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 내 삶에 돌이키고 싶은 순간마다 필요했던 철학 솔루션
이관호 지음 / 웨일북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철학책 읽는다고 허세부리지 말 것


이관호,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웨일북, 2020.


저는 ‘철학은 우리 삶에 유용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물론 철학 개념이나 철학자의 생각법을 공부하여 쓸모있게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저 유용한지 유용하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학문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즉, 쓸모없지만 가치가 있는 철학도 있습니다). 철학이 삶에 유용하다고 말하는 건,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만 일부러 다른 사실(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숨김으로써 거짓을 말하는 걸로 보이기도 합니다(거짓말이 아닌 거짓… 말. 진실을 얘기하지만 모든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음으로써 상대가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화법).


곧 있으면 추석이죠. 만약 철학을 전공했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이런 말을 날릴 지도 모릅니다. “그거 배워서 어디다 써먹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꼰대짓에 대항하여 철학의 쓸모를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애쓰는데요. 참… 안쓰럽습니다. 차라리 펀쿨섹좌 고이즈미 신지로처럼 당당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써먹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철학을 하기 때문에 철학을 전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철학이니까….”


저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중에는 철학의 쓸모를 조명하려는 책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에서 몇몇 책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단순히 자기 주장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철학 개념을 사용하고(허세를 부리고), 그러면서 그 개념을 왜곡시켜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며, 더 나아가 그저 ‘쉬운 철학책’을 쓴다는 미명 아래 더 사려 깊은 고민과 분석이 필요한 문제들을 너무 가볍게 다루기도 합니다. 1절만 하지, 2절, 3절로도 모자라 아예 뇌절을 해버리는 거죠(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만,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가 딱 그런 책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이 좋았던 이유는 저자가 그렇게 뇌절하지 않고 차분하게 글을 풀어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후회가 가득한 삶을 살아왔을 텐데요. 프롤로그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건네는 저자의 말에 살짝쿵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저는 심성이 뒤틀려서 그런지 ‘위로는 고맙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내 삶은 잘못된 거 같은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요.


“후회.


굳이 이 책을 잡고 펼치게 된 인연은 이 감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후회스럽더라도 그 과거는 당신의 탓이 아니고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주변 지인들을 냉정히 돌아보자. 특별히 잘못된 누군가가 보이는가? 남들이 당신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삶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당신 자신밖에 없다.


오히려 지금껏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음에, 미숙함으로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났음에, 수모와 서러움을 견뎌냈음에, 그 과정에서 흘려야 마땅했을 눈물을 참았음에 이 말을 건네주고 싶다.” (6쪽)


굳이 이 책의 단점을 꼽자면 이렇습니다. 이미 이와 비슷한 철학책이 너무 많다는 것(그래서 저는 좀 지루했습니다. 중간중간 저자 고유의 경험이 서술되어 지루함이 심하진 않았지만), 실제로 삶을 고쳐 쓰는 데에 유용한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진 않는다는 것(뭐, 철학이 반드시 쓸모있지는 않으니까요), 중간중간 좀더 깊게 얘기할 만한 주제들이 너무 짧게 다뤄졌다는 것(개인적으로 반박하고 싶은 부분도 조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철학 입문서들을 여럿 읽어봤고, 자기계발을 위해 명확한 도움이 필요하며, 삶의 문제들을 더 심층적으로 고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그닥 ‘유용’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단점을 쓰면서 글을 마무리하려니까 영~ 기분이 거시기하네요. 이 책 좋은 책입니다(급 포장…. 이 리뷰는 웨일북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이 정도면 앞광고 제대로 했다).


