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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삶 -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마주한 죽음과 희망의 간극
라훌 잔디얼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4년 1월
평점 :
『칼날 위의 삶』은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이자 뇌 과학자인 라훌 잔디얼의 회고 에세이다. 『내가 처음 뇌를 열었을 때』 (2020, 윌북)에 이어 한국어로는 두 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다. 잔디얼은 현재 통합 암 치료 전문 기관인 시티 오브 호프 재단에서 '잔디얼연구소'를 운영하며 암이 뇌로 전이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에 힘쓰고 있다. 책은 10가지 키워드에 맞춰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환자와의 관계 속에서 얻은 생각들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칼날과 외과의사의 삶 혹은 칼날 위(에 놓인 환자)의 삶
『칼날 위의 삶』이라는 제목과 저자가 신경외과 의사라는 정보를 접하면 일단 메스부터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책을 읽기 전엔 외과 의사의 삶에서 결코 뗄 수 없는 칼날(메스)을 상징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는 마치 칼날 위(위험하고 위태로움)에 사는 것 같았던 그의 곡절 많은 삶을 비유하는 듯 보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저자의 칼날에 몸을 맡긴 환자들의 삶까지 염두에 둔 제목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책에서 저자는 거듭 환자들로 인해 많이 배웠다고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 책과의 차이점
배송을 기다리며 먼저 나온 책을 읽어봤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전 책과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 『내가 처음 뇌를 열었을 때』 (2020, 윌북)는 의욕적인 뇌 과학자가 최신 뇌과학을 알기 쉽게 파헤쳐 드립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 뇌 건강 생생정보통(원제가 Neurofitness다.)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은 여느 개인과 다름없이 불안에 떨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어려운 문제도 마주하면서 종종 윤리적인 문제와도 부딪히는 인간의 삶을 집중 조명한 인간극장에 더 가깝다. 수술 과정을 묘사하며 자연스럽게 뇌의 각 부위와 기능을 언급하는 부분도 있지만 정보 전달의 목적보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환자와 겪은 갈등과 자신의 선택, 시간이 흐른 뒤 깨달은 고찰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유능한 의사지만 저도 사람이랍니다
저자의 솔직함에 놀랐다. 첫 장인 트라우마에서부터 자신의 트라우마를 밝히며 시작한다. 충격적인 기억이 어떻게 현재의 자신에 이르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외상 후 장애보다 외상 후 성장에 초점을 맞춰 서술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성장기, 레지던트 시절 악명 높은 대학교수와의 위기, 자신을 위협하는 이웃과의 갈등,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후회, 수혈을 거부하는 교리를 고집하는 부모와 자녀의 생명을 사이에 둔 갈등처럼 개인의 삶과 의사의 삶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지한 주제 앞에서 독자의 마음이 무거워질 때조차 저자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모든 선택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몰입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좌절을 딛고 매일 새로운 도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신경세포를 연상시키는 이것
표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겠다. 일러스트 속 선명하게 보이는 눈이 마치 고래의 눈처럼 보였다. 물론 내가 떠올린 이미지와 책 내용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보다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란 부분은 제목과 부제 부분이다. 주의를 기울여야 알 수 있는 형압이다. 굵은 서체의 제목을 강조하기 위한 형압 후가공은 사실 책 표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티가 날 것 같지도 않은 얇디얇은 서체에 굳이 음각 효과를 넣은 점이었다. 손끝으로 표지를 문질러보다가 우연히 알아챘다.
왜 굳이 이런 '티 안 나는' 수고를 들였을까 생각하면서 손끝의 감각에 다시 집중했다. 서체 두께가 얇아서 촉감만으로는 이것이 글자라는 형체를 가졌다는 것조차 파악할 수 없다. 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여기 존재하고 오밀조밀 얽혀있다는 막연한 느낌만 남는다. 이 애매한 느낌이 마치 저자가 반복해서 얘기한 신경세포 찾기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지만 인상적이었다. 실물 책을 산다면 꼭 한 번 표지를 만져보시라고 알려주고 싶어 언급한다.
추천하고픈 독자
병상에서 맞이할 죽음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 본 사람
주변 혹은 자신이 뇌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 각종 의학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사람
암 가족력으로 건강염려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뇌에 관한 책이라면 빠짐없이 읽고 보는 사람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