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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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부님도 나도 이제는 저애들 위해서가 우리를 위해서 사형제 폐지운동을 하는 거야.˝ 수녀님의 입을 빌어 작가가 말했다. 인간은 모두 얽혀있다는 사실쯤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작가의 글만 읽으면 눈시울이 붉어졌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린 함께 울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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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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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의 최고 경지는 무엇일까. 화려한 어휘와 빼어난 문장? 그것도 좋지만, 삶이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나온 문장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미문으로 가득하다. 맑고 곧은 정신이 그리울 때 꺼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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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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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단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믿는 하느님을 나도 믿고 싶다는 생각! 참고로 나는, 날 때부터 개신교 신자이자 한때 성직을 수행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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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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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2013년 봄

 

 

_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耕作)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獲得)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한 번도 보지 않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사랑은 생활을 통하여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파주:돌베개, 1998), 22쪽.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영화 속 유지태가 뱉어버린 한마디에 세상의 모든 보이(boy)들은 단결하여 울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울음이 그들 모두를 관통했다. 보이들은 그런 것이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그게 아니라면 순진한 존재들. 불꽃같은 사랑은 봄날 벚꽃 같음을, 그들은 모른다. 고결한 가치들은 영원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 믿으며 살아버린다. 그들은 틀렸다. 모든 고결한 가치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다 대기권과 마찰하여 불타버렸다. 타다 남은 재만이 우리 손에 놓일 따름이다. 그토록 화려하던 사랑이 어느 순간 잿빛으로 발견되는 이유라면 이유다.

 

나는 남자고, 별 수 없이 보이였다. 내 눈에도 사랑은 빛나는 별꽃 같았다. 하늘로 기어오르기만 하면 딸 수 있는 별꽃. 관건은 ‘얼마나 공을 들여 그곳까지 기어오르느냐’였고, 그것만이 내 몫이라 생각했었다. 매번 있는 힘을 다해 기어올랐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땀도 흘렸다. 언젠가는 빛나는 꽃을 꺾어 쥔 적도 있었다. 굳은살이 터져 피가 된 손으로 꽃을 쥐었을 때, 여름밤 불꽃이 터지듯 기뻐하고 또 기뻐했다. 그제야 세상에 색깔이 입혀지는 것 같았다. 화려한 그 색들이 옅어지고 바래지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보이였으니까. 보이에게 사랑은 획득이었으니까.

 

획득을 사랑의 전부로 알던 보이에게 벼락같이 날아든 문장이 바로 이것이다.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 나무 열매를 따먹던 원시인들이 곡식을 길러 먹기 시작한 사건을 우리는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그렇다, ‘혁명’. 획득에서 경작으로의 움직임은 가히 혁명이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가르침은 왜 혁명이 아닌가? 그 문장은 적어도 이 한 명의 보이가 맨(man)으로 발돋움하는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물론 그 보이는 그 후에도 여러 번 혁명에 실패하여 투옥되고 고문당했다고 한다. 이 가련한 보이에게 부디 자비를.......)

 

인간이란, 시간을 살면서 영원을 사는 양 착각하는 존재다. 모든 고귀한 것들은 영원의 것이라 믿기에, 일회 획득 후 영원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오늘의 뜨거움이 내일도 여전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영원에서 시간으로 건너온 모든 것들은, 가만 두면 식고 또 바래진다. 어제 희망이었던 마음이 오늘은 절망일 수 있다. 밤새 굳게 믿었던 것들이 터오는 볕과 함께 증발해버릴 수도 있다. 소망도, 믿음도 이렇거늘 사랑이라고 별 수 있겠나. 하물며 구원조차 그럴지도 모른다. 가만 놔두면 흉하게 변할 것들을 곱게 가꿔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뒤틀린 우리 세상에서 은총 입은 인간의 몫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제목에 걸맞게 주옥같은 생각의 결정(結晶)들로 빼곡한 책이다. 저자 신영복 선생께서는 한 달 내내 머릿속으로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가 일필휘지로 엽서에 옮기셨다고 한다. 한 달 혹은 그 이상을 현인의 머릿속에서 숙성된 생각들이어서인지, 깊고도 정갈하다. 굳이 눈비비고 달려들지 않아도 색색의 보석들이 곳곳에 반짝거린다. 단한가지 흠이라면, 책을 읽다가 한 번씩은 하늘을 올려다봐야한다는 점이다. 정신을 때리고 가슴을 울리는 생각들 앞에서, 숨도 고르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을 재주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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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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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2011년 5월 13일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동양의 낯선 나라, 생면부지의 청년의 인사를 받으신 선생님의 기분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 처음 <오래된 미래>란 말을 들었을 때는, 책 제목인지도 몰랐었답니다. 예전 다니던 교회에서 헌금하신 분들의 이름과 기도제목을 불러주곤 했는데, 어떤 분이 이름 대신 ‘오래된 미래’라고 쓰곤 하시더라고요. 그 땐 그저, ‘참 멋진 표현이다.’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이 책 이름이었음을 알고 나서는 (저의 무지함에) 조금 부끄러웠고, 언젠가는 꼭 읽어보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야 그 다짐을 이뤄냈답니다. 그 성취를 기념(?)하려 몇 자 써 올리는 것입니다.

