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 내 삶에 돌이키고 싶은 순간마다 필요했던 철학 솔루션
이관호 지음 / 웨일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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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책 읽는다고 허세부리지 말 것


이관호,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웨일북, 2020.


저는 ‘철학은 우리 삶에 유용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물론 철학 개념이나 철학자의 생각법을 공부하여 쓸모있게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저 유용한지 유용하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학문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즉, 쓸모없지만 가치가 있는 철학도 있습니다). 철학이 삶에 유용하다고 말하는 건,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만 일부러 다른 사실(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숨김으로써 거짓을 말하는 걸로 보이기도 합니다(거짓말이 아닌 거짓… 말. 진실을 얘기하지만 모든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음으로써 상대가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화법).


곧 있으면 추석이죠. 만약 철학을 전공했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이런 말을 날릴 지도 모릅니다. “그거 배워서 어디다 써먹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꼰대짓에 대항하여 철학의 쓸모를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애쓰는데요. 참… 안쓰럽습니다. 차라리 펀쿨섹좌 고이즈미 신지로처럼 당당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써먹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철학을 하기 때문에 철학을 전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철학이니까….”


저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중에는 철학의 쓸모를 조명하려는 책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에서 몇몇 책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단순히 자기 주장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철학 개념을 사용하고(허세를 부리고), 그러면서 그 개념을 왜곡시켜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며, 더 나아가 그저 ‘쉬운 철학책’을 쓴다는 미명 아래 더 사려 깊은 고민과 분석이 필요한 문제들을 너무 가볍게 다루기도 합니다. 1절만 하지, 2절, 3절로도 모자라 아예 뇌절을 해버리는 거죠(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만,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가 딱 그런 책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이 좋았던 이유는 저자가 그렇게 뇌절하지 않고 차분하게 글을 풀어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후회가 가득한 삶을 살아왔을 텐데요. 프롤로그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건네는 저자의 말에 살짝쿵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저는 심성이 뒤틀려서 그런지 ‘위로는 고맙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내 삶은 잘못된 거 같은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요.


“후회.


굳이 이 책을 잡고 펼치게 된 인연은 이 감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후회스럽더라도 그 과거는 당신의 탓이 아니고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주변 지인들을 냉정히 돌아보자. 특별히 잘못된 누군가가 보이는가? 남들이 당신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삶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당신 자신밖에 없다.


오히려 지금껏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음에, 미숙함으로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났음에, 수모와 서러움을 견뎌냈음에, 그 과정에서 흘려야 마땅했을 눈물을 참았음에 이 말을 건네주고 싶다.” (6쪽)


굳이 이 책의 단점을 꼽자면 이렇습니다. 이미 이와 비슷한 철학책이 너무 많다는 것(그래서 저는 좀 지루했습니다. 중간중간 저자 고유의 경험이 서술되어 지루함이 심하진 않았지만), 실제로 삶을 고쳐 쓰는 데에 유용한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진 않는다는 것(뭐, 철학이 반드시 쓸모있지는 않으니까요), 중간중간 좀더 깊게 얘기할 만한 주제들이 너무 짧게 다뤄졌다는 것(개인적으로 반박하고 싶은 부분도 조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철학 입문서들을 여럿 읽어봤고, 자기계발을 위해 명확한 도움이 필요하며, 삶의 문제들을 더 심층적으로 고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그닥 ‘유용’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단점을 쓰면서 글을 마무리하려니까 영~ 기분이 거시기하네요. 이 책 좋은 책입니다(급 포장…. 이 리뷰는 웨일북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이 정도면 앞광고 제대로 했다).


#한줄평 마~ 마~ 무난무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철학책



2. 국어사전을 너무 믿지 마세요


저자의 글 내용이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서, 편집자의 관점으로 이 ‘책’을 보면 군데군데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차례 페이지 디자인은 가독성이 떨어졌고, 동양 철학자의 문헌을 인용할 때는 번역문과 함께 원문(한문)도 적었는데 서양 철학자를 인용할 때는 원문(영어든 독일어든)이 없었고, 중간중간 ‘것’이 너무 많이 쓰여서 문장이 깔끔하지 않고…. 딱히 중대한 결함은 아니므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적하기는 좀 그렇고, 짚고 넘어갈 만한 지점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집 아이와 함께하는 취미 활동이 있다. 시를 낭송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것. 교육 차원에서 시도했는데 내가 선창하고 아이가 따라 하다 보니 덩달아 낭송에 참여하게 됐다.”


문장에 오탈자가 있진 않습니다. 저는 단지 여기서 왜 ‘따라 하다’에 띄어쓰기가 되어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에겐 ‘따라하다’라고 한 단어로 쓰는 게 더 자연스럽거든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라하다’라는 단어가 실리지 않았으니까 띄운 걸까요? 국립국어원에서는 ‘따르다’와 ‘하다’가 각각의 단어이므로 띄어 적는다고 하네요.


어… 그럼 ‘따라가다’는 어떤가요? 이건 한 단어로 인정되어 사전에도 실려 있습니다. 엥? ‘따르다’와 ‘가다’도 각각의 단어일 텐데 왜 여기선 붙이죠? 찾아보니 ‘따라오다’도 한 단어인데요? ‘따라붙다’도 그렇고! ‘따라잡다’는 또 어떻게 설명하시려고?!


