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빅퀘스천 - 우리 시대의 31가지 위대한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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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와 40대에는 커리어를 계발하고 열심히 돈을 벌 때이고, 가정을 꾸리고 애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기에 큼지막한 질문을 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어떻게 오래 회사에 남아있기 위해 처신해야 할지, 주식투자를 어떻게 잘 해서 종자돈을 마련할지, 언제 아파트를 사고 팔아서 부동산 투자로 인한 이익을 만들 수 있을지, 아이들은 어느 학원에 보내고 어떤 교육 전략으로 명문대에 보낼 수 있을지, 부모님의 노후는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 지 등등 실생활과 관련된 실용적인 질문들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한 번 푹신한 의자에 편안히 걸치고 앉아서, 그동안 미뤄왔던 큰 질문들을 던지고 싶을 때가 왔으면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예를 들면, 영혼, 운명, 죽음, 소유란 무엇이고, 우린 왜 사랑을 하고 외로움을 느끼는지, 왜 인간은 유명해지고 싶어지고, 먼 곳을 그리워하는지 그런 질문 말이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을 다룬다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철학자, 사상가 그리고 과학자들이 벌써 이런 문제에 대해 수없이 많은 자신들의 답을 내어 놓았기에, 그런 선대의 지식의 자취를 더듬어보지 않고, 개인의 생각을 불쑥 던지는 것은 위험하기 쉽상이다.   

현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쓴 빅퀘스천이라는 책은 용감하게도 이런 질문들에 대해 성큼 다가선다.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나오고, 저자가 뇌과학자라고 해서 과학책이려니 기대하고 책을 펼쳤는데, 기대와는 완전 딴판인 책이었다. 저자에 대해 모르고,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저자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연구하거나 혹은 로마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와 고대 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 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역사에 대한 예를 풍부하게 펼치고, 거기에 자신의 전공인 과학을 더함으로써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쉬운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세련되게 이 책은 이끌어간다. 

특히 와 닿았던 대목을 하나 옮겨봄으로 책의 맛을 전해보면,,

“최초의 인간에서 인간에게 우주는 카오스였다. 원인과 이유가 없는 ‘참을 수 없는 무질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획기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석기시대의 아인슈타인이라고 할까? 그의 뇌 신경회로망 사이로 유혹 하나가 바이러스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만약 나, 너, 우리들 외에 다른 존재가 존재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로 그들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었던 자연 현상 하나하나에 보이지는 않지만 익숙한 존재들을 연결시키는 순간 무질서의 카오스는 질서의 코스모스로 변한다. 천둥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노여움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양자우주론과 진화론이 만물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해도, 인간에게는 커다란 질문 하나가 남아 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코스모스식 질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내면의 카오스에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듯 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저자는 과연 이 모든 지식들을 책을 통해 다 섭렵했을까? 아님 한 주제에 대해 위키페디아나 다른 백과사전을 통해 자료를 모은 후 조합을 한 것일까? 전자라면 뇌과학을 전공한 과학자치고는 다방면의 책을 너무나 많이 읽은 것이고, 후자라고 하더라도 지성적 냄새가 가득하게 여러 다른 역사, 신화, 과학적 자료를 한 이야기로 묶을 수 있는 통찰력이 돋보였음을 인정하고 싶다. 그리고 11세부터 독일에서 수학을 하였는데, 그런 교육적 배경을 고려해서 글이 참 수려하다.

물론 이런 거창한 질문들에 무릎을 탁 치는 답을 주는 건 없다. 하지만, 뇌과학을 연구하는 한 과학자가 서양문명을 배경으로 한 생각의 한자락은 분명 내가 이전에 해 보았던 비슷한 질문들을 상기시키게 한다. 그리고 김대식 교수 개인이 뚜렷이 보이는 에세이집은 나를 뚜렷이 보일 수 있는 에세이를 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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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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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를 방문했을 때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렀다가 이 책을 우연히 집어들었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이라곤 대학 시절 <상실의 시대>만 읽은터라 하루끼의 소설이 궁금하기도 했고, 또 하루끼의 간만의 신작 장편소설이란 풍문을 들은터라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그리고 이틀만에 읽어버렸다. 마치 재미있는 드라마를 한 번 시작하게 되면 끝을 보기 전엔 자리를 뜰 수 없듯이, 이 소설을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읽지 않으면 안절부절하게 되었고, 만사 제쳐놓고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잘 읽히는 책은 간만인 듯 하다.

