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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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의 끝에서 시작해 사람에게 닿다>


- 서평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지음, 메멘토, 2015)




‘다르다.’ 

책을 덮자마자 이 한마디가 떠올랐다. 


한 십여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심을 두었다. 나의 관심은, 누에가 실을 뽑듯, 가늘었으나 끊이지 않았다. 글쓰기 강좌에 참여했고, 쓰기를 가르치는 책도 몇 권 샀다. 글쓰기 책들은 공통의 문법을 소유했다. 글의 종류와 성격을 설정하는 방법(수필은 이렇게 사설은 저렇게라든지), 흐름과 구성을 조직하는 방법(도입은 이렇게 맺음은 저렇게라든지), 단어와 문장을 다듬는 방법(생생한 단어를 권장하고 번역 투의 문장을 질타한다든지) 등을 일러주는 식이었다.


이러한 글쓰기 책은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 정도의 질문으로 동기를 부여하며 시작한다. 반면 이 책은, ‘나(저자)는 왜 쓰기 시작했는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질문이 실존을 건드리는 만큼 답변의 농도도 진하다. “누구나 사노라면 거대한 물살에 떠밀려 가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기를 쓰고 앞을 향해도 옆으로 저만치 밀려나 있기 일쑤다. 왜 내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게 최선이고 전부일까. 그러한 물음에서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5-6)


한마디로 저자의 글쓰기는 삶의 ‘최전선’에서 시작되었다. “삶이 굳고 엉킬 때마다 글을 썼”고,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9) “지금 여기가 맨 끝”이자 “맨 앞”이라는 시구처럼, 최전선은 끝과 앞의 접점이다. 삶의 끝에서 시작된 글쓰기는 삶의 앞에서 삶을 인도했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23)


책 제목인 <글쓰기의 최전선>은 본래, 저자가 이끄는 글쓰기 수업의 명칭이다. 책 전반에 걸쳐 수업의 풍경이 등장한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합평(合評)한다. 학인(學人)들은 자연스레, 나와는 다른 삶의 이력과 마주하며, 나의 좁은 경계를 넓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며, 과거의 고통에 직면한다. 결국, 자기의 언어를 갖는 데까지 도달한다. 써먹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삶 자체를 건드리는 글쓰기. 그것이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학인 중 하나는 그 수업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187) 그렇다면 ‘사람’과 ‘삶’을 성찰하는 쓰기는 어디에 당도할까? 대답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다. 인터뷰 쓰기와 르포르타주 쓰기. 이것은, 나를 넘어 너에게 닿는 글쓰기, 너와 나를 연대하게 하는 글쓰기, 너와 내가 사는 세상을 고쳐 읽는 글쓰기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게다가, 그 최전선에서 직접 썼던 학인들의 글을 실어 현장감을 더했다. 


정리하면, 이 책에는 ‘글쓰기의 철학’이 짙게 담겼다. 그렇다고 쓰기의 ‘기술’을 빠뜨리지도 않았다. 유려한 글을 위한 비기를 압축해서 전수한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사람은 이 책에 실망할 것이다. 자소서 비법에 갈급한 사람, 글쓰기 책을 자기 계발서처럼 써먹고 싶은 사람, 글쓰기를 발판으로 명성과 돈을 구하는 사람. 반면 이런 사람은 이 책이 반가울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 삶의 끝에서 시작하여 사람에게 닿으려는 사람.


한마디만 더 하자. 저자는 부록으로 “글쓰기 수업 시간에 읽은 책들”을 소개해두었다. 시, 소설, 산문, 르포, 인문 등, 다양한 장르에서 60여 권의 책을 추렸다. 목록 자체도 빛나지만, 더 빛나는 것은 책마다 적어둔 서너 줄의 소개글이다. 예를 들어 백석의 시집은 이렇게 소개한다. “읽을수록 뭉클해지는 언어들의 성찬. [중략] 한 편씩 낭독하는 순간, 그곳이 고향이다.” 소개글을 읽으며 연신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맛집 리스트를 확보한 사람처럼 달큼한 포만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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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평균 14권을 더 구입하면 전체 0.1%에 든다고 하네요. 그냥 저는 0.5% 선에서 만족(?)하겠나이다. 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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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첫 주문일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뒤졌습니다. 2007년 3월이더군요. 10년 넘게 애용했다는 얘기고, 심지어 플래티넘 등급을 유지 중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껏 제 마음 속 1위 서점은 알라딘입니다. 사람 나이 18세이면 낭랑한 나이라고 하죠. 굴러가는 낙엽에도 까르르 거릴, 참 좋은 시절입니다. 18주년을 맞는 알라딘과 독자들 모두, 즐거운 독서지절(讀書之節)이길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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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전면개정판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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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에 바치는 부끄러운 고백


