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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난 왜 소설을 읽을까? 이번에 읽은 새의 선물의 작가 후기에서 은희경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그리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세상은 어릴적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심하게 꼬여있고, 우리를 한정짓는 육체적 그리고 물리적 한계 위에 사회적 한계들이 놓여져 있고, 그 사회적 한계 위에 관계적 한계가 자리매김하며 그 위에 또 인간적 한계가 우리를 옥죄고 있다. 그래서 난 이러한 삶의 형태를 복잡다단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길 좋아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렇게 세상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만의 독특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해 가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성숙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2] 냉소 - 세상을 보는 한 코드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라는 책을 미국 도서관에서 한국책을 떨이로 팔 때 구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리고, 아주 흥미있게 이 소설을 후딱 읽었다.
소설 이야기의 주인공은 12살 진희라는 아이이다. 이 아이는 1960~70년대 정도 한국의 읍에 가까운 작은 도시에 살아가며 그리 심각하지 않은 그러면서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놓여진 비극의 상황이 있다면, 어머니는 목을 매어 자살했고, 아버지는 함께 살지 않고 외할머니와 이모가 키우고 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상처는 그녀에게 "자기를 숨기는 방법"과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에게서 분리하는 법"을 터득하게 하였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3] 비루한 세상을 살아내기
12살의 진희는 어떤 재미와 흥미도 없는 유년시절을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관찰함으로써 살아낸다. 그리고, 할머니와 살아감으로써 받게되는 주변 사람들의 동정심과 상처주는 관심 혹은 비난들을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로 분리함으로써 냉소하게 된다.
어쩌면 나를 비롯한 많은 인간 군상들은 어떻게 보면 의미없고 심심한 하루하루를 견디어 낸다. 그리고 가끔씩은 모욕도 당하고, 삶의 비루함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육체적 노화로 인해 힘없는 더욱 비참한 삶의 모습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특별히 내일이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견디어 가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루한 그리고 비루한 현실에 나 자신을 일치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비루하고 초라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나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면 어떻게 될까? 상사에게 듣는 모욕, 성적인 모욕, 가족간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을 권유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잔혹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러한 세상을 살아내는 한 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냉소일 수도 있다. '보여지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 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힘겹게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희일비에 내 자신을 모두 건다면 그 삶의 무게를 이겨내기 힘들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할 때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에게서 분리하는 작업을 통해서 그냥 이 힘겨운 삶을 응시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고, 그 가운데서 상처입은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가 위로하고 화해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이 아닐까...
[4] 삶을 응시하기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소설에서 60대년대가 지나가고 70년대가 다가오는 라디오의 방송이 흘러 나올 때 "70년대에 대해 굳이 기대나 희망을 따로 품어야 할 필요는 느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혁명에 대한 열정은 사회에 대한 혐오로,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과 행동에 대한 지나친 가치부여는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안내되어진다. 너무 큰 기대와 희망을 품지 말고 나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며 냉소적으로 나를 그리고 세상을 응시하는 것도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일 것이다.
나 자신도 글을 쓰는 작업을 할 때에는 철저히 '바라보는 나'의 입장에 서서 '보여지는 나'를 응시하고, 부족하고 못난 그 나를 이해하려고 그리고 위로하려고 한다. 그리고, 화해한다. 그렇게 힘을 얻은 '보여지는 나'는 다시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을 그 특유의 못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는 흐뭇하게 바라다 본다.
삶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않기...
사람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않기..
내 행동에 대해 너무 의미부여하지 않기..
내 자신을 너무 미화하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