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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누구나 성장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다 할 성장통의 경험이 없는 것 같다. 가족 내에서 내 위치가 항상 정해져 있었기에, 그냥 나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고 나의 인생에 선택권도 별로 없고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론만 말하자면 필요 이상으로 수동적이고 답답하고 멍청해 보이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가족에선 늘 무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다니.. 그 흔한 형제간의 갈등이나 질투도 없었고, 질풍노도의 시기에 생길만한 불량스러운 행동이나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겠지만, 만약 그 당시 조금이라도 나의 의견이 표현하거나 사춘기 시절의 그런 감정들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이가 들면서 자주 하는 물음인데, '물의 관'을 읽으면서 더더욱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시시하다.
팔베게를 한 이쓰오는 콧김을 길게 내뿜었다. 시시하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요즘에 자주 그런 기분이 들었다. 요시카와 이쓰오는 몹시 지루하고 따분한 인간 아닐까. 뭐랄까 너무나도 평범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텔레비전 학교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초점이 맞지 않는 곳에 비치는 학생처럼. 성적도 보통. 이름도 보통. 키도 보통. 얼굴도 보통. 반에서 눈에 띄지도 않거니와 존재 자체가 희박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누가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부모님이 여관을 경영한다는 점도 외지 사람이 보면 특이할지도 모르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다. p19
시시하고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는 이쓰오에게 평범을 갈구하는 소녀 아쓰코가 등장한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이사로 전학생이 된 아쓰코는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피해 학생이다. 이쓰오는 그녀가 자신의 동네로 이사 온 첫날부터 우연히 알게 되고, 학교 문화제를 함께 준비하면서 그녀만의 비밀도 알게 된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들키고 싶지 않았던 아쓰코는 이쓰오에게 초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묻은 타임캡슐을 꺼내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쓰오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 신경이 쓰였고, 타임캡슐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바꿔놓기 위해서 생전처음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쓰코를 만나면서 이쓰오에게도 일상의 탈출구가 생긴 것이다. 두 사람은 필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타임 캡슐의 편지를 바꾸려는 의도가 자신에게 설명해준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고, 다시한번 그녀의 인생에 손길을 내밀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애정의 관계는 아니지만, 누구에게 딱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그런 공감과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쓰오와 아쓰코의 이야기와 함께 등장하는 이쓰오의 할머니 이야기는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아이와 함께 자연관찰 책 속에서 보았던 도롱이벌레 이야기도 함께 잘 어우러진다. 형형 색색의 이쁜 종이를 오려주면 무지개빛 도롱이를 만들고 사는 도롱이 벌레. 사람들은 그 내면인 아닌 겉만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도롱이벌레처럼 화려한 배경의 주인공이었던 할머니의 숨겨진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 그리고 겉보기엔 평화롭지만 죽음을 생각할 만큼 괴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아쓰코, 행복할 것만 같은 평범한 일상속의 이쓰오가 느끼는 지루함에 대한 고민들, 이런 이야기들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우러져 있었다.
그냥 자살하면 될 텐데 어째서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 어째서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타임캡슐 속의 편지를 바꿔치기했을까. 합숙 통신표 같은 것까지 만들어달라고 해서.
답은 간단하다.
죽기가 무서웠으니까. 싫었으니까.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대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실패할지도 모르는 번거로운 계획을 세워서 일부러 에둘러 가는 길을 택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획이 실패하기를 바라면서. p278
아쓰코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속에 행복한 일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에 타임캡슐 속 편지를 바꾸길 원했었다. 물론 이쓰오에겐 진실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모두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썼던 편지를 꺼내고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고 자기 스스로의 과거를 지어낸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으로 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그렇게 기억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쓰오를 통해 다시한번 삶을 살게 된 아쓰코는 다른 방법으로 괴롭힘을 중지시킨다. 읽는 내내 안타깝고 답답했던 마음이 후반부에 되어서야 풀리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일본에서는 '이지메'라는 말로 오래전부터 왕따문화가 심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학교폭력과 왕따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얼마전 여성 걸 그룹의 왕따문제도 그렇지만,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이다보니 내 아이가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은 처음 읽었지만 그가 스릴넘치는 글을 쓴다는 호평을 종종 보았던 것 같다. '물의 관'에서는 스릴넘치거나 생동감있더나 잔인한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청소년기에 아쓰코가 겪어야 했던 집단 괴롭힘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중학생의 나이로 자살을 구체화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무섭기도하고 대단하기도 하지만, 사춘기시절 부모님의 호된 잔소리에 막연하게 가출이나 자살을 생각해봤던 사람들이라면 공감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환경들이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 했던 것이기에, 글로만 보고 넘길 수 있는 것이기에 감사하기까지 했으니까.
이쓰오는 할머니와 아쓰코 덕분에 지루한 일상을 잠시라도 탈피하고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과거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청소년기의 기억은 비오는 날 친구와 웅덩이를 밟아가면 병콜라는 마시던 것, 질이 나쁜 선배에게 불려갈 뻔 했던 것, 고등학교때 부모님 몰래 했던 수 많은 미팅들~ 뭐 이런 것 뿐이라,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특별할 것 없던'그 시절이 마냥 아쉽기만하다. 이쓰오와 아쓰코가 겪어야만 했던 너무나 특별한 성장통이 시간이 흐른뒤에게 그들에게 성숙한 작용을 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아직은 미치오 슈스케가 정말 제2의 무라카미 하루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다른 책들도 경험하고 픈 욕구가 충분히 생기는 작품이었고, 좋은 작가 한 명을 알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