글_ 김주경 (2017년 5월 30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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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반환점을 돌았을 때, 내 맘과 가까운 사람이 내게 물었다. 80년 5월의 광주를 아느냐고. 그는 태생적으로 광주의 아픔을 체감한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 예상했다는 듯 그가 대답했다. 실망도 체념도 아닌 담담한 목소리였고, 익숙하다는 반응이었다.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던 적이 또 있을까? 나는 간신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더 모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노라고 덧붙였다. 지금부터의 고백은 그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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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하더라도 변명으로 글을 연다. 나는 서울올림픽의 해에 (당시엔 국민학교라 부르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80년대의 끝자락이었지만, 여전히 반공교육이 남아 있었다. 반공 글짓기, 반공 표어 짓기, 반공 그림 그리기와 같은 대회가 줄곧 열렸다. 반공 그림 대회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친구의 뛰어난 그림을 보고 좌절했던 어린 마음이, 그 기억을 마음에 새긴 탓이다. 친구는 한국전쟁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국군의 뒷모습을 그렸다. 그것이 여덟 살 난 아이들에게 주어진 소재였다.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죽은 이승복 어린이는 우리의 어린 영웅이었다. (나는 이승복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한마디로 나는, 전통적으로 보수당의 텃밭인 곳에서, 보수적인 정치 성향의 부모님 밑에서, 반공 교육의 마지막 세대로 살았다. 그 후로 제도권 교육을 받으며, 역사에 무지한 상태를 유지했다. 역사와 정치에 무관심했고, 어린 시절에 받은 반공교육만 가슴에 남아 ‘좌(左)’에 대한 심리적 반감을 일으켰다. 김대중, 노무현에 대해, 전라도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과 실체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내 나이 스물여덟,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당연히(라고 써서 미안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민주화운동’이란 표현보다 ‘사태’ 혹은 ‘폭동’이란 표현에 익숙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사 한 줄 모르면서 찝찝하게 여겼고, 5·18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잘못은 했겠지’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동시에, ‘괜히 국가가 폭력을 가했겠어?’라고도 생각했다. ‘세상에 털어서 죄 없는 사람 없듯이, 역사에서 전적으로 잘못한 쪽이 어디 있겠어?라는 양비론적 사고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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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책 얘기를 시작한다. 책은 공권력이 시민을 압살한 사건의 기록이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생생하다고들 하는데, 이 책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무장한 군인들은 학생, 어른,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무차별로 폭행했다. 골목을 쫓아가 때리고, 버스에 들어가 때리고, 운전석에서 끌어내 때리고, 옷을 벗기고 때렸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자국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살상했다. 그중에 압권은 다음 대목이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그 순간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 1시 이전의 발포가 급작스런 상황에서 이뤄졌다면 1시부터는 명령에 따라 ‘집단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 (중략) 그때 곽형렬(21세, 전투경찰)은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모두들 부동자세를 취하니까 흥분되어 있는 시민들을 잠시 멈추게 하려고 애국가를 울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국가가 채 끝나기 전에 한꺼번에 여러발의 총성이 울렸다. 탄피가 아스팔트 위에 툭툭 떨어지고 분수대 주변에 연기가 자욱했다. (중략) 장교인 듯한 사람이 소리쳤다. / “이 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 공수대원들은 그때부터 조준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때까지 시민들에게는 총이 없었다.”(200-201쪽)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은 무의식적으로 예의를 표하고, 공권력은 ‘조준사격’을 자행한다. 국가주의의 비극을 이보다 생생히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신(神)이 된 국가는 애국가로 재림했고, 신의 대리자인 군부는 저항 세력을 신성 모독으로 몰았으며, 공권력은 사제의 신분으로 이단자를 처단했다. 국가가 종교의 권위를 취할 때 세상이 경험하는 기괴함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초 세계사(世界史)는, 국가주의의 출현과 기승, 파괴력과 몰락을 보여줬다. 그 어떤 형태의 국가주의를 향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수백만의 피를 흘려 인류가 얻은 교훈이다. 우리는 뭐가 부족해 그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다시금 피를 흘려야 했을까....... 