그리고 읽고 나니, 소설의 이 구절을 통하여 내 소감을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아버지는 그 이상한 이야기를 이상한 이야기 그대로 그냥 받아들였을 거예요. 뱀이 입에 문 먹이를 씹지도 않고 통째로 천천히 삼킨 다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소화시키듯이"
이 소설을 읽은 느낌도 그랬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여러 사건과 이야기들을 조각조각 분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뭔가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반응했던 듯 하다.

나는 이 소설을 기본적으로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사람들을 가장 기쁘게 하고, 실망시키고, 힘들게 하는 것이 뭘까? 바로 사람 사이의 관계일거다. 직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이 힘듦은 참을 수 있지만, 사람에게 지치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직장인들의 상투적인 푸념도 바로 관계에서 비롯된다.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도 사람과의 관계이다. 특히 자신의 생의 짜투리 시간까지 가득 채워왔던 관계들과의 단절은 어떨까? 오랫동안 사귀었던 연인과 헤어진 이들은 절망하고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수척하게 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헤어짐과 단절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문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나라는 인간은 그렇게도 나쁜 사람이었던가?

주인공인 다자키 쓰쿠루는 나고야에서 고등학교 때 봉사활동을 같이 하면서 친해진 네 명의 친구들과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 서로 이성적인 관심은 배제한 체로 친밀함을 유지하고, 그 그룹에 속한 일체감을 서로 느꼈다. 대학을 가면서 쓰쿠루는 도쿄로 역 건물에 대한 공학을 전공하기 위해 도쿄로 가게 되고, 다른 친구들은 나고야에 남게 되었다. 이 지리적 거리감이 있음에도 정오각형 같은 친구 그룹은 잘 유지되다고 대학 2학년 때인 어느날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연락을 더 이상 하지 말 것을 통보받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한 쓰쿠루는 모든 일상적인 활동을 그만두고, 먹지도 않고 페인처럼 지내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가 겨우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체형과 삶에 대한 시선을 지닌채로... 이 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단절의 경험은 36세가 된 현재까지 그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새롭게 만나게 된 사라와의 관계에서도 뭔가 모르게 껄끄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런 둘 사이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쓰쿠루의 오랜 친구로부터의 단절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눈치챈 사라는 쓰쿠루가 옛날 친구들을 다시 만나도록 권유하고, 쓰쿠루는 16년만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렇게 친구들을 만나러 떠나는 행위를 작가는 "순례"라고 표현한 듯 싶다.

이래저래 하루키에 대해 들은 얘기대로 이 소설은 스타일리쉬하다. 음악 특히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곡이 주요 소재가 되고, 수영, 도예, 기차역, 태크호이어 시계, 커피 등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소설의 멋을 잔뜩 더해준다. 그리고, 주인공 쓰쿠루와 그의 친구들도 중상류층의 자제들이고, 부르주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회나 국가와 같은 큰 공동체와 관계된 비판의식도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런 거대서사적인 윤리의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는 강한 윤리의식이 보인다. 바로 관계에 대한 윤리이다. 우리의 현재도 과거의 여러 관계의 형성 속에서 영향받아왔고 규정되어왔다. 과거를 찾는 여행은 현재의 나를 새롭게 돌아보는 순례가 될 것 같다. 그리고, 과거 미성숙했을 때 실수했던 여러 관계들을 관조하고 그 관계들 속에서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하는 과정은 현재의 관계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거쳐 갈 수 있는 이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는 "역"과 같은 존재로 성장시켜 줄 듯 하다. 가끔은 내 잘못이 아님에도 일그러진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그렇게 나아가다가 가끔씩 또 뒤를 돌아보아야 함은 아닐지 이 소설은 내게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아주 모호한 형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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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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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난 왜 소설을 읽을까?  이번에 읽은 새의 선물의 작가 후기에서 은희경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그리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세상은 어릴적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심하게 꼬여있고, 우리를 한정짓는 육체적 그리고 물리적 한계 위에 사회적 한계들이 놓여져 있고, 그 사회적 한계 위에 관계적 한계가 자리매김하며 그 위에 또 인간적 한계가 우리를 옥죄고 있다. 그래서 난 이러한 삶의 형태를 복잡다단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길 좋아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렇게 세상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만의 독특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해 가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성숙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2] 냉소 - 세상을 보는 한 코드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라는 책을 미국 도서관에서 한국책을 떨이로 팔 때 구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리고, 아주 흥미있게 이 소설을 후딱 읽었다.  

