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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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칼의 노래

 

김훈의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다. 이 소설은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전투들을 이순신 장군의 일인칭 시점으로 끌어가고 있다. 정유년 의금부에서 풀려난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봉직하여 전쟁을 준비하는 사소한 절차들을 사실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병사들의 병참을 해결하는 문제, 진지를 구축하는 문제, 적의 진지를 정탐하고 동채를 살피는 일, 조정과 권력기관과의 미묘한 관계, 명의 수군이 합류했을 때의 마찰들.. 이러한 여러 상황에 상상력이 더해진 역사적 서술은 임진왜란이라는 골격에 살을 붙여서 살아움직이는 사건이 되어 나에게 전해져 온다. 


 

이 책을 두 번 읽게 되면서, 이러한 역사적 서술을 넘어서, 김훈이 이순신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메세지를 강하게 던지고 있다는 점도 읽게 되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영웅적인 인물인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신화 위에 김훈은 실존적 인물 이순신을 잘 덧칠하여서 인간사의 복잡다단함, 무상함, 허망함을 잘 잡아내고 보여주고 있다.  
 

문학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하게 삶의 진실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어떤 평론가는 얘기하였다. 정확하게 삶의 진실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 중 김훈은 “사실에 입각한 서술과 묘사”라는 방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하고 있지만, 이순신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고, 그 주변의 정황과 사건들에 대해 정확히 서술함으로써 이순신과 왜란을 둘러싸고 벌어진 삶의 진실들을 보다 정확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1. 추상적 언어의 허망함 

 

김훈의 글쓰기를 혹자는 사실에 입각하여 담담하게 그려내는, 기자의 윤리가 보이는 유물론적 글쓰기라고도 얘기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도 그러한 그의 글쓰기의 경향이 보여진다. 거대담론과 추상적인 언어를 배제하려고 하고, 그러한 언어가 가지는 무용성에 대해 이순신을 통해 언급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도대체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라는 명제처럼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헛것”이라는 단어로 그 유용성을 심각하게 물어본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쫗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실에 입각해서 판단하기 보다는 명분과 당위를 가져다가 사실을 곡해하는 우를 범한다. 혹은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느낌을 보태다보면, 객관적 사실을 부풀리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이 자신의 척후병들에게 내리는 아래의 명령은 김훈이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와 이 사회에 보내는 메세지인지도 모르겠다.  
 

눈으로 본 것은 모조리 보고하라. 귀로 들은 것도 모조리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별해서 보고하라. 눈으로 보지 않은 것과 귀로 듣지 않은 것은 일언반구도 보고하지 말라.

2. 적과 나
 

예전에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겔리온”에서 주인공 신지는 왜 에반겔리온을 타고 힘겨운 싸움에 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연약한 자신이 왜 사도와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도 이 무의미한 전쟁 앞에서 자신이 왜 왜적과 싸워야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끊임없이 묻지만, 그 답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의 싸움의 동기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서 칼을 겨누는 무사에게서, 전투대열을 갖추고 전진해 오는 왜군의 선박들에게서 비롯되어졌다. 자신이 정의내린 “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적 앞에 마주선 적의 적장으로서, 한편으로는 임금의 의심의 눈초리를 지혜롭게 견디고 무마해야 하는 신하로서, 그리고, 자신의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밥을 들이켜야하는 수군통제사로서의 “나”가 그의 순간순간의 행동들을 결정짓는다.그 뚜렷한 동기없음에서 비롯되는 인생사의 무상함을 이 작품은 절절하게 표현한다. 타자에게 자리매김되어진 자신의 싸움을 견디어내는 일,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이 무상함은 자연 속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무가 지듯이 우리 삶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막을 내린다. 그렇게 막을 내리지만, 여전히 자연사는 지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임진년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은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3. 적의 개별성/집단성 

 

이순신을 가장 괴롭혔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몰려오는 적에 대해서는 적의가 강하게 생기고, 대적관이 분명하여져서 쉽게 대항할 동기가 생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집단적인 적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적은 하나하나 동정이 가고 연민이 가는 존재이다. 자신의 동료들을 일일이 묻으면서 통곡을 하는 포로들과, 적의 전선을 무너뜨렸을 때, 조선말로 살려달라라는 말을 외치며 물에 빠져드는 포로가 되어 왜선의 격군이 된 조선인들 그 개별적인 존재들을 하나하나 대할 때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만큼 참담함을 그는 느꼈다.  

 

지난 번 한나 아렌트가 겪은 아히히만의 재판에 대한 글에도 언급하였듯이, 개별적인 자아가 저지르는 죄악은 이해할 수 있고 동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적의 개별성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면, 적의 집단성에 대한 전의가 약해진다. 적의 개별성과 집단성 그 사이의 균형점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포로들이 흘러내리는 시신의 조각들을 삽으로 떠서 들것에 실었다. 시신을 옮기면서 포로들은 울었다… 나는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적은 전투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이었다. 