 

살면서 누구나 무언가에 몰입하는 순간이 있지요. 저는 음악에 그랬습니다만, 선생님의 대상은 라다크 마을이었는 듯합니다. 인도 대륙 북부,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북쪽으로는 중국, 동쪽으로는 티베트와 인접한 인구 13만의 작은 지역, 라다크. 인류사에 한번도 부각된 적도, 주목 받은 적도, 회자된 적도 없는 작은 마을. 선생님께서 그 곳의 무엇에 매료되셨는지는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책의 1부를 통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70년대 중반, 처음 라다크를 방문하셨을 때, 그 곳은 아직 ‘전통적’ 생활 방식에 따라 살고 있었다고 하셨죠. 그것은 주어진 자연에서 어긋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소규모 자영농으로 삶을 꾸려가던 그들. 그렇게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기에 자연스레 계절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살더라고 하셨죠. 한 사람당 (약 축구장 반절 크기인) 1 에이커 정도의 땅을 소유하는데, ‘기본적으로 이곳 사람들은 경작하지 못 하는 농지를 소유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53) 고 하신 말씀은 참 흥미로웠습니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거기에 달린 각주인데요, ‘이것은 라다크 사람들이 농지를 재는 단위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이들은 밭의 면적을 잴 때 그 밭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에 따라 ‘하루치’ 혹은 ‘이틀치’라는 식의 단위를 사용한다’(53)고 설명해주셨죠. 이 대목을 읽을 때에는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욕망을 무기 삼아 사람들을 휘두르는 대도시와 현대 문명 출신인 선생님에게 욕심 없는 라다크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청정수역과 같은 느낌이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그들은 땅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었다고 하셨죠. 선생님은 그것을 ‘대지와 함께 하는 삶’(65)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결코 비옥하다고 할 수 없는 땅이었지만, 그들은 그 척박한 땅을 사랑하며 또 감사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살고 있었다고요. 넉넉하지 못한 자원 덕에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 모든 것을 재활용해왔다’ 지요?(76)‘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동물의 먹이로 사용하고 연료로 쓸 수 없는 것들은 비료로 쓰는 것이 라다크 사람들’이라시면서요.(75) 그렇게 선생님은 ‘척박한 자연환경에 놀랍게 적응한 라다크 사람들의 모습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어요.(77)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내가 속해 있던 서구의 생활양식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셨고요.(77)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현대 서구의 생활방식은 재활용이란 단어를 민망하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나마 서구적 의미에서 재활용이란, 따로 내놓아야 하는 쓰레기를 의미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라다크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도 선생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지극히 기초적인 작업 도구만을 가진 이들이 그토록 만족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게 느껴진다’고 쓰셨죠.(92) 쟁기와 베틀, 물레방아 등이 정교한 기계의 전부인 사람들, ‘커다란 기계의 힘이 필요한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동물의 힘을 빌리거나 협동 작업으로 해결’하는 사람들,(92) 거기서 선생님은 매력을 느끼셨나 봅니다. 곡물을 수확할 때에는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여유로운 속도에 따라 웃음과 노래를 섞어가며 즐겁게’ 일하는 모습도 보셨다고요.(93) 특히 협동 작업에 있어 ‘랑제’라는 (제도로 굳어진) 관행을 설명하셨는데요, 농기구나 가축을 공동으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하셨죠.(124) 또한 ‘파스푼’이라는 공동체의 단위도 설명해주셨어요. ‘대개 4~12가구 단위로’ 이루어진 ‘출산 결혼 그리고 장례 같은 것을 치러야 할 때 서로 도와주는 몇 기구 단위의 공동체’라고요.(120) 그렇게 땅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셨다고 설명하시는 책 곳곳에서 선생님의 애정 듬뿍 담긴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아울러, 모든 것이 정교하고 딱 떨어지는 서구 사회에 비해, 선생님의 눈에 비친 라다크 사람들은 매우 여유로워보였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재는 경우에도 느슨하고 여유롭게 잰다’, ‘라다크 사람들은 ‘내일 낮에 찾아올게’ 혹은 ‘저녁쯤 찾아올게’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등의 표현에서 그 여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93)