#한줄평 마~ 마~ 무난무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철학책



2. 국어사전을 너무 믿지 마세요


저자의 글 내용이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서, 편집자의 관점으로 이 ‘책’을 보면 군데군데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차례 페이지 디자인은 가독성이 떨어졌고, 동양 철학자의 문헌을 인용할 때는 번역문과 함께 원문(한문)도 적었는데 서양 철학자를 인용할 때는 원문(영어든 독일어든)이 없었고, 중간중간 ‘것’이 너무 많이 쓰여서 문장이 깔끔하지 않고…. 딱히 중대한 결함은 아니므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적하기는 좀 그렇고, 짚고 넘어갈 만한 지점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집 아이와 함께하는 취미 활동이 있다. 시를 낭송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것. 교육 차원에서 시도했는데 내가 선창하고 아이가 따라 하다 보니 덩달아 낭송에 참여하게 됐다.”


문장에 오탈자가 있진 않습니다. 저는 단지 여기서 왜 ‘따라 하다’에 띄어쓰기가 되어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에겐 ‘따라하다’라고 한 단어로 쓰는 게 더 자연스럽거든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라하다’라는 단어가 실리지 않았으니까 띄운 걸까요? 국립국어원에서는 ‘따르다’와 ‘하다’가 각각의 단어이므로 띄어 적는다고 하네요.


어… 그럼 ‘따라가다’는 어떤가요? 이건 한 단어로 인정되어 사전에도 실려 있습니다. 엥? ‘따르다’와 ‘가다’도 각각의 단어일 텐데 왜 여기선 붙이죠? 찾아보니 ‘따라오다’도 한 단어인데요? ‘따라붙다’도 그렇고! ‘따라잡다’는 또 어떻게 설명하시려고?!


여기서 ‘어휴, 한국어 띄어쓰기는 너무 어려워!’라고 생각하면 하수입니다. 띄어쓰기 원칙은 의외로(?) 간단한데요. ‘은/는, 을/를’ 같은 조사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그냥 띄우면 됩니다. 문제는 어떤 말이 과연 한 단어인지 아닌지 여부죠(‘따라하다’는 한 단어고 ‘따라 하다’는 두 단어). 답을 찾기 위해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는 건 좋지만, 사전이 모든 답을 알려주리라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사전은 표준어 규정집이 아닙니다. 붙여 쓴 ‘따라가다’는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니까 맞는 말, ‘따라하다’는 사전에 없으니까 틀린 말(띄어 적어야 하는 말)이 되진 않습니다. 국어사전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대중, 즉 언중들의 단어 용례를 담아놓은 정보집입니다(말 그대로 ‘사전’이죠). 결국 한 단어인지 두 단어인지 결정하는 건 한국어 사용자인 우리들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근본을 따져보죠. 말이란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내 생각에 ‘따라하다’를 한 단어로 보는 게 자연스러우며 내 말을 듣는 상대방도 그걸 자연스럽게 느낄 것으로 판단되면(그래서 소통에 지장이 안 생긴다면), 띄우기보다는 붙여 써야 합니다. 진정으로 어려워해야 할 대상은 한낱 띄어쓰기가 아닙니다. 과연 내가 자연스럽다고 느낀 표현을 남도 똑같이 느낄까요? ‘어휴,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는 너무 어려워!’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저라면 위 문장을 ‘내가 선창하고 아이가 따라하다 보니’라고 교정했을 겁니다. ‘내가’라는 표현이 ‘아이가’에 대응되고 ‘선창하고’가 ‘따라하다’에 대응되며 좀더 운율이 살아나서 물 흐르듯 읽히기 때문이죠(편집자에게 교정은 단순히 고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저자에게 제안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가 무슨 생각으로 ‘따라 하다’라고 띄웠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단순히 ‘국어사전에는 ‘따라하다’가 없던데요?’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했다면… (한숨).


