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책 둥지


안대회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책을 읽던 중 우연히 일석서소(一石書巢)란 장서인을 보게 되었다. 일석이란 호를 쓴 작고하신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의 도장임이 분명하다. 장서인을 보노라니 선생의 작은 체구와 단아한 풍모에 일석서소란 서재 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서재를 서소(書巢)라 쓴 것이 특히 그렇다. 서소(書巢)는 말 그대로 책 둥지다. 둥지에 들어앉은 새처럼 작은 방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는 기분이 절로 들게 만드는, 그 포근하고 호젓한 느낌이 좋다.

흔히 공부방을 서재(書齋) 서실(書室) 서옥(書屋) 서루(書樓) 서방(書房)이라 부른다. 그 이름의 뉘앙스가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같이 책이 있는 집을 가리킨다. 그런 방도 옛날에는 규모가 큰 것이 많지 않았지만 책 둥지만큼 작고 아늑한 것은 없다.

이 서소라는 말은 송대의 유명한 시인 육유(陸游·1125~1210)가 처음 쓴 것이다. 늙도록 책을 좋아한 그는 책이 어지럽게 뒹구는 공부방에 기거하면서 그 방에 서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랬더니 하필이면 공부방을 새가 연상되게 둥지라고 하느냐고 친구가 핀잔을 했다. 그 친구에게 육유는 이렇게 대꾸했다.

“내 방 안에는 책이 궤짝에도 들어 있고, 앞에도 흩어져 있고, 침상에도 널려 있네. 상하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책 아닌 게 없지. 나는 먹고 마시고 돌아다닐 때, 병에 걸려 끙끙 앓을 때, 슬프고 시름에 차 있을 때, 분하고 통탄스러울 때 그 언제고 책과 함께 있지 않은 적이 없다네. 손님은 오지 않고, 처자식은 기웃거리지 않고, 비바람이 치는지 우박이 내리는지 모를 때도 있네. 어쩌다 나가볼까 염을 내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들이 쌓아 놓은 마른 장작처럼 포위해서 나가지 못할 때도 있네. 그런 때면 문득 혼자 웃고는 ‘이야말로 내가 말한 둥지가 아닐까!’라고 자문자답한다네.”

책에 둘러싸여 지내는 육유의 책 둥지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하다. 책에 치여 움직일 수도 없는 서재이므로 새 둥지처럼 작고 비좁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일 게다. 육유는 그 친구와의 대화를 ‘서소기(書巢記)’란 글로 엮었다. 그러니 서소는 다른 서재 명칭과는 달리 육유의 공부방 이름이다.

하지만 육유처럼 책에 파묻혀 지내는 삶을 동경하기도 하고, 작고 투박한 둥지의 느낌 때문인지 조선의 선비들은 자기 공부방을 서소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명종 때의 이름난 시인인 소세양(蘇世讓·1486~1562)은 짧은 시를 지어 ‘늙고 게을러 절로 세상과는 멀어지니/초가집 문 밖으로 지팡이 나가본 지도 오래다./만권의 책 둥지가 좌우를 에워싼/내 생애는 책 파먹는 좀벌레 신세!(衰?自與世情?, 杖?何曾出草廬. 萬卷巢成圍左右, 生涯眞似?書魚)’라고 했다. 소세양도 육유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세상사에 초연한 채 즐겨 책을 읽었다. 그런 생애를 책이나 파먹는 좀벌레가 아니냐고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오히려 작은 둥지 속에서 큰 세계를 만끽하는 몰입의 즐거움을 자랑하는 말로 들린다. 일석 선생도 육유나 소세양과 같은 심경으로 자신의 서재를 서소라고 하지 않았을까? 주변에도 저들과 같거나 오히려 저들보다 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책 둥지라는 말이 저분들처럼 자기 공부방을 가지고 책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에게만 어울리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번 여름에도 큰 서점에 몇 차례 들렀는데 그때마다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책에 정신을 놓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눈에는 여기저기 구석에 틀어박혀 책 읽는 사람들이 둥지를 틀고 들어앉은 새의 모습처럼 보인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내 작은아이도 가끔 책을 읽을 때면 책상이 아닌, 책상 아래, 의자 아래, 베란다 한쪽 구석, 소파 뒤쪽의 작은 틈 속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읽는다. 나와서 읽으라고 성화를 해도 대꾸조차 않는다. 그런 장면을 보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책 둥지를 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뭇가지 끝에 붙어 있는 새 둥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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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긋 2004-08-2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되네요 ^^
어릴 때 골방에서 혼자 책 읽던 기억이 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