2017년 5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단 한 건의 유혈사태 없이 최고 통치자를 끌어내렸다. 나 역시 지난가을 내내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수줍게나마 ‘증언’하자면,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은 질서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우리는 시위를 즐기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짧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국가의 폭력은 언제나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더는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이 땅의 민주주의가 80년대에 빚지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혹자가 역사를 왜곡하려 해도, 질문과 증언과 행동을 시작한 대중을 막을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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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의 말’에서 저자 대표는 이렇게 썼다. “5·18 왜곡세력들은 (중략) 이 책의 집필과정에 대한 왜곡과 집필자들에 대한 비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4쪽) 저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책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가시지 않은 것으로 안다. 여기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설명을 위해 우회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마가복음>은 기독교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가는 다소 유약한 젊은이였다. 그는 바울의 선교여행에 수행원으로 동행했다가 중도에 하차했다. 그 다음 선교여행 때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려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행 15:38, 새번역), 이 일로 두 위대한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다툰 후 갈라섰다. 게다가 마가는,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마가란 위인은 미덥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마가의 전력(前歷)을 이유로 마가복음을 비판한다고 해보자. ‘선교지에서 도망간 사람이 쓴 복음서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어?’ ‘예수를 배반한 제자의 제자라며?’라는 식으로 비판할 것이다. 이 비판은 설득력이 있을까? 마가복음이 마가 개인의 저작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어디 가서 ‘복음서는 마가 개인의 저작이다’라고 말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삼가시라. 복음서가 경전(經典)이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서는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여러 증인의 증언이며, 교회 공동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신약학자 보컴(R. Bauckham)은 복음서를 ‘증언’으로 보며, “증언으로 이해하는 복음서는 예수라는 역사 속 실체에 다가가는 방법으로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한다(리처드 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새물결플러스, 2015), 27쪽).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현대의 역사비평 철학과 방법의 발전 양상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경향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곧 증언을 신뢰하는 것을, 역사가가 독립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리에 혼자 힘으로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경향이다. 하지만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증언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위의 책, 같은 쪽)


복음서가 증언의 산물이라면, 복음서의 정당성을 마가 개인에게만 귀속할 수 없다. 그 속에는 마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녹아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는 증인들의 증언에 기초한다. 예수를 경험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예수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기억했다. 그 기억이 모여 복음서의 뼈대가 되었다. 이로써 자기 손으로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던 예수의 말과 행적이 책으로 남을 수 있었다. 예수는 죽기 전 마지막 의식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를 기억하여라.”(고전 11:24, 새번역) 초대 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 


『넘어넘어』의 85년 초판은 약 300쪽인데 비해, 이번 개정판은 600쪽에 달한다. 거의 두 배로 늘었다. 725번까지 이어지는 미주만 70쪽 분량이다. 30년의 세월을 반영하느라 분량이 늘었고, 늘어난 분량은 더 많은 목소리를 끌어안았다. “(전략) 기록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몇몇 사람이지만 취재에 응하고 자신이 겪은 바를 구술한 시민들이 또한 함께 참여했으니 이 기록이야말로 동시대 민중의 증언이라고 할 만했다.”(10쪽) 누구의 말마따나, 양의 증가는 질의 향상을 수반한다. 기록으로 남은 증언은 시대의 어둠을 알렸다. 복음서가 증언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넘어넘어』 또한 증언의 산물이다. 복음서가 예수의 메시지를 매개했던 것처럼, 『넘어넘어』는 민주주의의 도래를 매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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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으로 역사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무지이며 오만이다. 다만 피와 눈물로 80년대를 지켜내고 기억한 사람들을 지금 여기서 기억하겠노라 다짐할 뿐이다.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면, 기꺼이 투쟁하겠다. ‘기억하라’를 최소한의 당위로 삼겠다. 역사의 진보에 이름없이 기여하겠다. 이것은 시대의 증언에 바치는 부끄러운 고백이나, 부끄럽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겠다. 부끄러워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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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의 의 개념 연구 - 신학적·윤리학적·비교문화적 고찰 한국 구약학 시리즈 2
유선명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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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의(義)가 입맞출 때>