“일반인들은 사전이 제공하는 정보의 일방적인 수용자에 머물지 몰라도, 출판편집자들은… 앞으로 만들어질 사전에 담길 정보의 근거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기존 사전에 갇혀 그 정보를 맹종할 게 아니라, 기존 사전을 충분히 참고하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전의 개정 방향을 선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할에 걸맞은 성실성과 예민함, 책임감이 요구되지요.”(『한판 붙자, 맞춤법!』, 54쪽)


앞서 국어사전이란 언중들의 단어 용례를 담아놓은 정보집이라고 했는데요. 그럼 사전을 편찬하는 전문 연구자들은 그 용례를 어디서 찾을까요? 바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출판하는 편집자는 특정 단어를 사용할지 말지, 쓴다면 어떻게 쓸지 더 날카롭고 영민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저자와 독자가 책으로 소통할 때 (눈에 띄지 않게) 중재자 역할을 하는 편집자는 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글을 쓰는 저자도 그걸 읽는 독자도 잘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사전을 찾아보곤 합니다. 편집자가 예민한 시선으로 오늘날의 언어 현실을 포착하여 책에 반영하고 연구자가 그 책을 바탕으로 ‘표준적인’ 말들을 잘 정리한다면, 저자와 독자에게 훨씬 유익한 표준국어대사전이 만들어질 겁니다. 웬만한 독자가 아니고서야 편집자가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편집자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야겠죠. 단순히 책 하나 잘 편집하는 것을 넘어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세상을 ‘편집’하는 사람, 그것이 편집자니까….


변정수, 『한판 붙자, 맞춤법!』, 뿌리와이파리, 20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하는 몸 - 새겨진 기억은 어떻게 신체를 작동시키는가
이토 아사 지음, 김경원 옮김 / 현암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을 감거나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더군요. ˝시각장애인은 세상을 이렇게 ‘깜깜한 것‘으로 볼까?˝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실은 세상을 얼마나 ‘다채롭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상 - 스치는 생각은 어떻게 영감이 되는가
이리스 되링.베티나 미텔슈트라스 지음, 김현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오디오클립 한주 한책 서평단 '시험안끝났다'입니다.)


『발상』은 일상에서 영감을 떠올리는 방법이 적힌 자기계발서다.


'하면 된다'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해도 안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오력해도, 노오오력해도 성공하기 힘들다. 왜 이럴까? 보통 노력이란 선택과 집중의 과정이다. 외부의 어떤 대상 하나에 몰두하여 그것을 집요하게 파는 과정이다. 이러한 노력을 위해 필요한 끈기와 인내는 일차원적 경로를 거치는 작업을 잘 수행하기 위한 덕목이다. 쉽게 말해 '하면' -> '된다'라는 단순한 구조에선 끈기있게 노력하면 성공한다.

 

하지만 오늘날 성공하기 위한 경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냥' 하면 안 되며,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 다차원적 경로를 따라 복잡한 구조를 파헤쳐야 성공한다. 이를 위한 덕목은 끈기가 아닌 '창의성'이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창의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 창의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영감'이 찾아온다. 발상의 순간, 즉흥적으로 나오는 아이디어, 갑자기 뭔가 확실해지는 느낌, 유레카!!!



"우리의 인지는 주변 세계의 자극 중 아주 미미한 부분만이 의식적인 생각으로 침투하도록 필터링한다. 영감을 자주 얻고자 한다면 주의와 관심의 방향을 전환하고 첫눈에 감추어진 것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연마해야 한다." (51쪽)



