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이 되었든, 어떤 형식으로든 언어로써 사람을 억압하고 싶지 않았다.
타향에서 고향을 떠올리면, 과거의 시간 쪽으로 닫혀있던 내 머리 속의 뒷문이 확 열린다. 과거의 시간은 내 뒤에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앞에 있는 것은 현재의 시간이고 현재의 사건인 것 같다. 현재를 살고 있을 동안 그 뒷문이 저절로 열리는 일은 매우 드물다. 뒷문이 열리는 일은 ‘고향이라는 말이, 과거의 기억을 촉발하는 경우에만 일어난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현재화하는 미래의 시간이다. 미래는 현재가 되었다가 재빨리 과거화한다. 따라서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라는 이름의 접속사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고향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에는 조상의 무덤이 있다. 우리가 살던 옛집이 있다. 과거에 우리와 상종하던 사람들이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나의 과거는 물론, 지금은 세상떠난 내 부모의 과거까지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고향에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 시간의 전후는 헝클어져 버린다. 혼자 고향을 방문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혼자 방문할 경우, 나는 접속사 노릇을 그만두고 그만 과거에 편입되어 버린다.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가서 다음날 할일을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헝클어진 시간을 수습하고 시계를 제대로 돌리는 일은 고향마을의 동구밖을 벗어나야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인지, 내게만 일어나는 일인지, 고향이야기를 쓸때마다 나는 궁금해한다.
보라. 나는 고향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거기 눌러 살라고 명한다면 나는 거절할 것이다.
고향이라는 게 나라는 인간의 뿌리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것은, 내가 떠나야 할, 버려야 할 그 무엇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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