여기서 ‘어휴, 한국어 띄어쓰기는 너무 어려워!’라고 생각하면 하수입니다. 띄어쓰기 원칙은 의외로(?) 간단한데요. ‘은/는, 을/를’ 같은 조사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그냥 띄우면 됩니다. 문제는 어떤 말이 과연 한 단어인지 아닌지 여부죠(‘따라하다’는 한 단어고 ‘따라 하다’는 두 단어). 답을 찾기 위해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는 건 좋지만, 사전이 모든 답을 알려주리라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사전은 표준어 규정집이 아닙니다. 붙여 쓴 ‘따라가다’는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니까 맞는 말, ‘따라하다’는 사전에 없으니까 틀린 말(띄어 적어야 하는 말)이 되진 않습니다. 국어사전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대중, 즉 언중들의 단어 용례를 담아놓은 정보집입니다(말 그대로 ‘사전’이죠). 결국 한 단어인지 두 단어인지 결정하는 건 한국어 사용자인 우리들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근본을 따져보죠. 말이란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내 생각에 ‘따라하다’를 한 단어로 보는 게 자연스러우며 내 말을 듣는 상대방도 그걸 자연스럽게 느낄 것으로 판단되면(그래서 소통에 지장이 안 생긴다면), 띄우기보다는 붙여 써야 합니다. 진정으로 어려워해야 할 대상은 한낱 띄어쓰기가 아닙니다. 과연 내가 자연스럽다고 느낀 표현을 남도 똑같이 느낄까요? ‘어휴,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는 너무 어려워!’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저라면 위 문장을 ‘내가 선창하고 아이가 따라하다 보니’라고 교정했을 겁니다. ‘내가’라는 표현이 ‘아이가’에 대응되고 ‘선창하고’가 ‘따라하다’에 대응되며 좀더 운율이 살아나서 물 흐르듯 읽히기 때문이죠(편집자에게 교정은 단순히 고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저자에게 제안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가 무슨 생각으로 ‘따라 하다’라고 띄웠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단순히 ‘국어사전에는 ‘따라하다’가 없던데요?’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했다면… (한숨).


“일반인들은 사전이 제공하는 정보의 일방적인 수용자에 머물지 몰라도, 출판편집자들은… 앞으로 만들어질 사전에 담길 정보의 근거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기존 사전에 갇혀 그 정보를 맹종할 게 아니라, 기존 사전을 충분히 참고하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전의 개정 방향을 선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할에 걸맞은 성실성과 예민함, 책임감이 요구되지요.”(『한판 붙자, 맞춤법!』, 54쪽)


앞서 국어사전이란 언중들의 단어 용례를 담아놓은 정보집이라고 했는데요. 그럼 사전을 편찬하는 전문 연구자들은 그 용례를 어디서 찾을까요? 바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출판하는 편집자는 특정 단어를 사용할지 말지, 쓴다면 어떻게 쓸지 더 날카롭고 영민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저자와 독자가 책으로 소통할 때 (눈에 띄지 않게) 중재자 역할을 하는 편집자는 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글을 쓰는 저자도 그걸 읽는 독자도 잘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사전을 찾아보곤 합니다. 편집자가 예민한 시선으로 오늘날의 언어 현실을 포착하여 책에 반영하고 연구자가 그 책을 바탕으로 ‘표준적인’ 말들을 잘 정리한다면, 저자와 독자에게 훨씬 유익한 표준국어대사전이 만들어질 겁니다. 웬만한 독자가 아니고서야 편집자가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편집자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야겠죠. 단순히 책 하나 잘 편집하는 것을 넘어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세상을 ‘편집’하는 사람, 그것이 편집자니까….


변정수, 『한판 붙자, 맞춤법!』, 뿌리와이파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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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 - 스치는 생각은 어떻게 영감이 되는가
이리스 되링.베티나 미텔슈트라스 지음, 김현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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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디오클립 한주 한책 서평단 '시험안끝났다'입니다.)


『발상』은 일상에서 영감을 떠올리는 방법이 적힌 자기계발서다.


'하면 된다'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해도 안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오력해도, 노오오력해도 성공하기 힘들다. 왜 이럴까? 보통 노력이란 선택과 집중의 과정이다. 외부의 어떤 대상 하나에 몰두하여 그것을 집요하게 파는 과정이다. 이러한 노력을 위해 필요한 끈기와 인내는 일차원적 경로를 거치는 작업을 잘 수행하기 위한 덕목이다. 쉽게 말해 '하면' -> '된다'라는 단순한 구조에선 끈기있게 노력하면 성공한다.

 

하지만 오늘날 성공하기 위한 경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냥' 하면 안 되며,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 다차원적 경로를 따라 복잡한 구조를 파헤쳐야 성공한다. 이를 위한 덕목은 끈기가 아닌 '창의성'이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창의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 창의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영감'이 찾아온다. 발상의 순간, 즉흥적으로 나오는 아이디어, 갑자기 뭔가 확실해지는 느낌, 유레카!!!