 

소설 이야기의 주인공은 12살 진희라는 아이이다. 이 아이는 1960~70년대 정도 한국의 읍에 가까운 작은 도시에 살아가며 그리 심각하지 않은 그러면서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놓여진 비극의 상황이 있다면, 어머니는 목을 매어 자살했고, 아버지는 함께 살지 않고 외할머니와 이모가 키우고 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상처는 그녀에게 "자기를 숨기는 방법"과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에게서 분리하는 법"을 터득하게 하였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3] 비루한 세상을 살아내기

 

12살의 진희는 어떤 재미와 흥미도 없는 유년시절을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관찰함으로써 살아낸다. 그리고, 할머니와 살아감으로써 받게되는 주변 사람들의 동정심과 상처주는 관심 혹은 비난들을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로 분리함으로써 냉소하게 된다.

 

어쩌면 나를 비롯한 많은 인간 군상들은 어떻게 보면 의미없고 심심한 하루하루를 견디어 낸다. 그리고 가끔씩은 모욕도 당하고, 삶의 비루함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육체적 노화로 인해 힘없는 더욱 비참한 삶의 모습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특별히 내일이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견디어 가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루한 그리고 비루한 현실에 나 자신을 일치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비루하고 초라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나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면 어떻게 될까? 상사에게 듣는 모욕, 성적인 모욕, 가족간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을 권유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잔혹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러한 세상을 살아내는 한 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냉소일 수도 있다. '보여지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 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힘겹게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희일비에 내 자신을 모두 건다면 그 삶의 무게를 이겨내기 힘들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할 때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에게서 분리하는 작업을 통해서 그냥 이 힘겨운 삶을 응시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고, 그 가운데서 상처입은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가 위로하고 화해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이 아닐까...

 

[4] 삶을 응시하기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소설에서 60대년대가 지나가고 70년대가 다가오는 라디오의 방송이 흘러 나올 때 "70년대에 대해 굳이 기대나 희망을 따로 품어야 할 필요는 느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혁명에 대한 열정은 사회에 대한 혐오로,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과 행동에 대한 지나친 가치부여는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안내되어진다. 너무 큰 기대와 희망을 품지 말고 나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며 냉소적으로 나를 그리고 세상을 응시하는 것도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일 것이다.

 

나 자신도 글을 쓰는 작업을 할 때에는 철저히 '바라보는 나'의 입장에 서서 '보여지는 나'를 응시하고, 부족하고 못난 그 나를 이해하려고 그리고 위로하려고 한다. 그리고, 화해한다. 그렇게 힘을 얻은 '보여지는 나'는 다시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을 그 특유의 못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는 흐뭇하게 바라다 본다.

 

삶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않기...

사람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않기..

내 행동에 대해 너무 의미부여하지 않기..