[출처] 칼의 노래|작성자 모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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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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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가라앉은 몸을 깨울 겸 소설책 한권을 집어들었다. 김훈의 “현의 노래”.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 남한산성과 함께 김훈 작가의 역사소설 시리즈의 한 권이다. 이 소설은 또 어떻게 대가야의 멸망을 그리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책 페이지들을 넘겼다. 문체는 칼의 노래와 비슷했고, 하는 얘기는 달랐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메세지는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과 비슷해 보였다. 거칠게 단순화해 보자면, 자연사 속에서 피고지는 인생사의 무상함이 첫째이고, 왕조가 가고, 이데올로기가 꺾이고, 시대가 변하여도 민초들의 삶은 질기게 지속된다가 둘째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메세지가 치밀한 각개 사건의 전개나 상황의 묘사없이 떡하니 주어진다면 어떠할까. 아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로 독자는 들어가길 주저할 것 같다. 다른 김훈 선생의 소설처럼 이 소설도 상황상황의 묘사가 생생함을 넘어 가끔은 역겹기까지 하다. 그 중 하나가 가야의 왕이 죽었을 때 그를 모셨던 시녀며 문무 중신들과,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농부, 어부, 목수, 대장장이, 무사, 선비, 젊은 부부와 처녀, 과부까지 오십명의 순장자들이 왕의 관이 들어앉을 석실 주변 구덩이에 함께 묻히는 장면이다.

“순장자들은 무릎으로 기어서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반듯이 누웠다. 젖먹이가 딸린 농사꾼 내외는 마주 보며 모로 누웠다. 젖먹이는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군사들이 구덩이 안으로 밥그릇을 던졌다… 구덩이마다 지키고 섰던 군사들이 돌두껑을 덮었다."

이 소설이 중요하게 다루는 두 가지 소재는 쇠와 현이다. 그리고, 가야의 쇠와 현을 담당하는 인물은 야로와 우륵이다. 가야의 두 대표적인 기술인은 아쉽게도 가야에 대한 충심을 담지 않는다. 쇠에는 쇠의 흐름이 있다고 얘기하는 야로는 가야에 병장기를 제공하는 한편 같은 병장기를 신라에 몰래 가져다 주며 자신의 살길을 도모한다. 우륵도 가야의 멸망이 가까이 옴을 느끼자 가야를 떠나 신라로 향한다. 그는 제자 니문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니문아 언젠가는 여기를 버려야 할 것이다.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우륵은 신라의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신라 진흥왕 앞에서 물혜, 달기, 다로, 가라, 기물, 알터, 바람터, 노루목 등 가야 여러 고을을 다니며 모아온 가야의 소리를 12줄의 현으로 연주하고, 펼쳐진 소매가 뻗어나가 허공을 가르는 춤사위를 선사한다. 그리고 우륵은 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여러 말들을 제자와 신라의 음악관원에게 얘기한다.
“악기란 아수라의 것이다. 금을 신라로 보내라. 거기가 아마도 금의 자리이다."
“소리는 가지런한 것이 아니다. 소리는 살아서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손가락으로 열두 줄을 울려 새로운 시간을 맞는 것이다. "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너희들의 나라가 삼한을 다 부수어서 차지한다 해도 그 열두 줄의 울림을 모두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늘 새롭고 낯설지 않겠느냐"

소설을 읽고 나서 몇 가지 생각이 든다. 순장의 장면을 보면서, 신라와 가야의 전투장면을 보면서, 이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참 의미없이 많이 죽어갔던 것 같다. 국사 시간에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수많은 전투들을 연대 순으로 외웠지만, 이 소설은 그 연대 사이에서 쇠로 만든 병장기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의미없는 목숨들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왕이 죽고 나면 수많은 생사람을 생매장시켰다는 이전 시대의 한 풍습도 근대 이후 생긴 인권이란 개념을 고마운 마음으로 음미하게 되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작품에서는 서날생이라는 대장장이를 등장시키고, 이 인물과 그의 가족들이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큰 사건을 거치고 나서도 변함없이 살아감을 묘사한다. 이 현의 노래에서도 가야가 멸망하지만, 그 멸망에 몸을 맡기지 않는 주인공 우륵의 모습을 통하여, 일명 보수주의자 김훈 선생은 이념 과잉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는 것 같다. 칼의 노래에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진다고 해서 애도하는 것이 아니듯이 인간의 죽음도 자연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아닌가란 질문을 던지듯이 말이다. 과연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렇게 무의미한 것인가, 인간의 삶과 죽음도 자연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체념이 결국 불편한 답인 것일까, 내 몸을 의탁하고 살아가고 있는 국가의 존망 혹은 이데올로기의 존폐가 그렇게 하찮은 것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어느 정도의 반감도 일어나긴 했다.