그런데 영감은 단순한 노오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노력이란 주변 세계의 자극을 필터링하여 주의와 관심을 한 곳으로 몰아넣는 일이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주변 사람들의 잡담, TV 소리, 카톡 알람 등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를 차단하여 문제지나 참고서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런데 이는 영감을 얻는 방식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공상'이다. 나도 공부를 하면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풀리지 않은 어떤 문제가 며칠 후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 덕분에 쉽게 해결된 경험이 있다. 살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이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감을 얻기위해 '노오오오력'이라는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 힘을 좀 풀고 공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 (97쪽)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착각했던) 것 중 하나는, 공상이 '휴식'이라는 생각이다. 한 가지에 집중하여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더니 머리가 아프고 뇌에 과부하가 오는 듯할 때, 우리는 휴식을 위해 공상에 들어가곤 한다. 편안하게 멍~ 때린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이러한 공상 상태에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다만 집중할 때와 공상할 때 뇌의 모드가 바뀐다. 인지과학에서는 공상할 때 뇌의 모드를 '디폴트 모드(Default-Mode,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학자들은 디폴트 모드에서 뇌가 외부 세계의 집중력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스스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석한다. 외부의 자극과 강요에서 벗어나 하염없이 공상하는 사람은 거침없이 자유롭게 연상하기 위해 대용량의 생각을 방출한다. 그리고 인간의 뇌는 디폴트 모드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무수히 다양한 생각들을 결합시킨다." (110쪽)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사고의 고정적인 패턴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롭게 연상해야 한다. 틀을 깨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멍을 때려야 한다. 영감이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발상』은 좋은 자기계발서다. 어떤 틀에 딱 박혀서 '노오력'을 하라고 달달 볶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자. 물론 그분들 말대로 나태해지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건 성공의 기본 조건이기는 하다. 소위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 중에서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길을 헤맨다면, 이 책이 자그마한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적 마음 - 김응교 인문여행에세이, 2018 세종도서 교앙부분 타산지석S 시리즈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넘다 - 뇌과학과 명상, 지성과 영성의 만남
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지음, 임영신 옮김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나를 넘다』, 임영신 옮김, 쌤앤파커스, 2017.


(오디오클립 한주한책 서평단 '시험안끝났다'입니다.)


"우리는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


『나를 넘다』를 읽었다. 뇌과학자 볼프와 불교 승려 마티유의 대담집이다. 재미있다. 이 책의 홍보문구는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다. 정말 말 그대로 지성(과학)과 영성(종교)의 만남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볼프와 마티유 두 사람은 인간의 의식, 무의식, 자유의지, 자아 등에 관해 서로의 견해를 풀어놓는다. 과학적 견해와 종교적 견해가 때론 일치하고 때론 충돌한다. 두 사람의 토론을 재밌게 구경하고, 가끔은 그 토론에 직접 참여해 나의 생각을 덧붙이며 책을 읽었다.


마티유는 문학적인 수사를 잘 활용한다. 그의 말은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가끔 그의 말이 너무 두루뭉술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럴 때 볼프는 마티유의 말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과학적 설명을 덧붙이며 때론 반론한다. 덕분에 혼란을 겪지 않고 글을 읽을 수 있다. 반대로 볼프의 말은 명확하지만 전문 용어(뇌과학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일반 독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럴 때 마티유는 볼프의 말을 문학적 은유로 풀어내어 설명하고 종교적 견해를 덧붙인다. 덕분에 어려운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죽이 잘 맞는 커플(?)이다.



1. 종교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오해의 여지가 있어 먼저 말하는데, 나는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에서 조그맣게나마 '종교'를 비호하고 변호하고자 한다. 『나를 넘다』를 읽으며, 특히 그 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제1장 「뇌가 명상을 만났을 때」를 읽으며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만남을 그려낸 작품이다. 과학과 종교를 모순된 대립항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좀 의아할 것이다. 과학과 종교가 만난다고? 음… 창조과학인가? 어떤 사람은, 이 책에 분명 종교적인 내용이 잔뜩 담겨 있음에도, 홍보 문구 들어간 '영성'이란 단어를 이상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나 뭐라나. 마치 이 책에 담긴 과학적인 내용 안에 '종교'의 개념을 섞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다. 종교는 종교, 과학은 과학.


내 경험상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은 '종교' 혹은 '종교적'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미신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무논리'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듯하다. 특히나 종교의 대립항에 과학을 두고, '과학' 혹은 '과학적'이란 말을 신봉하면서 말이다. 마치 '과학적 판단'은 신뢰할 만하고 진리이며, 반대로 '종교적 판단'은 자기 고집이며 억측인 것 마냥 여기기도 한다. 종교가 가진 이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오로지 과학적 연구방법만을 타당한 설명 방식으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종교에 대한 환멸'이다(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35쪽)