내 자신을 너무 미화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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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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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쿤데라라는 대가는 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따라오라고 재촉한다. 그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길은 낯설기만 하다. 길 주변의 풍경은 희미하여 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단지 손을 잡은 대가를 믿기에 지루한 길을 무작정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고개를 넘으면 대가가 힘들게 만든 커다란 성이 보여진다. 그 성을 들어가면 여러 방들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다. 그 문 하나하나를 밀치고 들어갈 때마다, 각각의 방은 인간의 각각 다른 다양한 냄새를 전해준다. 그 방들은 각각 다른 형태의 장식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대가가 설계한 그 성의 공간 하나하나를 느릿한 걸음으로 한 번씩 거닌다. 공간을 설계한 대가의 숨결이며, 고통이며, 통찰력이 그대로 저며온다. 어느새 성을 다 둘러보고는 성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전율에 흘러내린 식은 땀을 닦는다.

2.
시인 황지우는 그의 산문집에서 문학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역사는 흘러가고 가끔은 역사 속의 이데올로기며 거대서사는 개인을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몰아감의 강제에 처한 개개인의 상처는 역사라는 큰 물줄기에서 묻히기 일쑤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매체는 그 상처를 잊지 않고, 어루만진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소설도 체코 공산주의하에서의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3.
나에게 어떤 소설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역사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라고 답한다. 광장의 이명훈은 두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전쟁이라는 현장에서 한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구원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 농담의 주인공 루드빅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다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공산주의의 이념에서 끔찍한 폭력들을 경험하고, 그 폭력에 대한 복수를 꿈꾸지만, 그 복수도 시간이라는 흐름 하에서 농담처럼 흐지부지하게 된다.

4.
소설의 주인공 루드빅은 대학교에서 스탈린주의자인 여자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엽서를 건넸다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서 군대에 강제 징집된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Optimism is the opium of the people! A healthy atmosphere stinks of stupidity! Long live Trotsky!"

정치범으로 몰린 그는 탄광에서 일하는 강제노역을 하게 되고, 그 절망의 끝에서 루치에라는 공장노동자를 만난다.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상황에서 만난 한 여인과의 만남은 그에겐 구원이었고 생의 전부였고, 군대에서 아주 가끔씩 주어진 외출에서 그녀와의 짧은 만남은 구렁텅이에서 생을 유지하게 하는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20대 혈기왕성한 청년의 육체에 대한 욕망과 어린시절 성적 학대에 의한 루시에의 육체적 상처로 그들의 만남은 엇갈리고 만다. 이후의 여러 얘기들도 루드빅이 정치재판에서 심문한 인물에 대한 복수와 루치에와의 사랑이 주요 모티프로 이어져간다.

5.
작가는 루드빅이라는 한 인간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기 위해, 시점을 계속 변화시킨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도 하고,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남을 통해 본 루드빅의 이야기도 보여준다. 그런 각도로 본 주인공은 보통 작가의 첫소설이 자전적인 이야기에 토대해 있음을 감안하면 쿤데라 자신을 닮아있기도 하지만, 독자인 나를 닮았다고도 느꼈다. 아니 인간에 대한 풍부한 깊이있는 이해가 루드빅이라는 인물에 담겼기에 어쩌면 모두를 다 닮아있을 수도 있겠다. 소설 중심부의 사건들이 흥미로워 보다 훌륭한 결말을 기대했는데, 마지막 부가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거기엔 내 기대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겠지란 미련을 주며 언젠가 다시 책을 잡게끔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을 남겨두게 한다.

6.
농담(Joke)이란 농담이 가지는 뜻을 잘 아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중 찰나의 타이밍에만 동작하는 말의 기교이다. 약간만 경계를 넘어가면 농담이 가지는 의미는 희석되어버리고 가끔은 오해되기도 한다.

루드빅이라는 인간은 소설에서 몇 번의 농담을 던졌다. 그 농담은 그 의미대로 와 닿지 못했고, 그가 원래 의미했던 바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희석되고,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래 가끔씩은 젊은 시절 너무 진지하게 붙들고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게 많다. 그렇게 역사는 이성적이지 않게 농담처럼 장난을 치기도 한다.