"우리의 인지는 주변 세계의 자극 중 아주 미미한 부분만이 의식적인 생각으로 침투하도록 필터링한다. 영감을 자주 얻고자 한다면 주의와 관심의 방향을 전환하고 첫눈에 감추어진 것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연마해야 한다." (51쪽)



그런데 영감은 단순한 노오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노력이란 주변 세계의 자극을 필터링하여 주의와 관심을 한 곳으로 몰아넣는 일이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주변 사람들의 잡담, TV 소리, 카톡 알람 등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를 차단하여 문제지나 참고서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런데 이는 영감을 얻는 방식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공상'이다. 나도 공부를 하면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풀리지 않은 어떤 문제가 며칠 후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 덕분에 쉽게 해결된 경험이 있다. 살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이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감을 얻기위해 '노오오오력'이라는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 힘을 좀 풀고 공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 (97쪽)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착각했던) 것 중 하나는, 공상이 '휴식'이라는 생각이다. 한 가지에 집중하여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더니 머리가 아프고 뇌에 과부하가 오는 듯할 때, 우리는 휴식을 위해 공상에 들어가곤 한다. 편안하게 멍~ 때린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이러한 공상 상태에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다만 집중할 때와 공상할 때 뇌의 모드가 바뀐다. 인지과학에서는 공상할 때 뇌의 모드를 '디폴트 모드(Default-Mode,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학자들은 디폴트 모드에서 뇌가 외부 세계의 집중력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스스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석한다. 외부의 자극과 강요에서 벗어나 하염없이 공상하는 사람은 거침없이 자유롭게 연상하기 위해 대용량의 생각을 방출한다. 그리고 인간의 뇌는 디폴트 모드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무수히 다양한 생각들을 결합시킨다." (110쪽)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사고의 고정적인 패턴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롭게 연상해야 한다. 틀을 깨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멍을 때려야 한다. 영감이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발상』은 좋은 자기계발서다. 어떤 틀에 딱 박혀서 '노오력'을 하라고 달달 볶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자. 물론 그분들 말대로 나태해지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건 성공의 기본 조건이기는 하다. 소위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 중에서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길을 헤맨다면, 이 책이 자그마한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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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다 - 뇌과학과 명상, 지성과 영성의 만남
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지음, 임영신 옮김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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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나를 넘다』, 임영신 옮김, 쌤앤파커스, 2017.


(오디오클립 한주한책 서평단 '시험안끝났다'입니다.)


"우리는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


『나를 넘다』를 읽었다. 뇌과학자 볼프와 불교 승려 마티유의 대담집이다. 재미있다. 이 책의 홍보문구는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다. 정말 말 그대로 지성(과학)과 영성(종교)의 만남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볼프와 마티유 두 사람은 인간의 의식, 무의식, 자유의지, 자아 등에 관해 서로의 견해를 풀어놓는다. 과학적 견해와 종교적 견해가 때론 일치하고 때론 충돌한다. 두 사람의 토론을 재밌게 구경하고, 가끔은 그 토론에 직접 참여해 나의 생각을 덧붙이며 책을 읽었다.


마티유는 문학적인 수사를 잘 활용한다. 그의 말은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가끔 그의 말이 너무 두루뭉술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럴 때 볼프는 마티유의 말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과학적 설명을 덧붙이며 때론 반론한다. 덕분에 혼란을 겪지 않고 글을 읽을 수 있다. 반대로 볼프의 말은 명확하지만 전문 용어(뇌과학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일반 독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럴 때 마티유는 볼프의 말을 문학적 은유로 풀어내어 설명하고 종교적 견해를 덧붙인다. 덕분에 어려운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죽이 잘 맞는 커플(?)이다.



1. 종교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오해의 여지가 있어 먼저 말하는데, 나는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에서 조그맣게나마 '종교'를 비호하고 변호하고자 한다. 『나를 넘다』를 읽으며, 특히 그 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제1장 「뇌가 명상을 만났을 때」를 읽으며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만남을 그려낸 작품이다. 과학과 종교를 모순된 대립항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좀 의아할 것이다. 과학과 종교가 만난다고? 음… 창조과학인가? 어떤 사람은, 이 책에 분명 종교적인 내용이 잔뜩 담겨 있음에도, 홍보 문구 들어간 '영성'이란 단어를 이상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나 뭐라나. 마치 이 책에 담긴 과학적인 내용 안에 '종교'의 개념을 섞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다. 종교는 종교, 과학은 과학.


내 경험상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은 '종교' 혹은 '종교적'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미신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무논리'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듯하다. 특히나 종교의 대립항에 과학을 두고, '과학' 혹은 '과학적'이란 말을 신봉하면서 말이다. 마치 '과학적 판단'은 신뢰할 만하고 진리이며, 반대로 '종교적 판단'은 자기 고집이며 억측인 것 마냥 여기기도 한다. 종교가 가진 이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오로지 과학적 연구방법만을 타당한 설명 방식으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종교에 대한 환멸'이다(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35쪽)


이러한 환멸이 나타나는 현상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과학의 발전은 분명 과거 신앙이 누려왔던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과거에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신의 말씀'이라든가 '신이 내려주신 시련' 쯤으로 해석하며 알 수 없는 상태로 두었다. 반면에 오늘날 과학은 그러한 상황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배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제 바닷가의 어부들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나가기 전에 안전을 도모하고 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 신에게 풍어제를 올리거나 하지 않는다(오늘날 열리는 풍어제는 신앙하는 행위이기보다는 옛 문화를 유지하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안전 장비와 질 좋은 그물 등을 준비하며 과학적으로 신뢰할만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상 상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오늘날 신앙심을 바탕으로, '풍어제를 올리지 않으면 신이 진노하여 배가 뒤집힐 수도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판단은 말 그대로 억측이다.


