이제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카버의 인물들은 대체로 「정자」의 바람난 남편, 드웨인이 이야기하듯 "이제 모든 것이 옛날과 같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에 대해서 피츠제럴드-생각해보니, 카버도 그렇고 피츠제럴드도 그렇고 그들은 '술'에 관해서 문제가 있었다-의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내리다 the crack-up」에 나오는 말이 그 어느 문장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손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당신이 어떤 측면에서는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그 때가 되고 나서야 당신은 그것을 느끼게 된다."
위의 카버의 인물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대개 이런 설명들을 한다. 사실 설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설명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일이 일어났다거나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든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천 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콩트와 단편을 이렇게 비교했다. 콩트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구축된다고. (과거의 나처럼) 카버의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면 이 질문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카버의 소설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카버를 우리 앞에 좀더 친숙하게 끌어 앉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신형철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며 (나처럼) 무릎을 칠 사람도 많으리라.
"단편 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삶에서 하나의 파열선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뒤집어 말하면 '삶을 가로지르는 아주 미세한 파열선 하나'를 포착하기만 해도 단편소설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불과 50매가 채 안 되는 레이먼드 카버의 「정자」, 황정은의 근작 중에서 특별하게 카버의 어떤 정수를 탁월하게 체현하고 있는 「야행」, 어떤 거대한 사건도 거창한 행위도 없이 진행되는 줌파 라히리의 가족소설 등은 어째서 훌륭한 단편소설이 될 수 있었는가. 우리 삶을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갉아먹는 파열선이 그 소설들에 있기 때문이고, 그를 통해 우리가 이미 늦은 뒤에야 깨달았을 어떤 파열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신형철,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장편소설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단상」(『문학동네』 2010년 봄호) 중에서"
마지막으로 신형철은 그 파열을 감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뛰어난 관찰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사진을 보았을 때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저 '형형하다'라는 옛스런 표현으로는 부족한데, 카버에 대해 "본질적으로 리얼리스트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단순한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뭔가 꿰뚫어보는 듯한 심오한 면이 있다"라고 하루키가 밝힌 바 있듯이, 그의 눈에서 나는 하루키가 말한 바와 비슷한 그 무엇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사진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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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문을 닫고 주스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런 다음 입을 헹구고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거실로 갔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붙였다. 그는 이 모든 게 망가지려면 미치광이 한 명에 횃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청바지 다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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