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이 되었든, 어떤 형식으로든 언어로써 사람을 억압하고 싶지 않았다.

타향에서 고향을 떠올리면, 과거의 시간 쪽으로 닫혀있던 내 머리 속의 뒷문이 확 열린다. 과거의 시간은 내 뒤에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앞에 있는 것은 현재의 시간이고 현재의 사건인 것 같다. 현재를 살고 있을 동안 그 뒷문이 저절로 열리는 일은 매우 드물다. 뒷문이 열리는 일은 ‘고향이라는 말이, 과거의 기억을 촉발하는 경우에만 일어난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현재화하는 미래의 시간이다. 미래는 현재가 되었다가 재빨리 과거화한다. 따라서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라는 이름의 접속사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고향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에는 조상의 무덤이 있다. 우리가 살던 옛집이 있다. 과거에 우리와 상종하던 사람들이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나의 과거는 물론, 지금은 세상떠난 내 부모의 과거까지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고향에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 시간의 전후는 헝클어져 버린다. 혼자 고향을 방문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혼자 방문할 경우, 나는 접속사 노릇을 그만두고 그만 과거에 편입되어 버린다.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가서 다음날 할일을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헝클어진 시간을 수습하고 시계를 제대로 돌리는 일은 고향마을의 동구밖을 벗어나야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인지, 내게만 일어나는 일인지, 고향이야기를 쓸때마다 나는 궁금해한다.

보라. 나는 고향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거기 눌러 살라고 명한다면 나는 거절할 것이다.

고향이라는 게 나라는 인간의 뿌리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것은, 내가 떠나야 할, 버려야 할 그 무엇이기도 했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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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는 매일밤 노동에 지친 부모의 얼굴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이나는 그런 자신에 절망하여 백화점이 내다보이는 압구정의 고급 커피하우스에 앉아온 정신을 집중하고 백화점 앞을 가득 메운 반짝거리는 여성들과 자동차들과 쇼핑백들에 친근감을 가져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서울시 강남구에 익숙해져보려는 것이다, 두부공장이 있는 경기도의 쇠락한 소도시가 아니라, 물론 처음에 이나는 반짝거리는 옷들과 그옷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날씬한 여성들을 넋을 잃고 황홀한 눈길로 바라보며 벌컥벌컥 커피를 들이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리하여 커피가 차갑게 식어갈수록 그런 여자들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저 깊은 바닷속에 사는 납작한 해저생물이나 예쁜 애견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한 분홍색 푸들이나 아니면 물방울 모양의 유에프오를 타고다니는 외계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나는 한껏 더 절망하여 커피하우스를 빠져나온다.

두부를 만든 돈으로 계속해서 이나가 좋아하는 고급 맥주와 고급 치즈를 사고 가끔은 값비싼 와인을 마시면 되지만 그것이 완전한 바보 짓,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짓, 이나의 상상 속 서울시 강남구 주민들에게 비웃음을 살만한 바보짓이라는 것을 이나도 안다.

다 무너져가는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한 이나의 삶과 잘 설계된 사회보장제도와 높은 실업률을 배경으로한 유럽의 치즈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나는 도저히 그 둘을 조화시킬 수가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나는 치즈의 곰광이와 벽지의 곰광이 사이에서 잔잔하게 흔들린다. 그 잔잔한 멀미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린다. 잔잔한 멀미 속에서 조금씩 침식되어가는 삶.

- ‘이나의 좁고 긴 방‘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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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침묵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언어로 위장하여 다가오는 가식과 가짜 친교와 가짜 친절을 모두 거부한다.

-
그들은 되도록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며, 되도록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월급이 적어도 혼자할 수 있는 조용한 일을 찾는다. 그리고 서툰 외국어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더듬거리며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

‘외계인 무선통신’의 회원들은 지구에서 성공하기 위해 아등바등거리지 않는다. 이곳은 자신의 고향이 아니며 자신의 삶의 터전이 아니다. 지구는 그들에게 외계 행성이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원숭이 무리에서 명예로워지거나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이 지구 위에서는 그렇다.

지구로 유배되어 있는 삶. 고향을 상실한 삶. 그들은 이 지구라는 유형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날마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이 지구를 탈출하는 꿈을 매일 꾼다. 그래서 그들에게 우주 끝까지 전파를 날릴 수 있는 강력한 무전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어디쯤에 있는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르는 고향 행성을 향해 그들이 날리는 쓸쓸한 전파는 오늘밤도 달의 뒤편을 지나서 우주 끝으로 날아갈 것이다.

왜 그들은 강한 지구인으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정체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 p. 209

아이로니컬한 점은 타임스키퍼들이 모두 시간을 절저하게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정확한 삶을 선호하는 사람들이고 시간에 대해 강박적일 만큼 철저한 사람들이다.

"규칙과 계획이 없으면 불안해요. 그래서 삶을 규칙적으로 만들어야 하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해요.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자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다음날을 위해 적정한 수면시간과 운동시간을 고려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는 다음 스케줄에 지장이 없도록 항상 면밀하게 신경을 써요. 주말에는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도 준비 해놓죠.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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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면이 없는 사람들과 체면을 차리며 의무감에 못 이겨 규격 바른 대화를 하는 자리에 앉으면 당장 가슴이 답답해진다.

...

어렵사리 말을 마친 후에도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 말 한마디를 꼭 해야 하는 건데 빠뜨렸다든가,
그 말 대신 이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따위 후회가 최소한 사흘은 간다.

-p.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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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직원을 등 떠밀어 돌려보낸 재규 씨는 모처럼 환한 얼굴이 되어 파라솔로 돌아왔다.

"제미, 접신지 뭔지 밤낮으루 테레비 헐 때버텀 알아봤어야 혀. 사램이 견물생심이라구 꼭 밥 먹을 때맞추어 알이 통통한 게장을 찢어서 입으루 빨아대니, 어디 회가 동혀서 안사 먹구 배길 재간이 있나. 팔다리가 왼통 쑤셔 둬척거릴 때믄 여수 겉은 예펜네가 나와서 온몸을 낙신낙신 두들기는 안마기를 내놓구 여수 해골을 갈아대니 안사구 배기겄냐 말여."

"지당허신 말씸여유. 소득이 일만 불이든 죄다 일만 불인 줄 아는지, 도시것이나 촌것이나 테레비 앞에 앉아서 왼종일 전화루 홈쇼핑 질이니 나라가 안 망허겄시유? 다리두 멀쩡허겄다 쬐르르 달려나오든 멫 발안 가 슈퍼가 있는디두, 간스메 한통 사는 것두 전화루 지랄덜을 떠니 나라가 안 망허구 배기겼냐 이 말씸여유."

온종일 파리채만 휘두르는 것이 죄다 홈쇼핑 방송 탓으로 여기는 영종이 모처럼 속내를 드러내고 발길이 뜸한 동네사람들을 성토했다.

영종과 입을 맞추며 흉을 보던 재규 씨는 파라솔을 왈칵 젖히며 돌연 나타난 마누라 때문에 끝을 맺지 못했다.

"워째 냄이 주문헌 물건은 죄 멤대루 돌려보내구 야단이랴?"

"흥. 주문 좋어허네."

"그려. 아츰부텀 양산 밑으 기들어가 뻘게츠럼 술이나 빠는 건 아깝지 않구, 평생 구멍난 속옷만 입든 마누래가 모처럼 큰멤 먹구 빤쓰 멫 장사는 건 아까워서 보초를 슨다?"

- 이시백, ‘땅두더지‘,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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