종교에 대한 환멸이 나타나는 데 일부 종교계의 뻘짓(?)도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많이 샜으니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과학이 실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반면, 종교는 그런 실질적인 이득을 주지 못한다는 게 우리나라 많은 사람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인다. 『나를 넘다』에서 두 저자가 '명상'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볼프도 이러한 인식을 조금씩 보여준다.


[볼프] "이 문제에 관해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명상의 부작용입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눈을 감도록 하고, 문제를 풀기보다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최상의 전략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33쪽)


명상이란 불교에서의 정신수련으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방식을 바꾸어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20쪽). 좀 더 구체적으로 명상이란 "우리의 주의력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맑게 깨어 있는 의식을 응시"하며 "산만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71쪽).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한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욕구, 불안 혹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이며 우리는 "이 고통과 하나"가 된다. 결국 "이 고통들은 우리의 정신을 온통 사로잡아" 우리를 산만하게 만든다(138쪽). 명상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볼프의 말은, 그러한 명상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고 완곡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를테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는~ 행복합니다! 나~ 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 행복합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현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나의 정신을 수련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명상이란 결국 현실의 문제를 앞에 두고서 그저 "눈을 감도록"하는 일이 아닌가. 볼프는 이를 "명상의 부작용"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단연코, 이를 '오해'로 규정한다. 명상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종교적 성찰이다. 그리고 종교적 성찰은 분명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생각해보자. 현실의 어떤 문제는 때로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준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외부의 존재(문제)를 원망하며 그것을 고치거나 아예 없애려고 시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존재의 구조와 성질을 파악해야 하고, 이때 과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이 빠뜨리는 과정이 하나 있다. 바로 '나는 왜 그것으로부터 고통을 느끼는가?'라고 성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이 바로 종교적 성찰이다.


보통 우리는 어떤 문제를 대하며 '그것은 왜 이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할까!' 원망하기는 해도 정작 '나는 왜 그것을 고통스럽게 느낄까?' 성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계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나는 왜?'라고 묻는 작업은 '나'를 중심에 두고 내면을 깊게 파고들면서 나와 외부(세상, 세계)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문제 해결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즉 문제 해결의 원동력을 내면에서 끌어내지 못한 채 그저 외부의 대상만을 원망하게 된다. 쉽게 말해 '남탓'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20쪽) 행복이나 고통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을 해석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의 정신'임을 잊어선 안 된다. 명상은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앞에 두고서 그저 "눈을 감도록"하는 일이 아니며,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정신수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러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신이여,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의지를,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샤를 페팽, 『실패의 미덕』, 74쪽)


이러한 기도는 명상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성찰이다.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란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파악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언제나 남탓만 하는 것을 넘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할 수 있는 존재, 즉 '어른'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구절절 말했지만, 결국 결론은 이거다. '너무 종교를 미워하지 마세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과학적 탐구도 필요하고 종교적 성찰도 필요하니까. 사실 내가 맨 앞에서 "나는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세상에 종교가 없는 사람은 없다. 종교란 쉽게 말해서 우리의 믿음 체계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제외하면 종교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 반드시 있다. 나의 경우 단지 그것이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특정 종교'의 명칭으로 불리지 않을 뿐이다. 만약 이름을 붙인다면 '시노부교'라고 붙일 거다!


사실 『나를 넘다』의 두 저자는 과학과 종교를 모순된 대립항으로 설정한 사람들이 가질 의아함을 의식했는지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서양의 과학과 불교 사이의 대화는 흔히 과학과 종교의 까다로운 논쟁으로 통하지만, 서구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일종의 '정신과학'이며, 따라서 불교 승려(마티유)와 신경과학자(볼프)가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이다(11쪽).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며, 이 책에 충분히 담긴 종교적인 색채를 첫머리에서부터 애써 외면하려는 듯한 서술은 나로서는 조금 거슬린다. 종교가 그렇게 나쁜 게 아니라니께. 종교적 색채를 거부하지 말라고. 헤이~ 추라이! 츄라이!


종교를 너모 미워하지 마세영 ㅠㅠ

 


2. 이 책이 어려운 이유

『나를 넘다』는 좀 읽기 어려운 책이다. '나만 읽기 어려운가?' 생각했는데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읽기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내 지식이 부족한 탓만은 아닌 듯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추천의 글에서도 "마치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처럼" 읽기 까다로운 책이라고 한다(8쪽). 이 책은 특히 뇌과학 관련 지식이 없으면 더욱 읽기 어렵다. '대뇌섬(insula)'이라든가 '띠이랑(대상회) 피질'이라든가 듣도보도 못한 단어가 속속들이 나온다. 몇몇 단어들은 역자주를 붙여 설명해두었지만, 역시 모든 단어에 역자주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많은 뇌과학 용어는 독자가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책이 꼭 나쁜 책인 것만은 아니다. 찬찬히 공부하면서 읽을 수도 있으니까. 방금 말한 '어려운 단어'의 문제는 꼭 책의 '단점'이라고 지적할 만한 사항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지나치게 어렵다.' 비단 단어의 문제만이 아닌 더 큰 문제가 원활한 독해를 방해한다. 이 책은 논지전개가 뒤죽박죽인 부분이 많다. 


다음 내용을 보자.