글_ 김주경 (2017년 4월 15일)



성서에는 ‘의(義)’라는 말이 의외로 많이 등장한다. 의, 공의, 정의, 의인 등으로 분화되긴 하지만 말이다. 단순 비교해 봐도 체데크 어군은 헤세드보다 등장 빈도수가 높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가 신학계의 화두로 부상하며, 하나님 보좌의 두 기둥인 미슈파트와 체데크에 관심이 모아졌다(시 89:14; 97:2). 그럼에도 미슈파트와 체데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은(한국어 기준으로) 찾기 어려웠다. 몇몇 구약학자의 저작이나 혹은 아브라함 J. 헤셸의 『예언자들』을 통해 짧게 맛볼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의’ 개념을 연구한다는 이 책의 제목만으로 무척 반가웠다. 


이 책은 (제목대로) 잠언의 ‘의’ 개념을 연구한다. 저자는 ‘의’가 정의(justice)와 (의미를 공유하면서도) 다르다고 보면서, ‘의’ 개념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그 가설에 따르면 ‘의’는 “구체적인 행동을 넘어 인간 혹은 신적 개체 전체가 갖는 통합적 특성으로서 도덕적 선택에서는 반듯함으로, 사회적 거래에서는 공정함과 자비심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51,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 간단히 말해 ‘의’는 개별 행동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어떤 품성으로써 표출된다. ‘의’에 대한 저자의 가설은, 사실상 책의 핵심 주장이자 결론이다. 


2장에서 저자는 ‘의’ 개념에 대한 선행 연구사를 탐색한다. 학계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의로움을 규범의 문제로 보는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공동체 내부의 관계성으로 보는 입장이다. 쉽게 말해, 의로움을 판별하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느냐, 아니면 공동체의 특수성이 반영됐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규범 중심 이론)은 체데크(의로움)란 말의 뜻이 무엇인가에 집중했다. 반면 후자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를 서로 충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이 “애매하고 주관적으로 변질될 위험이 다분하다”고 평가한다(64). “의로움의 개념이 풍성하고 탄력적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객관적 정의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66).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우주의 구성 요소 간에 경계선을 긋는 것으로 표현되었듯이 공의로움이라는 개념의 본질도 분별하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67) 이외에도 의로움을 ‘영혼의 순전함’, ‘구원과 능력’, ‘세계 질서’, ‘인과율’, ‘사회 개혁’ 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저자의 눈에는 어느 것도 마뜩치 않다. 이 장의 마지막 두 문장에 저자의 요지가 압축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잠언은 의로움을 사회적 규범보다는 개인의 가치 체계로 취급한다. 의로움은 가장 근본적인 미덕이며 품성 개발의 열쇠가 된다.”(86)


자연스레 3장에서는 잠언이 묘사하는 의인의 면면을 살펴본다. 잠언은 인간을 의인과 악인이라는 이진법적 구도로 이해한다. 중간 지대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행동보다 품성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그렇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척도는 개별 행동이라기보다 전인적인 면모이다. 구약의 의인(차디크)는 법률적, 사회적, 제의적 맥락에 따라 의미망이 달라지는데, 그 어느 것도 잠언의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잠언이 말하는 의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유용성보다는 정당성을 기준으로 도덕적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다(111). 그에게는 “의로워지려는 욕구”가 있다. 그는 유력하고, 공감하며, 현명하고, 의를 추구하며 기쁨을 느낀다. 


이 ‘욕구’라는 단어가 연결고리가 되어 다음 장을 이끈다. 잠언이 피교육자를 의인으로 만드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다. 잠언은 피교육자가 모범적 인물을 욕망하여 모방하도록 한다. “잠언의 생도는 의인이라는 인간상을 연구하고 모방해 내면화해야 한다.”(163) 잠언은 인간이 욕구하는 존재임을 긍정하며, 그 욕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이끈다. 단순히 의로운 덕목을 실천하는 것과 의를 욕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은 단순히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를 욕망하는 사람이며, 의를 욕망하는 태도는 그것 자체로 그의 품성이 된다. 