이러한 환멸이 나타나는 현상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과학의 발전은 분명 과거 신앙이 누려왔던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과거에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신의 말씀'이라든가 '신이 내려주신 시련' 쯤으로 해석하며 알 수 없는 상태로 두었다. 반면에 오늘날 과학은 그러한 상황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배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제 바닷가의 어부들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나가기 전에 안전을 도모하고 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 신에게 풍어제를 올리거나 하지 않는다(오늘날 열리는 풍어제는 신앙하는 행위이기보다는 옛 문화를 유지하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안전 장비와 질 좋은 그물 등을 준비하며 과학적으로 신뢰할만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상 상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오늘날 신앙심을 바탕으로, '풍어제를 올리지 않으면 신이 진노하여 배가 뒤집힐 수도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판단은 말 그대로 억측이다.


종교에 대한 환멸이 나타나는 데 일부 종교계의 뻘짓(?)도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많이 샜으니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과학이 실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반면, 종교는 그런 실질적인 이득을 주지 못한다는 게 우리나라 많은 사람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인다. 『나를 넘다』에서 두 저자가 '명상'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볼프도 이러한 인식을 조금씩 보여준다.


[볼프] "이 문제에 관해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명상의 부작용입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눈을 감도록 하고, 문제를 풀기보다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최상의 전략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33쪽)


명상이란 불교에서의 정신수련으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방식을 바꾸어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20쪽). 좀 더 구체적으로 명상이란 "우리의 주의력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맑게 깨어 있는 의식을 응시"하며 "산만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71쪽).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한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욕구, 불안 혹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이며 우리는 "이 고통과 하나"가 된다. 결국 "이 고통들은 우리의 정신을 온통 사로잡아" 우리를 산만하게 만든다(138쪽). 명상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볼프의 말은, 그러한 명상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고 완곡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를테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는~ 행복합니다! 나~ 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 행복합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현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나의 정신을 수련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명상이란 결국 현실의 문제를 앞에 두고서 그저 "눈을 감도록"하는 일이 아닌가. 볼프는 이를 "명상의 부작용"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단연코, 이를 '오해'로 규정한다. 명상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종교적 성찰이다. 그리고 종교적 성찰은 분명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생각해보자. 현실의 어떤 문제는 때로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준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외부의 존재(문제)를 원망하며 그것을 고치거나 아예 없애려고 시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존재의 구조와 성질을 파악해야 하고, 이때 과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이 빠뜨리는 과정이 하나 있다. 바로 '나는 왜 그것으로부터 고통을 느끼는가?'라고 성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이 바로 종교적 성찰이다.


보통 우리는 어떤 문제를 대하며 '그것은 왜 이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할까!' 원망하기는 해도 정작 '나는 왜 그것을 고통스럽게 느낄까?' 성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계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나는 왜?'라고 묻는 작업은 '나'를 중심에 두고 내면을 깊게 파고들면서 나와 외부(세상, 세계)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문제 해결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즉 문제 해결의 원동력을 내면에서 끌어내지 못한 채 그저 외부의 대상만을 원망하게 된다. 쉽게 말해 '남탓'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20쪽) 행복이나 고통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을 해석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의 정신'임을 잊어선 안 된다. 명상은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앞에 두고서 그저 "눈을 감도록"하는 일이 아니며,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정신수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러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신이여,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의지를,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샤를 페팽, 『실패의 미덕』, 74쪽)


이러한 기도는 명상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성찰이다.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란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파악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언제나 남탓만 하는 것을 넘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할 수 있는 존재, 즉 '어른'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구절절 말했지만, 결국 결론은 이거다. '너무 종교를 미워하지 마세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과학적 탐구도 필요하고 종교적 성찰도 필요하니까. 사실 내가 맨 앞에서 "나는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세상에 종교가 없는 사람은 없다. 종교란 쉽게 말해서 우리의 믿음 체계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제외하면 종교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 반드시 있다. 나의 경우 단지 그것이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특정 종교'의 명칭으로 불리지 않을 뿐이다. 만약 이름을 붙인다면 '시노부교'라고 붙일 거다!