[볼프]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 순간 이루어지는 여러 변화들이 이어진 하나의 흐름입니다. 뇌는 부단히 받아들인 신호들에 대한 반응으로, 가장 그럴듯한 혹은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나 해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해답으로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전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변화를 의식합니다. 따라서 뇌는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90~91쪽)


여기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나 해답"을 찾는다는 건, 우리의 뇌가 어떠한 상황에서 받아들인 신호를 바탕으로 그 상황을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해석한다는 뜻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려보자. 지금 내가 인용한 볼프의 말은 이 문구를 뇌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의 마지막 줄을 읽으며 의문이 들었다. "뇌는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어떤 해석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왜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하지? 이 문장 바로 앞에 "우리는 이 변화를 의식합니다. 따라서…"라고 언급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이 의문의 해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한 이후에 나온다.


[볼프] "따라서 뇌는 이처럼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평가시스템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얻어진 결과에 대해 언제 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92쪽)


즉, 얻어진 결과(해석작업의 결과)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평가하고 그 해석작업을 '그만두기 위해서' 우리는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생각에 빠질 테니까. 무한히 사고회로에 갇히지 않고 어느 순간 '생각을 다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을 파악해야 한다. 생각을 다 했다는 건 "갑작스러운 전개"에 따른 깨달음으로, 이 깨달음 이후 우리는 만족감(긍정적인 상태)을 느낀다. "유레카!"라는 깨달음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여기서 "활성화"라는 단어는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 나온 "활동"과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확인해야 한다.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의 구분은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두 단어가 같은 의미라는 근거는? 바로 내가 인용한 부분의 첫 번째 문장에 나온다.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은 즉, '뇌의 활동이란 신경세포의 활성화'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설명이 구구절절했는데, 본 내용이 어렵다 보니 이 설명도 좀 난해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볼프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

2) 뇌는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참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한 후)

3) 뇌는 이처럼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평가시스템을 갖고 있어야 한다.

4)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독자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2번 문장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려면 4번 문장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4번 문장은 바로 앞에 있는 3번 문장을 설명해준다. 사실 2번 문장과 3번 문장은 같은 말이다. 따라서 4번 문장은 3번 문장을 설명하지만 동시에 2번도 설명해준다. 2번 문장과 3번 문장 사이에 '한참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해서 두 문장이 서로 같다는 게 바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번을 전제로 생각하면 2번과 3번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지럽지 않은가? 독자는 순서대로 1번 2번 그리고 3번 4번 문장을 읽는데,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책을 순차적으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며, 여기저기 왔다갔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되돌아갔다가 해야 한다. 말하는 개념 자체도 쉽지만은 않은데 하필이면 내용 전개도 이렇게 뒤죽박죽이니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이렇게 뒤죽박죽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대화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두 사람이 서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한 사람이 일관되게 자신의 논지를 펼치지 못한다. 독자는 '두 사람'의 대화 흐름을 따라가며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독자는 이 책의 내용을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나 명상이란 걸 딱히 해본 경험도 없고 뇌과학 지식도 별로 없는 나에게는 더욱 어려웠다.


어지럽다 어지러워


뒤죽박죽 전개는 심지어 한 문장 안에서도 나타난다.


[볼프]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해답에 도달한 것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하는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과 동시성일 것입니다." (94쪽)


혹시 이 문장이 바로 이해가 되는지?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읽고 나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한 문장에 관형어(-있는, -하는 -적인)가 너무 많아 어지럽다. 게다가 논지 전개도 뒤죽박죽이니 혼란이 증가한다.


이 문장은 여러 문장이 섞여 복합적으로 구성되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해답에 도달한다.

2) 이를 평가시스템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3) (이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일관성과 동시성이다.


볼프의 말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위의 1번과 3번에 둘 다 "일관성"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1번의 "일관성"과 3번의 "일관성"은 같은 말이다. 그런데 앞서 한 문장으로 묶인 것에서 "일관성"에 관한 부분만 추려보면 이렇다.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이다.' 마치 순환논증의 오류인 것처럼 보인다.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는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볼프의 말을 이해하려면 "일관성"을 키워드로 1번과 3번을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2번이 들어와서 이 둘을 구분해버리니 혼란이 온다.


우리는 앞에서, 뇌는 해석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즉 뇌는 서로 다른 활성화 상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위의 1번 문장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결국, 일관성(그리고 동시성) 있는 상태란 활성화 상태의 일종이고, 우리의 뇌는 이를 해석작업의 '결과'로 구분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때,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어 '긍정적이라는 평가'에 따라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유레카!"의 희열을 안겨준다.


정리하자면, 처음에 본 하나의 문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1) (뇌가) 전체적으로 일관성(그리고 동시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면 해답(해석작업의 결과)에 도달한다.

3) (일관성·동시성 있는)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된다.