5~7장은 약간의 사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5장에서는 부(富)에 대한 잠언의 평가를 살피는데, 그 결론이 매우 유익하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면, “잠언은 가난이 부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부를 갖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 가치관은 더 고등한 가치 기준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데, 의로움을 향한 욕구가 가난 대신 부를 택하려는 마음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기준이다.”(192) 6장은 잠언과 이집트 지혜문헌(「아메네모페」)을 비교하여, 잠언의 의로움이 인성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이 더욱 도드라진다고 주장한다(232). 7장은 시편과 비교하는데, 두 책 모두 의를 품성으로 이해하지만, “의로움이 사람을 구원과 행복으로 ‘이끈다’는 것이 시편의 가르침이라면, 잠언은 의로움이 곧 행복‘이라고’ 가르친다는 데 차이가 있다.”(267) 


여기까지가 책의 내용인데, 결론은 의외로 싱겁다. 1장의 가설이 옳았다고 결론짓기 때문이다. 결론이 싱겁다고 해서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밝혔듯) 사회정의와 구별되는 ‘의’ 개념을, 조직신학이 아닌 성서신학의 관점에서, 그것도 예언서가 아니라 지혜서를 중심으로 훌륭히 검토했다. ‘의’ 개념과 관련된 저작도, 지혜서 관련 저작도 부족한 한국 신학 생태계에서, 이 책은 발군의 가치를 확보했다. ‘의’를 키워드로 잠언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이 책은 학위논문이면서도 문체가 깔끔하고 설명이 어렵지 않아서, 찬찬히 읽는다면 비전공자가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비평이라기보다,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는 정도로 몇 자 써두겠다. 먼저, 체데크를 연구하며 왜 미슈파트와 연관성을 살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미슈파트와 체데크는 빈번히 쌍으로 등장하며, 그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 체데크가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의로움이라면, 미슈파트는 체제(시스템) 속에서 수행되는 의로움이다. 미슈파트가 체데크의 부족분을 충족할 때, 의로움을 규범과 관계 속에서 살폈던 2장의 논의를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규범적 의로움은 미슈파트에게 넘겨주고, 관계 속의 의로움은 체데크에게 할당하면, 두 개념이 충돌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미슈파트를 거론하면 체제(시스템)로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저자는 의인은 다른 의인을 욕망하며 모방하는 것으로 형성된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것뿐일까? 의로운 삶은 비단 잠언만의 주제가 아니라 성서 전체의 관심사다. 오경에서부터 미슈파트와 체데크는 이스라엘 민족의 생래적 의무였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체다카)와 공도(미슈파트)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받은 법(토라)의 핵심은 체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었다(편의상 체데크와 체다카를 혼용한다). 토라는 법이며, 법은 체제(시스템)이다. 잠언은 솔로몬이 아들에게 전하는 교훈의 형식인데,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교훈 또한 ‘토라’이다. 그렇다면 ‘토라’가 사람을 교훈하여 빚어내는 데에는 체제(시스템)의 역할도 한 몫 하기 마련이다. (체제라는 말이 불편하면 공동체로 바꿔도 될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런 사소한(?) 아쉬움들을 뒤로 하면,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강력하다. 책의 논지처럼, 의로움 혹은 의인이 ‘품성’이라면,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선포하는 구원 공식(예수 믿고 천국 가자)을 뒤흔든다. 피안의 세계에 천착하는 한국 교회는 인간의 품성을 운운하는 잠언의 가르침을 소화할 깜냥이 될까? 저자는 의로운 삶이 지혜로운 삶과 상통한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가르쳐주었다. 독자의 다음 과제는, 의로운 삶이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저자가 책의 72-75쪽에서 거론한 ‘의’와 구원의 상관성 문제가 아니라, 의로움이 ‘예수 믿고 천국 가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의 문제이다.) 고민이 깊어진다면, 잠언 그리고 ‘의’ 개념은 한국 교회의 천박한 구원론을 수정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지혜로운 삶과 의로운 삶의 접점을 강구하는 모든 신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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