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라, 세상이 어두울수록 - 허수경 자전 에세이
허수경 지음 / 문학사상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시리게 반짝이는 밤하늘의 처럼


 요즘처럼 나의 책읽는 취향도, 만나는 사람과의 취향도, 만나고픈 사람의 취향도 제각각이면서 동시에, 내 입맛에만 맞게 보려는 의지가 강해지기도 드문 것 같다. 아니, 예전같으면 별 불편함없이, 쿨하려고 한게 아니라 상황이 어렵지 않아서 혹은 어렵게 생각지 않아서 만나는 만남이 많았다면 요새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같이 크게 늘었다. 때문에 만남에도 걱정이 따르고 왠지 모를 웃는 인상의 얼굴을 가져가기 이전에 먼저, 묵직한 가슴을 먼저 대동하기 일수다.

허수경의 자전에세이도... 어찌보면 신달자 에세이를 읽고 나서, 그리고 결혼한 언니집에 와 있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끌린, 생긴 취향이랄까? 한번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허수경, 그녀, 대중에게 잘 알려진, 그러면서도 비난과 아픔을, 기쁨을 동시에 모두 겪어내야 했던 방송인인 그녀가 글로써 토로해 놓은 말, 글은 어떤, 무엇을 담아놓았을까 싶어 읽기 시작했다.

, 나에겐 고치지 못하는 편견이 있다면 바로 종교인이 행하는 종종의 실수들, 그리고 오히려 더욱 정도를 넘어선 잔악무도함을 저지르는 행위 같은 것을 못 보는 것이고(물론, 일부의 사람이고, 종교인이 선해야 한다는 것 또한 나의 편견이다), 방송인이 미디어를 통해 자기입장을 변호한다는 느낌을 줄 때가 그 두 번째이다. 방송인, 혹은 연예인 등 조금 알려졌다 싶으면 그들에겐 미디어가 축복의 도구(경제적인 부분, 명예적인 부분-급속도로 알려진다는 면에서, )가 되기도 하는 반면 자기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치명적인 위험도구(과다한 언론노출-사생활부분부터 그 이상의 사회적 활동의 제약까지)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데 방송인은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면 해명의 기회도 생기게 마련이다.

상대의 어리석은 부분과 악함을 조금씩 토로하며 자신의 아픔에 정당성을 주고 해명해 보이기도 하고 용서해줬다거나 이젠 이해한다는 말이나, 혹은 나로 인해, 나에게도 결점은 있다식의 끝마무리는 늘 변명처럼 들려서 싫었다. 남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옴을 싫어한다는 글을 쓰면서도 본인이 은연 중 계속해서 지난날 함께 했던 사람에게 겨는 칼날은 보이지가 않는 것인지 잘 포장된 글 속엔 영원히 상대는 못난, 악한. 악인으로 계속 계속 인쇄되어 살아갈 것이 보이지 않는지 아마, 방송인이 아니기에 그들이 미디어로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더 없을 것이다.(물론 충분히 악인 같은 말을 내뱉고 행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분명 알려지지 않은 사람과 결혼해서 이혼했다면 그런 주홍글자와도 같은 짐은 지지 않을 수도 있다.)

자전적 에세이는 정말이지 그런면에서 강한 용기를 갖지 않으면 내기 어려울 것이다. 상대의 추함도 추함이지만 자신의 아픔과 악함도 여지없이 발가벗고 다 보여준다는 의미가 될 것이기에 하지만 위로해 주고 싶다. 응원해 주고 싶다. 그저 그런 길을 걸어온 한 용감한 하나의 사람에게. 허수경씨 말대로 익명의 사람에게 칼날에 베임과도 같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일생에 얻을 수 없는 그런 커다란 위로와 격려의 힘을 얻을 수도 있는 것 또한 익명의 누군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아마 나는 동시에 그 두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종교인이기에 앞서 한 인간이고 방송에 비쳐지기 이전에, 가정 속으로 들어간다면 한 가족을 이끌어가는 한 구성원일 뿐인 것. 더 이상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또 특별하다는 잣대보다 한 인간의 만남으로써의 기준으로 바라보게 된다. 미디어에서 자극적인 기사제목으로, 방송편집으로 보여주어도 이제는 그 너머의 한 개인의 삶과 앞으로 사람들에게 받을 대화 내용들, 시선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들이 겪은 아픔과 사건들은 방송인이나 유명인이기에 미디어에 공개되어 졌기 때문이지,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가정 내에서, 사회에서 수 많은 사건과 남보다도 못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을 대표한 삶이라고 하면 어불성설이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본다. 그들이 공개했기에, 보여줬기에 그 물음과 해명에 가까운 일들이 보여지다 보니 우리네 삶은 잠시 잊고 남들을 말할 때는 쉬워지는 것이다

나는 요즘 가끔, 지인들보다도 어떨 땐 익명의 주고 받음이 더욱 진솔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서로 깊이 알지 않음이, 그리고 더욱 깊게 알려고 묻지 않음에 감사함이 느껴지는. 그렇다고 그런 개개의 익명의 사람들이 냉소적이고 기계적인 관계지향적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때론 가깝다는 이유로, 혹은 지인이면 응당 주고 받았을 당연한 속사정이라는 시선의 관심은 어떨 땐 상대에게 주는 폭력과도 같은 무게를 던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저 하나 하나의 사람이지 내가 모르는 그 불특정 다수는 무조건 낯섦과 경계 대상의 사람들, 차가운 관계의 사람들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가까워서 더욱 차갑고, 가깝다고 해서 받게 되는 낯섦이 더욱 섬찟하게 하지 않던가 말이다. 허수경의 아픈 사연들과 글들은 가깝기에 차갑게 베인 상처들인 셈이다. 글 속에 녹아있는 의지와 생각들로 앞으로의 일들도, 그리고 하나뿐인 아이 별이의 미래도 계속 계속 시리게 반짝이는 하늘의 별처럼 늘 어둠 속에서도 빛나길 바란다. 그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처럼, 늘 관심을 갖고 애정을 갖고 바라볼 터이니.

취향, 그건 사람들을 만나고 겪어내고 살아내고 인연이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선택력이다. 취향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 영영 인연이 안될 수도, 영원한 인연이 될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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