2) 활성화된 평가시스템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문장 번호를 잘 보자. 독자는 한 문장을 1번 2번 3번 순서로 읽는데, 논지를 이해하려면 1번 3번 2번 순서로 파악해야 한다. 한 문장을 순서대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고, 한 번 읽었다가 되돌아가서 또다시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어지럽다. 이러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이렇게 한 문장에서도 뒤죽박죽이 나타나는 원인은 번역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우리말 어순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다. 원서를 파악하지 못해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아마도 이 책의 옮긴이는 두 저자의 대화를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직역투로) 옮기려 한 듯하다. 외국어 문장의 논지 전개 순서는 우리말 문장과는 사뭇 다를 수 있는데, 옮긴이가 이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의역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려운 책이 꼭 나쁜 책은 아니다. 매끄럽지 못한 논지 전개라고 해도, 여러 번 곱씹어서 읽으면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으… 사실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그냥저냥 넘어가면서 책을 읽는데, 이렇게 서평을 쓰면서 하나하나 분석하는 작업을 하니 너무 힘들다.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로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수고로운 과정이다. 물론 그런 만큼, 이 책을 다 읽어냈을 때 보상은 확실하다. 영성의 맑은 공기와 지성의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가끔은 이런 어려운 책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가끔은 높은 산에도 올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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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마음 - 김응교 인문여행에세이, 2018 세종도서 교앙부분 타산지석S 시리즈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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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교 지음, 『일본적 마음』, 책읽는고양이, 2017.


가끔 가마쿠라의 맛차가 그립고, 시타마치에서 살 때의 다다미방 건초냄새가 코끝에 어른거리곤 한다. 그 그윽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21쪽)


(오디오클립 한주 한책 서평단 '시험안끝났다'입니다.)


오타가 없는 책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저자도 편집자도 다 사람이다. 심지어 이 서평에도 어디엔가 오타가 있을 것이다. 발견한다면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내용 이해에 전혀 지장이 없다면, 책에 오타 조금 있는 거야 독자 입장에서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평소에 책에서 오타를 발견할 때마다, 편집자를 책망하는 마음이 들기보다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잘 만든 책에서 '옥에 티'와 같은 그 오타. 아이고~ 편집자가 조금만 더 집중해서 책을 만들었으면 더 완벽한 책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다! ……. 그런데 이상하다. 이 책 『일본적 마음』을 읽으며 오타를 발견했을 땐 그런 안타까움을 잘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편집자를 책망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왜냐고? 이 책은 애초에 '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먼저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참 좋다. 김응교 시인의 인문여행에세이. 저자의 글은 '인문서'와 '여행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단순한 여행 일지처럼 '어디어디에 놀러 가니 무엇무엇이 좋았다'라는 식으로만 글을 쓰지 않고, 저자는 더 나아가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한다. 이를테면 도쿄 아사쿠라 거리에서 열리는 산쟈 마쓰리(축제)를 탐방하면서, 그곳 사람들이 왜 이렇게 그 축제에 열광하는지 분석하여 "어떤 동질성의 힘"이라는 종교적인 함의를 유추한다. 그러면서도 서술이 지나치게 분석적거나 딱딱하지 않다. 내용이 어렵지 않고 표현은 부드럽다. 역시 '시인답다'고 할 수 있는 문학적 표현들이 인상적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일본적 마음』은, 글은 좋지만 책이 못났다. 여기서 "못났다"라는 건 단순히 나의 기호에 따른 판단이 아니다. 이러한 판단은 '이 책이 독자를 얼마나 배려하지 못했는가?'라는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못난 부분이 무엇인지, 중대한 문제를 몇 가지 꼽아본다.



1. 펼침면 표제면과 그곳에 얹힌 그림

『일본적 마음』 1부 표제면.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미리보기


이 책은 크게 네 부로 나뉜다. 1예술, 2독서, 3사무라이, 4야스쿠니. 표제면(도비라, )이란 본문에서 이 네 가지 부를 구분해주는 면이다. 각 부가 시작하는 면이다. 위 사진은 1예술이 시작하는 표제면이다. 책을 쫙 펼쳤을 때의 좌우 양쪽 면을 다 사용하여 표제면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좌우 양쪽 면을 다 사용한 경우를 펼침면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표제면은 오른쪽 면 한쪽만을 사용하고 왼쪽은 비워두는 편이지만, 이 책은 모든 부의 표제면에 펼침면을 시도했다. 아마도 커다란 그림을 한 면에만 담을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러한 시도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표제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제목'이다. 표제면이라는 커다란 구분 이후에 나올 본문 내용을 압축하여 한 단어로 설명하는 제목. 표제면에서는 단연 이 제목이 돋보여야 한다. 그 외에 그림이나 글은 부차적인 요소다. 그런데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제목의 가독성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펼침면에 얹은 그림 때문이다. 물론 그림과 제목 글자가 완전히 겹치지 않도록 신경을 썼지만, 그럼에도 글자 주변에 파도를 표현한 선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경우 '디자인이 글자를 침범했다'고 말한다. 편집자는 디자인이 침범하지 못하는 글자 고유의 영역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오른쪽 페이지에서처럼 글자 주변에 박스를 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그림과 글자를 분리했어야만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림을 펼침면으로 얹었다는 점이다. 책은 여러 장의 낱장 종이를 책등 한 곳으로 묶어낸 물건이다. 따라서 책을 펼치면 가운데 책등 부분을 중심으로 종이가 둥글게 말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책에 펼침면으로 그림을 얹으면 그림의 가운데 부분이 심하게 왜곡되어 보이게 된다. 위 그림처럼 그림이 좌우 비대칭이면 그나마 이 왜곡을 신경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3사무라이4야스쿠니의 표제면 그림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인 그림이어서 이 왜곡이 심하게 거슬린다. 책을 만들 때 편집자가 과연 이러한 왜곡을 신경썼는지 의문이다. 신경을 썼다면 표제면을 아예 펼침면으로 하지 않든가, 그림을 바꾸든가, 아니면 펼침성이 좋은 제본 방식을 사용했어야 한다. 아래 사진에 나오는 책처럼 말이다.


