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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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


이주혜 소설집 | 창비


제목이 반짝이는 보라색이다.
표지도 은은한 은빛이 도는 종이로 만들었고 저 너머 실루엣으로 비치는 고양이의 뒷모습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름이 '길다'인 고양이가 나오는 소설일까, 아니면 고양이의 이름이 정말로 '길다'는 의미일까.

궁금증을 풀고자 그 소설을 먼저 읽어보려 했는데 그래도 소설집을 구성하는 첫번째 소설에는 그에 합당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할 일]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는 중간을 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차근히 또 천천히 차례대로 읽게 되었다지. 그만큼 소설이 한편 한편 모두가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문장으로 이런 소설을 쓰시는 작가님이라면 번역서에 원작자의 마음을 잘 표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은 다수의 책에 옮긴이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살펴보았는데 꽤 여러 권의 책에서 작가님의 소설을 읽은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른 책으로 이어 읽기를 하지 않은 걸 보면 이전에는 작가님의 소설이 내 마음을 끌지 않았었나보다. 요즘의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 소설에 담겨있었고, 곰곰이 잠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깜냥에 따라 또 당시의 상황에 따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게 확연히 다르다.

평범하고 웃음이 날 듯이 따뜻해 보이지만 살펴보면 평범하지 않고 날카로운 구석도 있는 상황과 인물들이 나온다. 가슴이 아프고 신경도 쓰일망정 문장은 모나지 않았고 나를 편안해게 해 주었다.



[오늘의 할 일]

바람이 수양벚나무를 흔들자 꽃잎이 후드득 떨어졌다. 자매는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장면을 눈앞에 두고 잠시 현실감각을 잃었다. 아름답구나. 봄이 말했다. 곧 사라질 아름다움이지. 여름이 대꾸했다. 두 언니는 가을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셋째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본인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겨울이는 잘 살고 있을까? _p.20_



[아무도 없는 집]

여자는 첫 만남 때부터 인상적이었다. 네모라고 해. 악수를 청하는 네모에게 여자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원이야. 원? 넘버 원? 온리 원. 우리말로 원은 둥글다는 뜻이야. 하나이자 둥근 우주. 그게 내 이름이야. 원을 기억해줘.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여자의 자기소개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네모는 입속으로 원, 하고 길게 발음해 보았다. 찰나라면 찰나이겠으나 또 하나의 우주가 생겨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_p.64-65_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밤이다.
격리의 밤. 그리고 아마도 양성의 밤.
내일 날이 밖으면 보건소에 가 재검사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이 병을 앓을 것이다. _p.122_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삼십대 중반부터는 그 시간을 조금 편안하게 보내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낯선 역에 내려 그 동네를 천천히 산택하다 마음을 끄는 식당에 들어가 동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밥을 먹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서점에 들어가 그림책을 한권 사서 역시 마음을 끄는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좁은 골목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는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했다. 오년 정도 그렇게 시간을 보냈을 때 카페 구루미를 발견했다. 고양이 한마리가 '구루미'라는 글자와 호두가 그려진 나무 입간판 옆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_p.152_



[물속을 걷는 사람들]
대자보에 붙은 흑백사진 속 여학생의 말간 눈빛이 히읗을 주저앉혔다. 그 눈망울은 둥글고 부드러웠지만 전날 밤 히읗에게 날아왔던 무수한 말의 파편들보다 훨씬 더 아프게 당도했다. _p.190_



[꽃을 그려요]
여자의 거침없는 손짓이 소년의 집을 바꿔나갔다. 붉은 글씨가 남긴 얼룩이 사라져갔다. 소년은 여자가 할머니의 당부를 잊은 것 같아 걱정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후련해졌다. 여자의 막힘없는 몸짓과 손놀림이 시원시원했고 점점 무시무시해지는 그림은 통쾌했다. _p.197_


[봄의 왈츠]
미호씨, 선남씨, 리온씨. 전부 내 엄마야.
세 여자가 동시에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미소의 크기와 모양은 달랐지만 전부 '엄마 미소'였다. _p.218_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
온이 단박에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눈치 빠른 율이 분위기 수습에 나섰을 때야 나는 또 아이한테 감정노동을 시켰구나,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 셋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고 어색하게 호텔을 나와 오도리공원으로 걸어갔다. _p.261_



시간을 조금 지나 보내고 나서 다시 읽고 싶고, 다시 읽을 때에는 소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책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일년 반 만에 이렇게 표지가 낡아 버려서 너무 속상해. 반납하면서 작가님의 다른 책도 빌려와야겠다. [ 이주혜 작가님 +1 ] 이어읽기 시작!!



덧붙여 최초의 우애이지 배신인 언니와 그의 고양이 호두 더 라떼 아로니아 바로네즈 3세에게 신나는 하이파이브를. _작가의 말_ p.303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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