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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간만에 읽은 소설책의 분량은 한없이 가볍게 다가왔다.
아직 나에게 소설이란 장르는 작가의 창작을 고통을 외면한채
시간 몰입의 즐거움을 주는 그렇고 그런 장르인 듯 싶다.
쉴세없이 빠져들면서 기대에 충족을 갈망이라도 한듯이
읽어 내러 갔지만..
그러나 맘속에 남는 건 한없이 약한 감동이다.
다분히 작품은 작가의 사상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소설을 향한 기대는 무엇일까.
애시당초 인간이 만든 것이라 '창조자'의 영향력에서
절대 자유로울순 없겠지만 지나치게 작가의 개입이 난무하면
뭐든 그러하듯 눈쌀이 찌뿌려 질수 밖에 없다.
우행시에서 작가 공지영은 스스로 카톨릭 신자임을 '모니카 고모'의 등장으로 말하고 있고, 그의 사형에 대한 반대입장을 윤수를 내세워서 대변하고 있다.
그 얼음같고 차갑고 까칠하던 유정의 극적인 변화의 조력자가 사형수였음은 사랑을 넘어선 구원자에 대한 구명운동의 시작이다.
같은 사형수를 다뤘던 영화 중 '데드맨워킹'에서 사형수를 소화했던 숀팬은 억울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형수 본연(?)의 자세를 성실히 취했다. 역시 그를 살리고자 했던 건 수녀(수잔 세런든)이었고 그 둘의 연기는 '심지어'최악의 악질임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집행이라고 합당화 했던 사형제도가 단지 법정살인일 수 밖에 없음을 인간의 본성에 호소한다.
윤수가 결국은 억울한 누명한 소유자임이 중반이후 드러났을때 정체를 알수 없는 나의 불쾌감은 수면위로 떠올랐다. 생명을 말하려던 작가의 목적은 방황하기 시작하고, 소설은 극적 재미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이건 아니었다.이 소설이 행복한 시간을 말하려 했다면 그는 다른 여타 사형수처럼 죄악 가득한, 하지만 죽음 앞에서 돌아선 자로 서 있어야 한다.
그에 대한 변명은 구구절절 그가 겪어왔던 과거에 대한 해설로 이미 충분했다. 더 이상의 입장표명은 정확히 '오버'이다.
이 시대의 사형수는 '사문화된 법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최근에도 연속 살인으로 또 하나의 범죄자가 이 법정 최고형을 받았지만 이미 김대중 정부 이후로 한건의 형 집행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은 종신형의 다른 이름으로 변질된 사형제도의 현 주소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건 축복일지, 저주일지 난 모르겠다.
매일 매일 마다 형 집행을 안 시켜주는 법정 당국이 그들에겐 은인일지 아닐진 모르겠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오늘을 산다는 건 삶의 연속이 아니라
죽음의 연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틈타 사형수를 제대로 한 사람으로 그리지 못한 작가나
차마 폐지하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형 집행을 하기 싫은 정부나
정직하지 못한 건 동일하다.
아름다운 소설에 지나치게 까칠한..가을 날의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