펼침성이 좋은 제본. 출처: 노바소울코리아


표제면의 문제는 아니나 여담으로 하나 더 지적하자면, 이 책의 본문 138~139쪽에도 펼침면으로 사진을 얹은 부분이 있다. 모든 페이지가 벚꽃 사진으로 꽉 채워져 보기 좋고 예쁘다. 그런데 문제는, 이 펼침면이 앞뒤 137쪽과 140쪽의 글을 뚝 끊어버린다는 점이다. 심지어 앞뒤로 끊어진 부분의 글은 일본 구 육군 보병가 가사이다. 노래 가사인 만큼 마치 시를 읽듯 천천히 그 뜻을 음미하면서 읽는데, 난데없이 커다란 사진이 펼침면을 가득 채워서 독서의 흐름을 방해한다. 꼭 이렇게 사진을 채워야만 속이 후련했는지 의문이다.


많은 가지에 가득 찬 사쿠라와 군복 깃의 색깔

사쿠라는 요시노 산에 피고 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분다.

일본 남아로 태어났으면

싸우는 전쟁터에서 사쿠라처럼 져라

―일본 구 육군 보병가


2. 한자 병기의 문제, 일러두기가 없음

많은 책에는 '일러두기'가 있다. 독자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참고하라고 편집자는 일러두기를 써 놓는다. 즉 일러두기는 편집자가 독자를 배려하는 글이다. 본문이 한글맞춤법을 따랐는지, 본문에 외래어가 많이 나온다면 외래어표기법을 따랐는지, 외국어 원어 병기가 많다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각주를 달았다면 그것은 저자의 글인지 번역자의 글인지 편집자의 글인지, 약물 기호가 많다면 그 기호들의 표기 원칙은 무엇인지. 이런저런 내용을 써주면서 독자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하는 글이 바로 일러두기이다.

물론 일러두기가 없는 책도 많다. 일러두기가 없다면 단적으로 두 가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일러두기는 필요 없다', '편집자가 독자를 배려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일본적 마음』은 어떨까? 나는 이 책에 일러두기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책에는 한자 병기가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의 독특한 면은 일본어에 대응하는 한자와 우리말에 대응하는 한자를 구분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일본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쓰고 옆에는 대괄호 '[]'를 써서 "[宮崎駿]"라고 쓴다. 한국인 신윤복의 이름을 쓰고 옆에는 소괄호 '()'를 써서 "(申潤福)"이라고 쓴다. 이렇게 일본어에 대응하는 한자는 대괄호를 쓰고 우리말에 대응하는 한자는 소괄호를 써서 병기한다. 일본과 우리나라가 둘 다 한자문화권에 속하므로 일본어와 한국어가 구분이 안 될 수도 있음을 고려한 듯하다. 여기서는 편집자가 맞춤법 원칙을 나름대로 개편하여 적용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한자 병기에서 소괄호와 대괄호 구분의 원칙은 이렇다. 이를테면 '인간'이라는 한자어에 한자 '人間'을 병기하려고 한다면 소괄호를 써서 '인간(人間)'이라고 쓴다. 괄호 밖의 한글을 읽는 발음과 괄호 안의 한자를 (한국 사람이) 읽는 발음이 같다. 둘 다 "인간"이라고 읽는다. 반면에 '사람'이라는 고유어에 한자 '人間'을 병기한다면 대괄호를 써서 '사람[人間]'이라고 써야 한다. 한글맞춤법(2017-12호) 제7장에 나오는 대괄호 사용 원칙이다. 여기서는 괄호 안과 밖의 글자를 읽는 발음이 다르다. 앞서 본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라는 것도 괄호 안의 한자를 읽으면 "궁기준"이 된다. 이 책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응하는 한자를 대괄호를 사용하여 병기한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원칙을 그대로 준수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시도는 좋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면 그러한 시도를 했음을 일러두기에 적어두어야 했다는 점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으나, 최소한 "일본어는 [ ]로 표기했으며 우리말 한자는 ( )로 표기했습니다."라는 말 정도는 써주어야 독자에게 혼란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책에는 소괄호와 대괄호 구분에 실수한 부분이 많아서 더욱 혼란스럽다.

한자 표기와 관련해서 근본적으로 왜 구분을 했는지도 의문이다. 본문을 보면 "호쿠사이 만화(北齋漫畵)"처럼 일본어와 우리말이 동시에 있는 경우 이에 대응하는 한자를 그냥 소괄호로 통일하여 표기하였고, "맛차(抹茶 · 가루차)"처럼 일본어만 있더라도 거기에 우리말로 설명을 덧붙인다면 역시 그냥 소괄호를 사용했다. 이럴 거면 그냥 다 통일해서 소괄호를 쓰지 왜 굳이 따로 구분하여 대괄호를 썼을까.

그리고 "엔가쿠지[円覺寺]"처럼 일본어에 대괄호를 써서 한자를 병기할 때, 이 한자는 '고유어에 대응하는 한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어(엔가쿠지)에 대응하는 '한국식 한자'이다. 일본 인문여행에세이라면 '일본식 한자'를 쓰지 왜 한국식 한자를 썼을까. 일본식 한자는 신자체(新字体)라고 하여 한자를 약식으로 간단하게 쓰는, 간체자와 비슷한 것이다. "엔가쿠지[円覺寺]"를 보면 가운데 한자 '覺'은 '깨달을 각'자 인데, 일본식으로는 '覚'라고 쓴다. 만약 일본식 한자로 쓴다면 대괄호를 쓰지 말고 소괄호를 써서 '엔가쿠지(円覚寺)'라고 써야 한다.


