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랑, 산유화로 지다 -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 가족사
정창권 지음 / 풀빛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조선시대 한 중인 여성의 자살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이 책은, 이미 저자가 밝힌 것처럼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오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완벽한 소설도, 그렇다고 논픽션도 아닌 글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 역시 고르게 한 줄기를 향하고 있지는 않다. 역사의 기록이 대개 중심 계층과 문자 계층의 전유물인 탓에 그 시대의 촌부였던 향랑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 많을 리 만무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은 소재를 글로 엮어내려면 저자의 상상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저자의 전작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전개 구조는 독자를 조금 식상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시대 한 여성의 자살을 통해 당시의 가족관계와 사회상을 엿보겠다는 의도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지만, 또한 많은 부분 미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정 폭력이나 재가에 대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자료적 한계 때문에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그에 대한 저자의 시각 역시 최근의 가족학이나 여성학 연구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많은 부분이 저자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향랑 사건을 전후한 시기의 왕조실록 기사나 오희문의 쇄미록 등의 기록의 행간을 들춰보는 재미도 녹록치 않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어렵고 진부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소설이라는 재구 형식을 차용한 저자의 노력 덕분에 친근하고 흥미롭게 향랑 사건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것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법의 다양성에 대해 한번쯤 골몰하게 만드는 것 역시 이 책의 매력이다. 이미 조선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소재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그리고 여전히 조선시대를 박제된 한 단면으로 인식하는 이들에게는 당대의 또 다른 면모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감히 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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