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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윤지강 지음 / 예담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허난설헌, 그녀의 일을 처음 읽게 된 소설
해가 막 기울어 꽃이 입술을 닫을 때 여종을 시켜 모시주머니에 넣은 차를 꽃심에 박아두도록 했다. 모시주머니의 차는 밤이슬을 맞으면서 연꽃의 향내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아침 일찍 손님을 초대해 차동茶童에게 꽃심에 박아둔 모시주머니를 꺼내오게 해 우려낸 연꽃차를 대접했다. 연꽃차를 즐기면서 시를 짓고 난을 치고 거문고를 즐겼다. 144쪽
때는 조선, 당시 여인들은 어떤 삶을 지녔을까? 특히나 양반집 규수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위의 문구처럼 동양의 은은하면서도 고고한 풍류를 즐기며 삶을 살 수도 있다.(이 구절에서 즐긴 이 부분은 참으로 멋지지만, 슬프게 읽혔다. 여종과 차동의 등장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의 여인에게 국한된 삶은? 그리고 그네들이 보는 세상의 넓이정도는? 아마도 그건 주체적으로 살고자 갈망하는 여인이라면 얼마나 닫힌 세상이었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눈을 가리고 살게 하는지는 누구나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난다는 것, 자신의 발로 박차고 나가 세상의 길로, 자신의 뜻으로 길로 걸어간다는 것. 당시엔 얼마나 크나큰 모험이며 지금 현재 우리의 삶으로 봐도 모험이다.
시라는 것, 시인의 삶을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며, 자신만의 정체성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아픔을 애써 알아내려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오곤 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앓아내는.
난설헌,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고, 주변을 읽으며 그것을 그저 통과만 하지 않았다. 시로써 그려내고 시로써 비유하고 같이 앓아낸 여인인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그리고 미래에 주체적인 자신을 찾아, 찾고자 살아갈 여성들에겐 필독서로 뽑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시대가 부른 천재시인 난설헌이 죽은 그 나이, 스물 일곱인 나는 이제야 풋내나는 방황을 시작해도 될까? 모든 것이 당시와 달라서 모든게 가능해보여도 용기가 없어 자신을 더 못 찾는 나인데.....
멋진 삶을 살고 싶어진다.
전에 읽었던 책들이 연달아 주르륵 생각난다. 김탁환의 팩션 소설 [파리의 조선궁녀 리심], 같은 인물을 신경숙이 다룬 [리진], 또 많은 작가들이 다룬 [황진이] 등. 과거를 살았어도 지금보다도 미래를 산 그네들. 그런 삶이 멋있다. 같은 혈육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내게도 그녀들의 피가 알알이 흘렀으면 싶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서 난설헌의 시를 처음으로 많이 접한 듯싶다. 그리고 당시, 시로써 묻고 시로써 화답하는 풍습 또한 우리네만의 멋스러운 풍류가 아닐까 싶다. 또한 목격하는 세상일에 대한 안타까움에 기꺼이 붓을 드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 중 한수를 옮겨 보겠다.
[가난한 여인의 노래]
얼굴이며 맵시 어찌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솜씨 길쌈 솜씨 뛰어나건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중매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오.
춥고 굶주려도 내색 않고
하루 내내 창가에서 베만 짠다오.
부모님만은 나를 가엾다 생각하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알리오.
밤늦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니
베틀 소리만 삐걱삐걱 처량하게 울리네.
베틀에 짜여진 명주 한 필은
결국 누구의 옷이 될이거나.
한 손에 가위 들고 마름질하노라니
싸늘한 밤기운에 손가락이 곱아오네.
남들이 시집갈 때 입을 옷 잘도 짓건만
해마다 해마다 나는 홀로 밤을 지샌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