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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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중 한 명인 나는(그렇다고 그녀의 작품을 모두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추리 소설이라도 쓴게 아닐까?'하는 심정으로 책을 잡았다. 사실 추리물에는 영~~ 흥미를 못 느끼는 나이기에 간만에 그녀의 작품을 보고도 감흥이 없는 그런 기억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닌지 염려 되기도 했었다. 뭔, 걱정을 미리부터 한담. 늘 그랬듯이 그녀의 책은 표지부터가 남자른 느낌! 호기심과 감수성을 황창 자극하는 색.다.느낌이었다. 제목은 '수박'으로 시작하는데 초록색도 아닌 시릴만큼 파란색이 어떻게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것일까?

 

192쪽의 적은 분량이지만 무려 11개의 단편이 실려있었다. '미스터리'라는 문구만 보고 추리 소설 그 비슷한 무엇을 연상했었는데, 늘 그랬듯이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조금은 특별한 에피소드 11개가 담겨져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공통 된 점은 '어린 소녀의 미스테리한 여름 날의 추억'이라는 것. 모든 이야기가 각각의 단편에 등장하는 소녀의 기억이면서도 누군가의 기억이다. 미스터리라고 해서 끔찍하거나 공포에 휩싸이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은 아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에서 항상 볼 수 있듯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었을 법한 일들이면서 사소할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특별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평생을 머릿속에 맴도는 일들. 사실 나도 그 비슷한 어린 시절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기에, 그녀의 이야기들이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비밀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남들이 모르는 나만 알고 있는 추억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난뒤 생각해보니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그저 내가 상상했던 이야기인지 헷갈려 구분이 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유쾌한 기분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들에 나오는 소녀들은 친구가 없고, 누군가의 관심 밖에 있는 것 같으면서 상당히 외로워 보인다. 아마 그런 점들이 소녀들에게 누군가와의 일들을 '특별한 기억'으로 만들어줬던 것 같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 숙모의 집에서 가출을 해 남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 소녀의 이야기 <수박 향기>와 비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달팽이를 살육하는 남모를 취미를 가졌던 소녀의 이야기 <물의 고리>, 학창 시절부터 연락하고 지내는 M과의 기묘한 우정을 그린 <그림자>라는 이야기가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 특유의 문체가 너무너무 좋았다. 가벼운 단어들로 쉽게 써내려 가지만, 누구보다 더 가슴깊이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글들. 간이 딱 맞는 음식을 맛있게 싹싹 비운후 표현하기 어려운 만족감을 느끼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그래서 자주 생각나고 자꾸 먹고 싶은 그런 중독성 있는 문체다. 책의 마지막 해설에서 씌여진 말처럼 11편의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한 순간에, 한참 읽는 도중에,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더더욱 이런 이야기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야한다는 것을 나 또한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 설명할 길이 없다. 그저 느낌이라고 하면 쉬워질까? 소설이지만 왠지 그녀의 어린시절 비밀들을 함께 공유한 그런 느낌도 들고, 다 읽고 나서는 나만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싶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얘기는 시답잖다.(p184)

 

예전엔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도 느낌이 오지 않는 책들이 종종 있었는데, 최근에 만나는 그녀의 작품은 나와 너무나 코드가 잘 맞았다. 소설, 에세이 모두다. 그래서 또 그녀의 담백한 글 맛을 기다기리로 한다. 다시 한번.

 

 

 

 

파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 덩그러니 서 있다 보면 학교의 표정이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르게 보여 놀라웠다. 그것은 그저 밋밋한 건물이었다, 평화롭고 얼빠진. 작은 새들의 재재거림이 통통 튕기듯 귀를 적시고, 나는 아직 아무도 숨 쉬지 않은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뒷마당에 차 있던 급식 냄새가 그렇게도 싫었는데, 그 불 꺼진 급식소마저 청결하게 보였다. p34

 

 

나는 신칸센을 싫어한다.

질서 정연한 차량 안의 모습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는 안내 방송도, 수레를 밀며 군것질거리를 파는 여자의 유니폼도. 꺠끘하고 커다란 창문, 반질거리게 닦인 은색 창틀, 멋대가리 없는 옷걸이, 그 허술한 커튼 따위도.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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