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박성원, <댈러웨이의 창>
김동식의 문학이야기
이미지의 끝없는 연쇄 속에 놓여진 삶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1993년부터 하이텔의 언더그라운드 뮤직 동호회에 드나들던 이석원은, 글이나 채팅을 통해 자신을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의 리더라고 소개합니다. 그때까지 ‘언니네 이발관’은 존재해 본 적이 없는 ‘가상’의 밴드였고, 그 이름은 그가 고등학교 때 빌려 보았던 B급 성인영화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 전영혁 씨가 ‘언니네 이발관’을 전위음악을 추구하는 밴드로 소개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정말로 그런 밴드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석원은 실제로 4인조 밴드를 조직해서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앨범까지 발표하게 됩니다. 기타를 잡은 지 한 달 되는 사람이 기타리스트였을 정도니, 그들의 공연은 ‘얼마나 못하는지 보여주겠다’라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공연장은 실험적인 밴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야기는, 박성원의 소설집 『나를 훔쳐라』에 실려있는 「댈러웨이의 창」의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신도시 주변의 야산에 이층집을 짓고 사는 독신 남자이고, 사진 촬영이 취미인 사람입니다.
이층을 세놓았는데, 컴퓨터와 스캐너로 광고용 스틸사진을 편집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 남자의 집들이에 초대되었다가, 사진작가 댈러웨이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처음 보았을 때 댈러웨이의 사진은 일반사진관의 증명사진보다 형편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확대해 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어느 농가의 식탁을 찍은 사진에서 스푼을 확대하면, 놀랍게도 슬라브 민간인을 살해하는 정부군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댈러웨이의 사진이 갖는 전위적인 성격을 두 가지 정도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그의 사진이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찍고 있다는 점입니다. 식탁이 아니라 스푼에 비쳐진 이미지를 포착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댈러웨이의 사진은 우리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가 또 다른 시선이라는 점입니다. 그의 사진은 어떤 사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바깥에 놓여져 있는 그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식탁을 보고 있는데, 사진은 학살장면을 보고 있으니까요.
다시 작품 내용입니다. 사진 기술과 주제의식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댈러웨이 때문에 세상은 발칵 뒤집히고, 자신의 사진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있던 주인공은 사진을 그만두기로 결심합니다. 기자재를 기증하기 위해 사진 아카데미에 들렀다가, 댈러웨이는 실제로 존재해 본 적이 없는 사진작가이며 사진은 컴퓨터로 합성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물론, 이층에 세든 남자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작가의 이름을 만들고, 합성사진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거지요. 여기까지는 장난입니다. 하지만 장난삼아 만들어낸 허깨비가 사람들의 믿음 속에서 스스로 증식하는 독립적인 실체로 변모해 가는 장면은,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어떤 흐름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발 없는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기호(記號)나 이미지 그 자체를 하나의 실체라고 믿게되는 현상을 시뮬라크르(simulacre:模擬)라고 합니다. 이미지가 실재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이 전통적인 생각이라면, 시뮬라크르는 이미지의 끝없는 연쇄와 증식 속에서 실재를 찾을 수 없게된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정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단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합니다만, 이미지의 끝없는 연쇄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시뮬라크르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작품이라는 지극히 소박한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