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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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칼의 노래

 

김훈의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다. 이 소설은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전투들을 이순신 장군의 일인칭 시점으로 끌어가고 있다. 정유년 의금부에서 풀려난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봉직하여 전쟁을 준비하는 사소한 절차들을 사실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병사들의 병참을 해결하는 문제, 진지를 구축하는 문제, 적의 진지를 정탐하고 동채를 살피는 일, 조정과 권력기관과의 미묘한 관계, 명의 수군이 합류했을 때의 마찰들.. 이러한 여러 상황에 상상력이 더해진 역사적 서술은 임진왜란이라는 골격에 살을 붙여서 살아움직이는 사건이 되어 나에게 전해져 온다. 


 

이 책을 두 번 읽게 되면서, 이러한 역사적 서술을 넘어서, 김훈이 이순신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메세지를 강하게 던지고 있다는 점도 읽게 되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영웅적인 인물인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신화 위에 김훈은 실존적 인물 이순신을 잘 덧칠하여서 인간사의 복잡다단함, 무상함, 허망함을 잘 잡아내고 보여주고 있다.  
 

문학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하게 삶의 진실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어떤 평론가는 얘기하였다. 정확하게 삶의 진실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 중 김훈은 “사실에 입각한 서술과 묘사”라는 방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하고 있지만, 이순신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고, 그 주변의 정황과 사건들에 대해 정확히 서술함으로써 이순신과 왜란을 둘러싸고 벌어진 삶의 진실들을 보다 정확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1. 추상적 언어의 허망함 

 

김훈의 글쓰기를 혹자는 사실에 입각하여 담담하게 그려내는, 기자의 윤리가 보이는 유물론적 글쓰기라고도 얘기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도 그러한 그의 글쓰기의 경향이 보여진다. 거대담론과 추상적인 언어를 배제하려고 하고, 그러한 언어가 가지는 무용성에 대해 이순신을 통해 언급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도대체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라는 명제처럼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헛것”이라는 단어로 그 유용성을 심각하게 물어본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쫗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실에 입각해서 판단하기 보다는 명분과 당위를 가져다가 사실을 곡해하는 우를 범한다. 혹은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느낌을 보태다보면, 객관적 사실을 부풀리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이 자신의 척후병들에게 내리는 아래의 명령은 김훈이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와 이 사회에 보내는 메세지인지도 모르겠다.  
 

눈으로 본 것은 모조리 보고하라. 귀로 들은 것도 모조리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별해서 보고하라. 눈으로 보지 않은 것과 귀로 듣지 않은 것은 일언반구도 보고하지 말라.

2. 적과 나
 

예전에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겔리온”에서 주인공 신지는 왜 에반겔리온을 타고 힘겨운 싸움에 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연약한 자신이 왜 사도와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도 이 무의미한 전쟁 앞에서 자신이 왜 왜적과 싸워야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끊임없이 묻지만, 그 답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의 싸움의 동기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서 칼을 겨누는 무사에게서, 전투대열을 갖추고 전진해 오는 왜군의 선박들에게서 비롯되어졌다. 자신이 정의내린 “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적 앞에 마주선 적의 적장으로서, 한편으로는 임금의 의심의 눈초리를 지혜롭게 견디고 무마해야 하는 신하로서, 그리고, 자신의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밥을 들이켜야하는 수군통제사로서의 “나”가 그의 순간순간의 행동들을 결정짓는다.그 뚜렷한 동기없음에서 비롯되는 인생사의 무상함을 이 작품은 절절하게 표현한다. 타자에게 자리매김되어진 자신의 싸움을 견디어내는 일,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이 무상함은 자연 속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무가 지듯이 우리 삶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막을 내린다. 그렇게 막을 내리지만, 여전히 자연사는 지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임진년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은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3. 적의 개별성/집단성 

 

이순신을 가장 괴롭혔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몰려오는 적에 대해서는 적의가 강하게 생기고, 대적관이 분명하여져서 쉽게 대항할 동기가 생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집단적인 적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적은 하나하나 동정이 가고 연민이 가는 존재이다. 자신의 동료들을 일일이 묻으면서 통곡을 하는 포로들과, 적의 전선을 무너뜨렸을 때, 조선말로 살려달라라는 말을 외치며 물에 빠져드는 포로가 되어 왜선의 격군이 된 조선인들 그 개별적인 존재들을 하나하나 대할 때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만큼 참담함을 그는 느꼈다.  

 

지난 번 한나 아렌트가 겪은 아히히만의 재판에 대한 글에도 언급하였듯이, 개별적인 자아가 저지르는 죄악은 이해할 수 있고 동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적의 개별성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면, 적의 집단성에 대한 전의가 약해진다. 적의 개별성과 집단성 그 사이의 균형점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포로들이 흘러내리는 시신의 조각들을 삽으로 떠서 들것에 실었다. 시신을 옮기면서 포로들은 울었다… 나는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적은 전투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이었다. 

[출처] 칼의 노래|작성자 모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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