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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아이를 잃고 남편을 잃은... 세상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한 여자의 이야기.
가족과 함께한 여행지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아이가 익사하는 사고를 당한 여자. 그리고 소중했던 아이를 잃고 난 뒤 회복되지 않는 부부관계와 모든 삶을 포기했던 남편. 그 남편마저 어느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는 모든것을 잃은 그 뒤에 '내가 그 자리에서 아이를 살폈더라면... 새벽에 이른 외출을 하는 남편을 잡았더라면..'하는 후회들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밥을 먹을 힘도 일을 할 의욕도 없는 그녀가 즐기는 유일한 주식은 빵과 막걸리. 그녀의 과거사부터가 예사롭지 않게 우울함과 불행함의 연속이었던 터라 마음편히 기댈 가족도 이젠 주거할 곳도 없어진 세상에 나 하나 달랑남아있는 그녀의 쓸쓸함이 마음을 죄어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그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알 수 있을까? 반은 넋이 나가 제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그녀에게 우연히 남편의 선배 이정섭이 나타나게 되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정섭은 그녀를 그냥 둘 수가 없다. 쓰레기 같은 집에서 빵과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고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없는 이상한 말을 주절거리는 그녀를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간 '목포'. 물론 정섭이 볼일이 있어 가게된 목포에서 정섭은 그녀를 잃게 되고, 그녀는 그렇게 목포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연히 들른 허름한 '영란여관'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살시도를 했던 그녀는 그 일을 계기로 '영란'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여관에서 거주하면서 일도 돕고 아이도 돌보고 새로운 곳에서 순수한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는 시간들로 그간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나선다. 정섭과 다르게 영란은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정섭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매일 다른사람들과의 삶속에서 남편과 아이를 그리워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또 극복하려고 한다. 그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녀에게 두근거림을 전하는 시골총각 완규. 그 관심이 부담스럽지도 기분나쁘지도 않아 그 설레임으로 잠시 자신을 치유할 여유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날 영란은 목포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고 그렇게 목포의 모든것들과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게 되는가 싶었는데... 결국 떠나지 못하고 다른 동네에서 자리를 잡는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모시는 인자. 방락벽을 앓고 있는 그녀를 우연히 알게 되고 그 집에 세를 들게 되면서 둘은 또 다른 친구의 모습을 갖는다. 목포라는 곳의 규모는 잘 모르겠지만 대도시와는 다르게 그곳에서의 인맥은 좁기도하고 넓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얽혀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정작 그들은 모르고 있으니까. 영란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동안에도 정섭은 그녀를 생각한다. 기러기아빠로 외로운 삶을 살고 있는 정섭. 그 또한 죽음일 갈라놓지 않았을 뿐 사랑했던 아내와 아이를 멀리보내고 이젠 남남처럼 지내고 있다. 그런 외로움 때문인지 그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영란에게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 같다.
그 여자를 연민하는 것으로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려는 수작인가. 그러나, 그저 아팠다. 자신이 아프니, 다른 이의 아픔이 비로소아프게 다가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내 살이 아리니 다른 이가 아려하는 것도 눈에 보였다. 위로받고 위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저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아픔이 타인의 아픔에 조응하는 이 낯선 경험이 그러나 정섭은 위로가 되었다. 위로를 바란 것도 아닌데, 그녀를 생각하며 아파하고 있는 순간에 제 가슴속 통증 위로 도포되는 어떤 안식의 약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면, 그때에야 겨우 아주 오래전, 남루한 현실속에서도 싱그럽고 빛나던 한때들을 편한 마음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p129>
목포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영란은 돈도 없고 밥도 굶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괴롭지 않다. 그녀가 목포의 생활로 물질적으로 얻게 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상처만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 그렇게 희망적이진 않지만 하루하루 살아가야하는 이유와 보살피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 다시 방락벽을 앓고 돌아온 인자와 함께 '영란집'이란 작은 식당을 개업하기에 이른다. 이제 이러한 모습으로 영란은 목포에서 완전히 정착하는 안락한 삶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녀 곁에 설레임을 보여주는 완규도 사랑했던 남편과 아이도 없지만 조금은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된 것이다 .아니... 살아갈 이유가 아닌 자신의 슬픔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순리에 따르게 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내용면에서 봤을때 얼마전에 읽었던 '좋은 슬픔'이란 작품이 떠올랐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이 모든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였는데, 주제는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영란'은 전체적인 느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침울함이 있다면 '좋은 슬픔'은 유쾌 발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한편의 로맨스 소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던 책이다. 사실 독자입장에서는 슬픔을 주제로 다루었다곤 하지만 전반적으로 침울함이 깃든 책 보다는 그래도 그속에서 밝은 희망이 있는 내용이 읽기가 더 수월하다는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정섭과 영란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하는데 특별히 구분이 없어서 책의 상당부분을 헷갈리면서 읽게 되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주인공 영란과 같은 상황에 내가 처했다면 아마... 나는 극복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살을 시도한 것 자체도 동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슬픔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그 속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작가의 말처럼 나도 슬픔을 돌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거부하는 것도, 너무 그것에 빠져 살아있는 나 조차 살아있는게 아닌 그런 삶을 보내는 것보다 그 슬픔을 인정하고 돌보는 것이 조금은 더 현명한게 아닐까?
나는 '지금 슬픈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내치지 않기를 바란다.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슬픔을 방치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다. 작가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