"만일 역사가 자기 고유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완전히 무화시켜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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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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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대한 김훈의 인터뷰부터 먼저 들어보자.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1/h2007110118295284290.htm

 

 미니인터뷰



“별의별 인간에 개별적 정당성을 주려 했다”

 

-역사소설을 천착하는 이유는.

"내 소설은 역사 그 자체가 아닌,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여기에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계가 세워졌다는 내 입장을 투영한다. 인류사의 거듭된 약육강식이 그 증거다. 앞으론 역사 아닌 당대의 일을 통해 표현하려 한다."

 

-<남한산성> 쓸 때 사료는 어떻게 모았나.

"성 안에서도 사관이 실록을 썼고, 일부 지식인들이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자료는 유언비어, 민담처럼 삶의 구체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걸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약간의 자료에 상상을 가해서 복원했다."

 

-병자호란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내 포인트가 아니었다. 47일간의 무립고원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별의별 인간이 다 있게 마련이고, 그들에게 개별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남한산성을 윤리가 무화된 실존 공간으로 그린 건가.

"아니다. 거기엔 삶의 지향성이 있었다. 인조가 그렇다. 삶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인조는 치욕과 굴종을 감당하면서도 살아냈다. 그것이 윤리라고 생각한다."

 

-비루한 현실을 그리기엔 너무 미문(美文)이라는 지적도 있다.

"문장의 뼈다귀인 주어, 동사 갖고만 썼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스트레이트 문장이 제일 좋다. 이뤄내기 힘든 허영일지 몰라도 앞으로도 스트레이트 문장으로 소설을 쓸 거다."

 

 

청이 명을 꺾고 대륙에서 세력을 잡은 다음 조선이 명 대신 청을 섬길 것을 청나라는 요구한다.

그리고 그 요구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조선으로 규모가 큰 군대를 출병한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여전히 조선의 조정은 갈팡질팡하고 청의 빠른 진격으로 인해  강화도로 조정을 옮길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남한산성으로 왕과 대신들 그리고 왕실을 지키는 사람들이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는 데서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김훈이 묘사했듯이 남한산성이라는 곳은 들어가서 방어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어렵고 외부에서 지원세력을 불러오기도 힘든 성이다. 그래서 충분한 군량미를 보유하고 있는 적이 밖에서 포위한 채로 장기간으로 가면 갈수록 성 안의 사람들은 말라죽을 수 밖에 없는 공간이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성 안의 각각의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려는 것이 이 소설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주장에는 다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고, 그 어느 쪽도 함부로 내칠 수 없는 임금의 입장도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결정하는 선택이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예전 사르트르가 쓴 책에서 이런 실존의 문제에 대해 예로 든 다음과 같은 상황이 연상되었다. 어느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선택을 그는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병약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돌보아야 했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 같고, 전쟁에 참전하면, 병약한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고,

이런 실존의 상황 앞에서 그의 선택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가?

 

남한산성에 있었던 인조라는 임금과 그 무리들도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고, 우리 현대인들도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해있다. 내가 가진 대의를 따라 살려니 딸려 있는 처자가 불쌍하고 생존이 걱정되고, 또 생존의 필요만 급급히 채우면서 살려니, 인생이 허무해지고... 거기에 대한 해답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그냥 인간이 맞부딪혀야 하는 생은 그런게 아닐까?

 

그런 가운데서도 위의 인터뷰에서 보이듯이 삶을 연장한다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가치임을 김훈은 보여준다. 인조가 그렇게 굴욕을 당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당한 것일뿐 그 이후 민중들의 삶은 놀랄만큼 변화가 없는 상황을 보는 것이 참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러한 실존적 한계의 상황에서 조정의 대신, 사대부들과 대비하여 다른 한 인물을 김훈은 제시하고 있다. 바로 서날생라는 대장장이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삶과 죽음이니, 명분과 대의니 하는 무거운 주제들이 비켜나가고 모든 문제들이 그의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풀려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김훈이 늘어놓은 역사의 질곡을 뚫고 근근히 버텨오는 민중의 삶의 풍경은 병자호란이라는 끔찍한 상황에 대비되어 더욱 인상깊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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