 

특히 그 여유는 경제활동에서 빛을 발하더군요. ‘라다크 사람들은 다행히도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상충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요,(120) 돈이 사회 전반의 모든 구조를 지배하는 우리네 사회에 그건 정말이지 벼락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라다크 사람들에게 있어 최우선이 되는 문제는’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공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들에게는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쓰셨죠.(110) 선생님 또한 반성적인 어조로 기록하셨던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반성해야 할 사람은 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돈에 미쳐 돌아가는 이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의 모든 나라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도 결코 예외일 수 없지요.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고, 돈을 위해서라면 자연도 파헤치고 사람도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이 사회에서, 공존을 모색하며 살던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우리는 죽비소리로 듣고 삼아야 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라다크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양태도 선생님의 시선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되다는 배려는 라다크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쓰셨죠.(111) 특히 ‘자발적 중재자’(112) 개념은 흥미로웠습니다. 두 사람이 갈등 상황에 있을 때에 그 곁을 지나가는 누구라도 그 상황에 개입하여 중재자가 되어준다고요. 어른들의 갈등 상황에도 초등학생 나이의 어린 아이가 중재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에 무척 놀라기도 했습니다. 대가족 체제를 유지하는 질서 잡힌 사회에 또한 그러한 유연성이 있다니요. 그 유연성은 계층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하신 대목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서구 사회에서 계층 간의 경계가 분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라다크에서는 이들 계층들이 일상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하류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몽족 사람이 귀족 계층의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라고 쓰신 대목 말입니다.(115) 전통적인 계급 사회는 사라졌지만, 이제는 돈과 지위가 권력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사회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 대하듯 대하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에게서 엿볼 수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그 유연성과 여유가 무척 놀랍고 부러운 대목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라다크 마을의 여러 흥미롭고 바람직한 전통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시던 선생님은, 책의 2부에서 변화하는 라다크 마을의 모습을 소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실크로드  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외부 문화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예전에는 외래 문화가 일으키는 변화의 속도가 내부의 적응 과정을 허용할 정도’였다고 하셨어요.(181)그러나 ‘인도 정부가 그 지역을 관광 지역으로 개방했던 1974년부터’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고요.(182) 이후, 그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라다크 마을을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어조에는 큰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요약해보겠습니다. 관광산업은 첫째, 마을의 외형(혹은 물질적인 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부분)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라다크 마을은 정확히 서구식의 개발 과정에 들어섰는데, 전력 등의 산업사회를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더니, 의료/교육/미디어 등의 각 부분에서 서구식의 문명시설들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자급자족하며 거의 완벽한 내수경제를 유지하던 라다크 마을에 외부 경제가 유입되며 화폐경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인구 또한 증가했고, 관광객 등의 외부 인구의 유입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선생님께서는 한마디로 ‘관광산업이 물질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광범위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라고 표현하셨죠.(184) 그런데 그건 유도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다음 말씀은 더 의미심장했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라다크 사람들의 정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184)

 