가운데 한자가 ''이 아니라 ''이다. 출처: http://www.engakuji.or.jp



3. 쪽수 표기 위치

이 책은 쪽수를 각 쪽의 안쪽(책등에 가까운 쪽)에 표기한다. 사실 내가 이 책을 펼쳐서 가장 먼저 발견한 문제점이다. 보통 쪽수는 각 쪽의 바깥쪽(책등에서 먼 쪽)에 표기한다. 그런데 요즈음 나오는 많은 책이 이렇게 쪽수를 안쪽에 표기하곤 한다. 이러한 표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독자를 배려한다면 쪽수는 바깥쪽에 표기해야 한다.


『일본적 마음』본문. 쪽수가 안쪽에 있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미리보기


왜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표기해야 하는가? 우선 본질을 이해하자. 쪽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책에 쪽수를 표기할까? 쪽수란 독자가 책의 내용을 참고·참조·검색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이 책에서 하이쿠(일본 시조)를 소개한 부분이 어디지?'라고 생각하며 그 부분을 찾고자 할 때, '아, 78쪽에 있었지'라고 쪽수를 기억하며 찾아간다.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할 때도 당연히 쪽수를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본질과 더불어 독자가 책을 읽는 자세도 고려해야 한다. 방금 든 예시에서처럼 독자가 책을 첫 장부터 찬찬히 읽어나가지 않고 어떤 특정 부분을 찾고자 할 때는, 책을 구태여 다 펴지 않게 된다.


쪽수가 잘 안 보인다.


이러한 자세를 상정한다면, 쪽수를 안쪽에 표기할 때의 문제점이 바로 보인다. 바깥쪽에 표기했다면 바로 볼 수 있는 쪽수가, 안쪽에 표기할 경우 보이지 않게 된다. 책의 물성,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낱장의 종이를 책등 가운데로 묶어내어 종이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다는 특성 때문이다. 그냥 쫙 펴서 보면 되지 왜 이런 것 가지고 트집을 잡냐고? 쫙 펴서 보지 않아도 될 쪽수를 굳이 쫙 펴서 봐야만 하도록 책을 만든 것이 바로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의 독서 자세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해보자. 이 책은 과연 쫙 펴서 읽기에 적합한 책인가? 나는 독서 자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책상 앞에 차분히 앉아 읽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조금씩 읽기.' 전자의 경우는 학술서, 전공서, 사전 등 담은 정보가 많고 심도 있게 공부해야 하는 책을 읽는 자세이다. 이러한 책들은 책상에 두고 읽는 만큼 쫙 펴서 읽어야 하고 책이 저절로 잘 펴져야 한다. 이러한 책들은 대체로 사람이 손으로 받치거나 고정하며 읽기에는 무겁고 크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교양서, 여행서, 만화책 등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드는 책을 읽는 자세이다. 이러한 책들은 쫙 펴서 읽기에 적합하지 않다. 두 손 혹은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보는 이런 책들은 오히려 쫙 펴지면 읽기에 방해가 된다.

『일본적 마음』은 전자와 후자 중 어디에 속하는가? 당연히 후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조금씩 읽기'에 적합한 책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의 분야는 '여행에세이'다. 말 그대로 여행을 다니면서도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수필이다. 그리고 이 책은 아주 아담하다. 내 코트 주머니에도 쏙 들어가며 들고 다니기 편하다. 이 책은 책상 앞에 앉아 찬찬히 공부하며 읽는 책이 아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책의 제본 방식도 쫙 펴지지 않는 제본(일반무선제본)이다.

이 책이 후자의 경우에 속함을 보여주는 근거는 이렇게 다양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쪽수의 위치에 신경을 써야 했다. 쫙 펴서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책을 억지로 쫙 펴서 읽도록 만드는 편집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편집자가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지는 않은 듯하다. 자세히 보면 이 책의 안쪽 여백이 바깥쪽 여백보다 넓다. 이 책이 쫙 펴서 읽기에 적합하지 않고 종이가 안쪽으로 더 많이 말려 들어간다는 점을 고려한 편집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을까?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한 것일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의문만 남는다.


지금까지 여러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 외에도 문제는 더 있다. 오타가 너무 많은 점, 한자 표기가 과하다는 점, 원어 병기가 과하다는 점, 작은따옴표 사용이 과하며 전각으로 썼다는 점, 출처 표기가 이상하다는 점, 글자 크기가 너무 작다는 점……. 나는 고양이를 참 좋아하는 사이버 집사인데 '책읽는고양이'는 좀 싫어질 듯…?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사실관계의 오류다.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정확한 사실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이 책에는 몇몇 부분 잘못된 정보가 았다. 그 부분은 내가 출판사에 따로 문의했다. 과연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 다음에 판단하도록 하자. 이 책을 아직 안 읽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고 그 오류를 발견해보길 바란다. 그러면서 책이 언제나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음을 깨닫길 바란다.

이 책에 관해 계속 안 좋은 소리만 해서 미안하다. 저자 김응교 선생님께 미안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정말 좋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일본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일본적 마음』은 정말 좋은 글이자 못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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