세 권의 역사소설은 아마도 한국 소설사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다. 김훈 작가만이 선보일 수 있는 문체와 작품을 통해 얘기하는 주제 의식이 참 독특하기도 하거니와 끊임없는 질문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 같다. 이 세 권을 나란히 책장에 진열해 놓는다. 60대에 쓰여진 이 작품들이 내가 김훈 작가의 나이가 되어 이 세 권을 다시 꺼내 읽어보면 또 다르게 읽힐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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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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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할 때쯤 친구가 준 약도에는 구로공단 전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다섯 정거장 후에 내리라고 적혀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구로공단에 위치한 한 공간. 그 공간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구로공단이라는 지역과 사람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공간을 찾아간 때가 9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 땐 80년대 노동운동의 열풍이 사그러지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그래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격정의 흔적만을 보고, 냄새만을 맡을 수 있었다. 그 때 보았던 맡았던 희미한 흔적과 냄새를 신경숙의 외딴방이란 소설은 떠올리게 한다.


신경숙의 외딴방이란 소설의 배경은 80년대 전후의 구로공단이다. 노동조합이 활성화되고,YH 사건이 일어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방에서 올라와 구로공단을 메웠을 때, 그 한 쪽방을 차지하고선 낮에는 전기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여상을 다니던 한 여성노동자의 자전적 얘기를 이 소설은 담고 있다. 

혁명의 열기가 가득했던 80년대 시절, 현장에서 나오는 소리는 힘있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또한 머리숙이게끔 하는 처연함도 함께 전했을 듯 싶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 나오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라는 표현은 그 당시 얼마나 많은 대학생들의 가슴을 쳤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하지만, 외딴방이라는 소설은 첨예한 80년대 전후의 구로공단이라는 배경 하에서, 노동, 민중, 노조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이념적이고 정치적 성격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국의 격정적인 현대사라는 배경에서 학교에 다니고 싶어 노조를 탈퇴한 한 평범한 여공의 그닥 드라마틱하지 않은 생활들을 감수성짙은 문체로 표현한다. 소설에서도 쿠데타, 광주사태 등에 대한 작가의 책임감에 대한 셋째 오빠의 지적에 대해 자전적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몰라, 오빠. 나는 그런 것들보다 그 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서나 자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 오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 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었어.”

하지만, 그런 여공 생활에 대한 평범해 보이는 서술이 아마도 그 때껏 다른 작품들이 잘 전달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지식인으로서 민중이라는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시선이 도저히 실어나를 수 없는, 옆에서 바라보는 시선만이 가능케 한 사실주의가 이 외딴방이라는 소설을 특별하게 자리매김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소설의 형식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대면하는 평행구조로 진행된다. 한 친구가 전화로 한 다음 얘기가 작가로 하여금 대면하기 힘든 과거의 나를 끄집어 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너는 우리들 얘기는 쓰지 않더구나. 네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니. 넌 우리들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더라”

그 친구의 한 마디로 힘들고 불꽃같았던 시절의 "나를 찾는 고심어린 과정"은 또 한 번 시대 속에서 방황하며 삶을 힘겹게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을까? 30대 초반에 쓰여진 소설에서 보이는 아쉬운 부분들은, 그 힘겨웠던 삶의 무게와 솔직하게 자신의 얘기를 펼쳐 보이는 작가의 용기에 비하면 작게 보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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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38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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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뉴욕이라는 도시를 친구와 여행한 적이 있다. 센트럴 파크, 브룩클린 다리, 월스트리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타임스퀘어,유엔본부, 콜럼비아 대학교 등 지하철을 타고 발품을 팔아 뉴욕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기본적으로 차가 없으면 이동하기 힘든데, 이 뉴욕이라는 도시는 차가 없이 걷는 사람들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보가 편한 곳이었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이라는 소설을 잡았을 때, 과연 이 소설은 뉴욕을 어떻게 그릴까라는 질문부터 들었다. 점점 소설을 읽어내려가면서 중심 모티프가 되는 관찰하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를 배치하기에 좋은 배경이 뉴욕의 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은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있는 방> 세 중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유리의 도시>에서는 글을 쓰며 살아가는 작가 퀸이 탐정을 의뢰하는 전화를 받은 후, 추리소설 애독가인 퀸은 탐정을 사칭하여 의뢰자 스틸먼의 아버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유령들>에서도 화이트라는 의뢰자가 블루라는 사설탐정에게 블랙이라는 사람을 감시하라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잠겨있는 방>에서는 절친한 친구 ‘팬쇼’가 사라지면서 팬쇼의 부인이 주인공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작가인 팬쇼의 작품들을 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주인공은 이 작품들을 출판하게 되고, 팬쇼의 부인과도 결혼도 하게 된다. 그리고, 팬쇼의 전기를 쓰는 일을 맡게 되면서, 팬쇼의 자취를 지난하게 추적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소설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관찰 혹은 감시하는 자가 이끌어간다. 퀸은 스틸먼의 아버지를, 블루는 블랙을, ‘나’라는 주인공은 팬쇼를 감시하고 추적한다. 그리고, 이 관찰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자신들이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변해간다는 것이다. 관찰해야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주체는 점점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변해가고 이젠 그 객관성을 잃어버림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는 위기를 맞게 된다.