외국인 관광객들이 대거 찾아오면서 라다크 사람들은 외부의 문명과 자신들의 문명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열등하고 낙후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받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외국 관광객 한 사람이 하루에 쓰는 돈은 라다크의 가정이 1년 동안 쓰는 돈과 맞먹을 정도였다’지요?(186)‘서양 사람들의 눈에 라다크 사람들은 가난하게 보인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팁을 많이 주어야겠네요’ 라는 식으로 라다크 사람들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본다고요.(187)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살아왔던 자기네들의 삶이 어느 순간 ‘미개한’ 것으로 전락될 때의 기분, 그건 참 불쾌하면서도 수치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외국 관광객들은 라다크 사회에 서양 사람들은 모두 엄청난 갑부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왜곡된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있다’고 하셨어요.(188)정말 그러네요. 서양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접하기도 전에 그저 ‘관광객’이라는 다소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을 통해 서양 사회를 접하게 됐으니까요. 그들이 그런 환상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들이 해왔던 삶을 꾸리는 ‘일’들이 모두 가치 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 상황입니다. 생명과 삶을 꾸리기 위해 즐겁고 신성하게 꾸려왔던 ‘생활’들이 이제는 힘겹고 번거로운 것이 되었으니까요. 전통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화폐’를 얻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이제는 ‘옛 것/자신들의 것’은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것으로, ‘새 것/그들의 것’은 화려하고 힘있는 것으로 여기게까지 됐으니, 선생님의 안타까운 어조는 절대 과장이 아니셨으리라 생각합니다.(189)

 

라다크 사회에 유입된 돈의 힘은 체왕 팔조르라는 라다크 사람의 증언 때문에 확연히 다가왔어요. 1975년에 그는 ‘이곳에 가난이라는 건 없어요’라고 말했지만, 그로부터 불과 8년 후에는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 가난해요’라고 말했다고 하셨죠.(196)이 짧은 발언에서 라다크 사회를 잠식한 ‘맘몬’의 파급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제 체제는 사람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하셨어요.(199) 농업과 가내수공업적 생산으로 삶을 꾸려왔던 그들이, 여태껏 땅에 뿌리를 박고 살던 사람들이, 화폐에 의존해서 삶을 꾸리고, 땅에서 유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의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ha-adam)을 흙(ahdama)으로 만드셨다고 했는데, 이런 의미에서 외부 화폐 경제가 대량 유입되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마저 흐트러지게 된 것이네요. 실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공동체가 분열되고 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간략히 훑어 얘기하면, 서양의 개발 논리적 가치들과 무분별한 화폐 경제가 유입되면서 라다크 사람들은 전통과 자신들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서로 협력하던 사람들은 파편화되었고, 구심점이 되어 주던 전통적인 가치들(종교 혹은 공동체 우선의 가치들 등)은 파괴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삶과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을 배웠던 아이들은 자기 삶과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세계적인 지식’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서구적인 미적 가치들이 유입되면서 아이들은 부쩍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래 라다크 사회는 여성의 외모보다 내면을 중시하던 사회였는데 말입니다. 또한, 함께 살던 가족들은 돈을 벌기 위해 떨어져 살고, 화목하게 지냈던 종교들은 서로 적대감을 드러내게 됐습니다. 이 모든 안타까운 일들이 라다크가 세계 거시경제의 구조 속으로 편입되며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220)

 

1, 2부에 걸쳐 라다크의 전통 생활 방식과 도시 지역에 나타난 변화의 영향력을 개괄적으로 설명하신 선생님께서는,(245)이제 그 둘을 융합하며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십니다. 그 출발을 라다크 전통 문화 및 생활방식에 대한 긍정으로 시작하고 계시지요. 라다크의 전통 문명이 무조건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것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전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역설하셨어요. 선생님의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구성원들의 행복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하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유지가능성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251) 이 기준에서 보면 라다크의 전통 사회가 발전시켜온 문명은 합격점을 밭습니다. 반면에 개발 논리에 충실한 서구 문명은 자격 미달입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아, 되려 서구의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라다크의 전통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실상은 그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라다크 사람들은 개발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셨죠? 하지만, ‘개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이 책 전반에 걸친 선생님의 견해를 압축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_‘그렇지만 나는 개발이라는 것이 꼭 파괴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영위해 온 사회적, 생태학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관습화된 개발의 방향을 답습하여 고유의 것들 것 해체해 버리기보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그 기반 위에 새로운 것들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257)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역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하나의 단일 문화와 경제체제로 대체하는’(261) 현대화라는 거대한 물결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이에 대해 ‘반개발의 논리’(282)를 주창하십니다. 선진국들의 개발 정책, 혹은 ‘자원남용, 기술혁신, 시장창출, 수익증대를 가속시키는 냉혹한 추진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오늘날 글로벌경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280)그건 선생님께서 인용하신 겔롱 팔단이란 라다크 사람의 말에 잘 드러나 있네요. ‘우리는 지금도 하늘을 향해 가고 있지만 선진국 사람들은 다시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그 위는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282)그렇습니다. 이미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는 중입니다. 그들은 이미 ‘진보’의 이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자동차의 폐해를 경험했기에 자전거를 선호하고, 화학첨가물이 든 음식으로 고통을 맛보았기 때문에 유기농 음식을 권장하는 것 말입니다.