사실 『나를 넘다』의 두 저자는 과학과 종교를 모순된 대립항으로 설정한 사람들이 가질 의아함을 의식했는지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서양의 과학과 불교 사이의 대화는 흔히 과학과 종교의 까다로운 논쟁으로 통하지만, 서구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일종의 '정신과학'이며, 따라서 불교 승려(마티유)와 신경과학자(볼프)가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이다(11쪽).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며, 이 책에 충분히 담긴 종교적인 색채를 첫머리에서부터 애써 외면하려는 듯한 서술은 나로서는 조금 거슬린다. 종교가 그렇게 나쁜 게 아니라니께. 종교적 색채를 거부하지 말라고. 헤이~ 추라이! 츄라이!


종교를 너모 미워하지 마세영 ㅠㅠ

 


2. 이 책이 어려운 이유

『나를 넘다』는 좀 읽기 어려운 책이다. '나만 읽기 어려운가?' 생각했는데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읽기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내 지식이 부족한 탓만은 아닌 듯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추천의 글에서도 "마치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처럼" 읽기 까다로운 책이라고 한다(8쪽). 이 책은 특히 뇌과학 관련 지식이 없으면 더욱 읽기 어렵다. '대뇌섬(insula)'이라든가 '띠이랑(대상회) 피질'이라든가 듣도보도 못한 단어가 속속들이 나온다. 몇몇 단어들은 역자주를 붙여 설명해두었지만, 역시 모든 단어에 역자주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많은 뇌과학 용어는 독자가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책이 꼭 나쁜 책인 것만은 아니다. 찬찬히 공부하면서 읽을 수도 있으니까. 방금 말한 '어려운 단어'의 문제는 꼭 책의 '단점'이라고 지적할 만한 사항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지나치게 어렵다.' 비단 단어의 문제만이 아닌 더 큰 문제가 원활한 독해를 방해한다. 이 책은 논지전개가 뒤죽박죽인 부분이 많다. 


다음 내용을 보자.


[볼프]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 순간 이루어지는 여러 변화들이 이어진 하나의 흐름입니다. 뇌는 부단히 받아들인 신호들에 대한 반응으로, 가장 그럴듯한 혹은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나 해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해답으로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전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변화를 의식합니다. 따라서 뇌는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90~91쪽)


여기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나 해답"을 찾는다는 건, 우리의 뇌가 어떠한 상황에서 받아들인 신호를 바탕으로 그 상황을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해석한다는 뜻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려보자. 지금 내가 인용한 볼프의 말은 이 문구를 뇌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의 마지막 줄을 읽으며 의문이 들었다. "뇌는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어떤 해석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왜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하지? 이 문장 바로 앞에 "우리는 이 변화를 의식합니다. 따라서…"라고 언급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이 의문의 해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한 이후에 나온다.


[볼프] "따라서 뇌는 이처럼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평가시스템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얻어진 결과에 대해 언제 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92쪽)


즉, 얻어진 결과(해석작업의 결과)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평가하고 그 해석작업을 '그만두기 위해서' 우리는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생각에 빠질 테니까. 무한히 사고회로에 갇히지 않고 어느 순간 '생각을 다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을 파악해야 한다. 생각을 다 했다는 건 "갑작스러운 전개"에 따른 깨달음으로, 이 깨달음 이후 우리는 만족감(긍정적인 상태)을 느낀다. "유레카!"라는 깨달음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여기서 "활성화"라는 단어는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 나온 "활동"과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확인해야 한다.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의 구분은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두 단어가 같은 의미라는 근거는? 바로 내가 인용한 부분의 첫 번째 문장에 나온다.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은 즉, '뇌의 활동이란 신경세포의 활성화'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설명이 구구절절했는데, 본 내용이 어렵다 보니 이 설명도 좀 난해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볼프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

2) 뇌는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참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한 후)

3) 뇌는 이처럼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평가시스템을 갖고 있어야 한다.