기본적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지만, 이 소설들은 쫓는 자에 주목하며, 쫓는 자의 심리상태를 면밀히 추적한다. 쫓는 자는 쫓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현실과 환상의 뒤범벅을 경험한다. 이런 자아에 대한 물음들을 뉴욕이라는 배경에서 세련되게 그린 멋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가 던지는 물음이 그닥 유쾌하지도, 그 답이 명징하지도 않기에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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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 -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강신익 외 18인 지음 / 창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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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 -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이란 책을 읽었다. 이런 책을 읽을 때의 하나의 자세는 30퍼센트 정도만 이해하자라는 마음으로 읽으면 맘이 편해진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과학철학의 역사적 전개와 현재 논쟁의 관점 그리고, 확장된 응용분야의 관점을 다루고 있다. 대략 20개가 넘는 짧은 논문 형식의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지만, 통일성이 뛰어나 보이고, 흐름이 매끄럽다. 만약 과학철학에 대한 본격적 공부를 할 생각이 있으면 이 책을 한 번 읽고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혹 나중에 과학철학에 대한 책을 읽을 때 이 책을 다시 들춰보면 좋을 듯 하다.

철학도 어렵고 과학도 어려운데 그 둘의 결합은 더 어려웠다. 그래서 이해가 부족하니 좋은 서평은 힘들 것 같고, 다음 세 가지 과학철학의 흐름만 정리해 보기로 하자.

1. 분석적 과학철학
분석적 과학철학은 20세기초 빈 학파에 의해 제창된 논리실증주의에서 출발했다. 논리실증주의는 세 가지 이론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는 독일관념론이 드러낸 사변적 성격에서 벗어나 경험에 기초한 반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닌다. 둘째는 새로운 자연과학을 가능하게 만든 자연세계에 관한 경험과 이 구체적 경험을 기술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체계인 논리학의 결합인 논리경험주의이다. 세번째는 검증과 통일과학이라는 데 무슨 말인지 잘 안 잡혀서 요약할 수가 없다. 

2. 합리주의 과학철학 
논리실증주의가 엄밀한 과학성의 기준을 제시했지만, 포퍼의 반증주의는 논리실증주의의 이론적 난점을 극복하고 반귀납주의를 표방하면서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새로운 입장을 개진한다. 포퍼는 전통적 귀납주의를 부정하고 추측과 반박을 과학의 방법론으로 내세운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하고 그 해결안을 고수하려 하기보다는 다시 최선을 다해 그것을 뒤집어 엎기 위해 애써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포퍼는 과학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이 아닌 이론들(점성술, 주역, 정신분석)은 반증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과학과 구별되고 이 반증가능성이 과학과 비과학을 구획한다고 주장하였다. 

3. 역사주의 과학철학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통해 위의 논리실증주의와 반증주의 과학관을 비판하면서 과학을 인간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과학활동의 역동적 측면을 과학사 연구를 통해 드러냈다. 이렇게 과학사 연구에서 주어지는 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과학의 법칙과 이론을 평가하는 입장을 역사주의 과학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과학의 발전과정은 연대기적으로 합리적 지식의 축적과 논증을 통해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정상과학이 지배하다가 변칙사례를 맞닥뜨리게 될 때 기존의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게 되고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기되고 또 다른 과학이론의 정상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과정과 좀 유사해 보이는데, 이건 내 사견이고..)

이 세 가지 과학철학의 흐름은 중요한 기본 골격에 불과하고, 그 위에 다른 여러 과학철학자들의 주장과 입장 그리고 쟁점들을 이 책은 다룬다. 예를 들면, 과학의 역사성과 사회성 논쟁이라든지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의 철학에 대한 논쟁이라든지 그리고, 기술철학, 생물철학, 의철학, 심리철학, 환경철학등 다양한 전문분야의 철학분야도 소개하고 있다.

예전 전자공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김유신 교수님께서 포퍼의 “추측과 논박”을 꼼꼼이 읽어보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 책을 보고나서 대강 이해가 된다. 뭐니뭐니해도 20세기 과학철학의 가장 큰 쟁점은 포퍼와 쿤의 대립이었던 것 같고 그 흐름이 지금도 어느 정도는 지속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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