 

문제는 라다크 사람들과 같은 개발의 도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정보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서구적 문명의 찬란하고 매혹적인 면만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이, 모든 시련과 시행착오를 거쳐 어른이 된 사람이 아직 어린 아이에게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성장하라는 뜻의 고압적 훈계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3세계 사람들도 스스로 배워야 하며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헤쳐간다는 것은 반복할 수 없는 개발의 모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일한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따라 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비판도 일리가 있지만, 선생님의 통찰은 그것을 넘어서 번뜩입니다. 예, 확실히 그렇습니다.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이제 그 대안적인 움직임을 소개해주셨습니다. 바로 ‘라다크 프로젝트’라 이름 붙은 사업입니다. 그 프로젝트는 전통 문화를 부흥시키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장려하는 운동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환으로 일조량이 많은 라다크의 지역적 특성을 살려 태양력 에너지를 이용한 주거시설들을 늘려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라다크의 전통 가치를 담은 연극을 만들어 상영하는 등의 전통문화부흥 운동을 겸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생태적인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개발을 하면서 그 수혜자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이 책이 90년대 초반에 나왔고, 그 이후로 지금껏 정진하고 계신 듯 하니, 그 수고의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가보진 않았지만 아마 라다크 곳곳에서 그 열매들이 보일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 노력들은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의 중심 가치들은 이미 라다크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오던 것들이니까요. 선생님께서는 그 ‘오래된’ 것들에서 ‘미래’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늘어놓았지만, 선생님의 애정과 반성이 듬뿍 담긴 글을 감명 깊게 읽었노라 말씀 드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라다크의 변화 모습은 제가 사는 한국 사회의 현대화 과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 역시 서구 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전통의 것들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산업화/도시화라는 괴물 같은 움직임이 더해졌고, 요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가세하여 한국 사회는 거대한 수렁과 같은 느낌입니다. ‘돈’이 모든 것들의 가치를 결정하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아등바등합니다. 지역 공동체는 점차 해체되어가고 사람들은 고향과 땅에서 유리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지속가능하고 대안적인 발전 가능성과 전통문화의 새로운 조명 등을 외치신 선생님의 주장과 노력들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다행히도 한국 사회에서도 선생님의 책이 널리 읽히고, 덩달아 공동체와 환경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추이는 거대한 물결에 비하면 미비하긴 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작은 틈새와 균열 등에서 소소한 소망들을 잡으며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글을 정리하며 한가지 아쉬운 대목만 말씀드립니다. 동양의 청년이 보기에, 선생님께서 그토록 놀라셨던 라다크의 전통적 가치들은 기실 라다크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양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도 두레/품앗이 라고 불리는 랑제나 파스푼에 견줄만한 협동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의 여유로운 시간개념을 말씀하셨지만, 한국인들이 부정적으로 말하는 ‘코리안 타임’은 원래 그 여유로운 시간개념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또한, 전통적 한국 사회에서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모호하게 드러내곤 합니다. 게다가 한국 아이들도 웬만큼 클 때까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이 들지요. (물론 그 결과, 캥거루 주머니 속 아이들이 될 가능성이 비교적 높지만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동양 문화의 양태들이지, 어떤 부분에서는 라다크의 고유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서양인들은 기술이라는 도구와 진보라는 가치로 무장한 채 동양의 것들을 무시했던 시각과 자세를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없어 글이 길었습니다. 긴 글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지속 가능한 발전과 지역의 고유한 가치들에 눈과 귀를 기울이시는 선생님의 사역들이 날로 빛을 더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먼 곳 동쪽에 사는 저 또한 미약하나마 동참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두루 평안하시길 빌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2011년 5월, 동양의 어느 청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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