4)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독자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2번 문장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려면 4번 문장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4번 문장은 바로 앞에 있는 3번 문장을 설명해준다. 사실 2번 문장과 3번 문장은 같은 말이다. 따라서 4번 문장은 3번 문장을 설명하지만 동시에 2번도 설명해준다. 2번 문장과 3번 문장 사이에 '한참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해서 두 문장이 서로 같다는 게 바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번을 전제로 생각하면 2번과 3번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지럽지 않은가? 독자는 순서대로 1번 2번 그리고 3번 4번 문장을 읽는데,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책을 순차적으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며, 여기저기 왔다갔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되돌아갔다가 해야 한다. 말하는 개념 자체도 쉽지만은 않은데 하필이면 내용 전개도 이렇게 뒤죽박죽이니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이렇게 뒤죽박죽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대화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두 사람이 서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한 사람이 일관되게 자신의 논지를 펼치지 못한다. 독자는 '두 사람'의 대화 흐름을 따라가며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독자는 이 책의 내용을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나 명상이란 걸 딱히 해본 경험도 없고 뇌과학 지식도 별로 없는 나에게는 더욱 어려웠다.


어지럽다 어지러워


뒤죽박죽 전개는 심지어 한 문장 안에서도 나타난다.


[볼프]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해답에 도달한 것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하는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과 동시성일 것입니다." (94쪽)


혹시 이 문장이 바로 이해가 되는지?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읽고 나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한 문장에 관형어(-있는, -하는 -적인)가 너무 많아 어지럽다. 게다가 논지 전개도 뒤죽박죽이니 혼란이 증가한다.


이 문장은 여러 문장이 섞여 복합적으로 구성되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해답에 도달한다.

2) 이를 평가시스템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3) (이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일관성과 동시성이다.


볼프의 말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위의 1번과 3번에 둘 다 "일관성"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1번의 "일관성"과 3번의 "일관성"은 같은 말이다. 그런데 앞서 한 문장으로 묶인 것에서 "일관성"에 관한 부분만 추려보면 이렇다.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이다.' 마치 순환논증의 오류인 것처럼 보인다.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는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볼프의 말을 이해하려면 "일관성"을 키워드로 1번과 3번을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2번이 들어와서 이 둘을 구분해버리니 혼란이 온다.


우리는 앞에서, 뇌는 해석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즉 뇌는 서로 다른 활성화 상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위의 1번 문장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결국, 일관성(그리고 동시성) 있는 상태란 활성화 상태의 일종이고, 우리의 뇌는 이를 해석작업의 '결과'로 구분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때,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어 '긍정적이라는 평가'에 따라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유레카!"의 희열을 안겨준다.


정리하자면, 처음에 본 하나의 문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1) (뇌가) 전체적으로 일관성(그리고 동시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면 해답(해석작업의 결과)에 도달한다.

3) (일관성·동시성 있는)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된다.

2) 활성화된 평가시스템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문장 번호를 잘 보자. 독자는 한 문장을 1번 2번 3번 순서로 읽는데, 논지를 이해하려면 1번 3번 2번 순서로 파악해야 한다. 한 문장을 순서대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고, 한 번 읽었다가 되돌아가서 또다시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어지럽다. 이러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이렇게 한 문장에서도 뒤죽박죽이 나타나는 원인은 번역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우리말 어순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다. 원서를 파악하지 못해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아마도 이 책의 옮긴이는 두 저자의 대화를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직역투로) 옮기려 한 듯하다. 외국어 문장의 논지 전개 순서는 우리말 문장과는 사뭇 다를 수 있는데, 옮긴이가 이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의역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려운 책이 꼭 나쁜 책은 아니다. 매끄럽지 못한 논지 전개라고 해도, 여러 번 곱씹어서 읽으면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으… 사실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그냥저냥 넘어가면서 책을 읽는데, 이렇게 서평을 쓰면서 하나하나 분석하는 작업을 하니 너무 힘들다.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로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수고로운 과정이다. 물론 그런 만큼, 이 책을 다 읽어냈을 때 보상은 확실하다. 영성의 맑은 공기와 지성의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가끔은 이런 어려운 책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가끔은 높은 산에도 올라가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