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누군가를 만났어 ㅣ 작가의 발견 2
배명훈.김보영.박애진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예상보다 훠얼씬 알찬 단편집이라 매우 감동적이었다. 단편집이라 깊이 몰입하기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기에, 한 편 한 편이 매우 뛰어난 몰입감을 보여준 이 작품선집을 한 편집장에게 키스를 날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원래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니까 기본 이상은 해 주었겠지만 단편선은 기획하는 사람의 안목 또한 매우 중요하다. 작가들의 나열 순서마저도 마음에 들었던 책이었다.
배명훈
책의 가장 첫번째 타자이자 표제작의 작가이기도 해서, 아마도 꽤나 힘을 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작가 중 유일한 남자이고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글을 쓰는 역동적인 작가이다. 이 작가의 장점은 이야기를 힘있기 이끌어나간다는 데 있다. 플롯이 재미있고 추리적인 요소가 있어서 흥미롭게 결말을 기대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제목 짓는 센스도 뛰어나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임대전투기]와 [이웃집 신화]는 코믹한 s판타지적 재치가 돋보였다. [철거인 6628]은 전에 읽었던, 기억이 생생한 단편이다. 기억령 젬병의 나에게 그 이야기는, 그 만큼 인상적이었다는 뜻. 가장 서사가 있다. [355서가]는 재미있는 꽁트의 느낌.
[누군가를 만났어]는 읽지 않았던 작품에다 표제작이라 기대가 좀 있었다. 배명훈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좀 의외였다. 많이 절제한다는 느낌? 혹은, 실험하는 듯한 의도?
중국의 어느 평원에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한중일 발굴팀이 모인다. 화자는 한국의 고고심령학자. 옛날 혼령들의 문화양식을 연구해서 가설을 확인하는 일이란다. 고고심령학을 오래하면 귀기가 서려 경력이 쌓일수록 귀신을 더 잘 보게 된다나. 이렇게 가장 믿을 수 없는 발굴 목적을 가진 주제에 다른 팀들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뒤덮여있어서 마지막까지 흥미롭다. 마무리가 푸시시(?)한 느낌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글이 깔끔하고 내용전개가 잘 되어 있는 수작이다. 표제작으로 뽑힌 것은, 아마도 편집장이 이 작가를 눈여겨 보고 있으며 전체적인 책의 기획의도를 잘 수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김보영
브라보를 외쳐주고 싶을 정도로 좋은 선작이다. 다른 단편 다섯 갠데 하나로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관된 주제 의식? 소재? 가 아주 좋았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이야 연작이라 그렇다 쳐도 [종의 기원]까지도 다른 듯, 같은 듯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좋았다. 이 작가는 그야말로 SF적이다. SF야 말로 번뜩이는 아이디어, 소재의 짧은 포착이 그 어느 소설보다 중요한 장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보자면 김보영은 SF계에 독보적인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발랄한 소재에서 그치지 않고 그걸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작가라 더 소중하다.
[종의 기원]은 즐거운, 패러다임의 역전극이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일지 모르지만 누가 먼저 해 내느냐의 문제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발상을 좀 너무 즐겼다는 느낌이랄까, 중반부에 지루한 감이 있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상쇄할 만한 멋진 결말을 보여주기에 만족스러웠다.
이 책에서 김보영은 삶/생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재 순문학이 인간에 너무 깊게 천착하고 있다면, 김보영은 인간 본질 자체를 떠난 글쓰기로 빅뱅과 같은 충격을 던진다. 그가 가진 광막한 시선은 독자를 막막하게, 때론 광휘롭게 태풍의 중심으로 이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광폭하게 흔들리는, 그러나 고요하기 짝이 없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처럼. 색다른 시선이다.
박애진
박애진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그의 작품은 읽고 난 후 여백속에서 공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근작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지만 나름 이 작품들이야말로 작가의 심장부라는 의미인 듯 싶다. 이 중에서 베스트를 뽑으라면 망설여질 정도로 이 작가의 뛰어난 면면을 각각으로 보여주고 있는 단편들이라 평균적인 재미가 있다.
[선물]은 내가 기억하기로, 소재별 거울단편선의 흡혈귀편에 실렸던 작품이다. 그 때는 그 소재답지 않은 글이라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시 읽어보니 화자의 시선을 꽤나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힘이 있는 것이 작가의 능력을 알게 한다. [누가 나의 오리...]는 여기에 실렸다는 게 좀 의외일 정도로 좀 혼란스러운 작풍을 보이는데 그게 또 매력적이기도 하다.
나는 이 셋 중 가장 먼저 제도에 편입될 작가를 뽑으라면 단연 박애진을 뽑고 싶다. 그녀의 글은 단단하고 하고자 하는 말도 꽤나 분명한 편이며 장르 외를 포옹할 수 있을 정도로 폭넓다. 얼핏 봐서는 가장 전복적인 글을 쓰고 있지만 그렇기에 모두를 강렬하게 후린다. [신체의 조합]이 머리를 댕댕 울릴 정도의 파문을 던져준다면, [나의 사랑...]이나 [완전한 결합]은 감성을 바늘로 콕콕 찌르듯 자극한다.
세 작가 모두 좋은 소재포착에 그치지 않고 그 독특함만큼 이야기 자체가 힘있는 글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기에 참 재미있게 읽었다. 균형과 조화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다. 앞으로 개인집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미 그 정도 내공은 쌓아두셨을 테니, 시간과 선작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이런 단편집이라면, 편집장의 후기나 편집 의도 같은 것이 짧게나마 적혀 있었으면 더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어보며 마친다. 초등학생까지는 어렵겠지만 중학생부터라면 한 권쯤 사 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볼만한 좋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충분한, 날서지 않은 좋은 현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