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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책세상 / 1994년 8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읽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이 발표되는 날부터 시작해. 올해의 수상자는 외교관 출신의 호남아 소설가 니콜라! 주인공인 에드워드는 니콜라의 소설을 영국에 번역하는 번역자인자, 영국 판권을 가진 출판업자이자 니콜라의 아주 오래된 친구지. 그렇다면 당연히 니콜라의 개가를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기뻐하기는 커녕...본격적인 복수를 시작해.
니콜라와 에드워드의 사이는...뭐랄까, 이런 사이 상상할 수 있겠니? 한 사람은 늘 주목받고, 늘 일이 잘 풀리는데 한 사람은 늘 그 뒤치다꺼리만하는 시다바리 같은 사이 말이야.그런데도 잘 나가는 친구는 무심한 애정을 가진데 비해 시다바리(!)는 언제나 그 친구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줄까 전전긍긍하고, 본인도 그게 싫지만 어쩌다 잘나가는 친구가 던진 한마디 '고마워'에 그만 기뻐해버리고 마는 사이..
이들이 처음 만난 건 이집트였어. 두 사람 이집트에서 소년시절을 보냈거든.어른이 된 후, 프랑스어로 쓰여진 니콜라의 소설을 에드워드가 영어로 번역하면서 에드워드는 한가지 고민에 빠지게 돼. 니콜라의 소설이 이거 영, 아니거든. 하지만 에드워드는 우정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번역을 해. 그러다보니 니콜라의 소설은 늘 고국인 프랑스보다 영어권 국가들에서 더 인정을 받는 거야. 에드워드는 때로 '그 소설은 내꺼야!' 외치고 싶기도 하지만, 뭐 어쩌겠어.
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니콜라에 비해 에드워드는 벌써 여자를 안아본게 30년은 지났나보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겐...추억과 상처가 있거든. 소년시절 에드워드는 한 이집트 소녀와 사랑에 빠졌었어. 하지만 소녀가 부잣집 하녀로 들어간 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없었고, 어느 날엔가 그 소녀가 시체로 발견됐거든. 임신한 채로. 아마도 소녀의 아버지가 딸이 정조를 잃었음을 깨닫고 죽인 거겠지. 자기 때문에 사랑하던 여자가 죽은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평생 그녀만을 사랑하며 살아 온 거고.
그런데... 이젠 중년이 된 니콜라가 에드워드에게 새로운 소설을 들고 오면서 사건이 시작된거야. 평소의 니콜라답지 않게 아주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훌륭하게 쓴 그 소설은 놀랍게도 니콜라와 평생 에드워드가 자신의 연인으로 믿고 있었던 그 이집트 소녀의 사랑 이야기였어. 이집트 소녀가 하녀로 갔던 집은 니콜라의 집이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니콜라와 새로운 사랑에 빠졌던 거야. 그리고 니콜라의 아이를 가진 채 죽음을 당했던 거고. 물론 니콜라는 에드워드의 얘기를 전혀 몰랐지만 말이야. 에드워드는 평생 니콜라의 그늘에서 살았지만 정말 이것만은...참을 수가 없었어.
에드워드는 그 소설의 표절작을 하나 만들었어. 문제는 표절작이 먼저 출판된 것처럼 만들었다는거야. 아니나 다를까, 공쿠르 상을 받은 작품이 알고보니 표절작이었다는 사실은 전대미문의 스캔달이 되었고, 니콜라마저 자기가 무의식중에 표절을 했다고 생각하고 자살해버려. 가장 상처입은 자가 완전범죄에 성공한다...이런 얘길까? 에드워드를 폭발하게 만든 건 어릴 적 사랑한 소녀의 일이었지만, 그건 눈이 잔뜩 쌓인 나뭇가지 위에 사뿐히 얹힌 한 줌의 눈..같은 거였겠지. 그 눈이 얹힘으로해서 나뭇가지가 부러졌지만, 진짜 원인은 그때까지 차곡차곡 쌓인 다른 눈의 무게인 것처럼 말이야.
능력이 있으되 숨어 있어야 하는 존재의 슬픔... 성공이 반드시 능력 순이나, 인격 순으로 되는 건 아니잖아. '언젠가 나를 알아주는 시대가 올거야...' '내가 없으면 저 이의 성공은 불가능했어!' 혼자 아무리 얘길 해봐도 허허,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자기 말고 또 누가 있겠어? 데뷔작으로 이렇게 딱떨어지는 심리 소설을 써낸 피슈테르는 원래 역사학자였대. 프랑스 혁명기에 대해선 인정받는 학자라는군. 그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뭘까? 혹시 자기가 연구하고 자기가 썼는데 지도 교수 이름으로 발표해야했던 불운한 대학원생 시절이 프랑스의 피슈테르에게도 있었던 걸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