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진리란 믿음으로 충만한 견해









유리창은 짙푸른 빛이 되었고, 나의 말동무의 뼈가 앙상한 얼굴은 더 어두워지며 양 눈 아래 움푹 패인 자리에 특히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멍하게 헤매던 그의 시선이 초점을 찾고 깊어진 것같이 보였다. 장황한 푸념의 말들이 의미심장하게 들리기 시작했고, 거슬리던 탁한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중충한 색의 성기게 난 턱수염 가닥을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할 정도로 사정없이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그가 말했다.

“자유를 얻고 기뻐하는 인민을 나는 10년 전 꿈속에서 보았지요. 당시 나는 오룔 감옥에 앉아 있었고, 아직도 1905년의 감동이 생생했지요. 오룔 감옥에서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들을 때려죽였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그 꿈에서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개중에는 내 제자였던 식자공 보리소프도 있었지요.) 너덜너덜해진 누군가의 몸을 몽둥이로 들쑤시고 휘젓는 겁니다. 내가 보리소프에게 물었지요. ‘왜 사람을 고문하는 건가’ ‘이자는 적입니다!’ ‘그렇지만 그도 인간 아닌가’ ‘뭔 소릴 하는 거요’ 보리소프가 소리치면서 나를 향해 몽둥이를 번쩍 들며 그러는 겁니다. ‘이놈 죽여라!’”

“하지만 몽둥이가 손에서 굴러떨어지더니, 그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키며 기쁨에 젖어 속삭였습니다. ‘보세요, 저기. 그들이 가고 있어요. 이제 끝났어요. 그들이 가고 있다고요!’”

“한껏 고무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이 지나가고 있었고, 뭔가 부자연스러운 별처럼 반짝이는 수천 개의 눈들이 보였습니다. 바로 그 눈들을 보고서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느꼈습니다. 인민들이 부활했구나! 이해되십니까? 부활하여, 정신적으로도 변화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나는 곧 그들 사이로 사라집니다. 마치 확 불타올라 순식간에 남김없이 타 버리듯이 말입니다.”

나의 손님은 연필로 책상 가장자리를 두드려 그 메마른 소리에 귀 기울이더니 또다시 책상을 두드렸다.

“이제 나는 승리에 기뻐하는 인민을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나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집니다. 인민이 승리를 기뻐하고 있건만, 꿈에서 내가 보았고 내가 의미를 두었던 그 새로움을 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것이 없는 것이지요. 인민이 승리를 기뻐하고 있고, 내가 이 승리를 있게 하느라 내 모든 힘을 바쳤건만, 지금 나는 그 승리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창밖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고즈넉하게 희미한 저녁기도 소리가 울려왔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기관총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기술을 배우고 있는가 보다.

“어쩌면 제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승리를 기뻐할 줄을 전혀 모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싸움을 위해, 희망을 위해 에너지를 다 써 버려서 즐거움을 누릴 능력이 죽어 버렸을 수도 있지요. 어쩌면 단지 무기력일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실은 내게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들끓는 원한과 보복뿐입니다. 기쁨,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기쁨 같은 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승리에 대한 믿음 같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눈먼 사람처럼 눈을 껌뻑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마치 콜럼버스가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는데 아메리카가 썩 그렇게 그의 맘에 들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떠났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느끼고 있다. 그는 개로서의 생의 마지막 날에 다다른 경비견과 같은 처지인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충직하게 자기가 하는 일의 신성함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으르렁대고 짖어 왔건만 그에 대한 보답이란 고작 발길질뿐. 갑자기 자신이 해 온 일이 별것 아니며 아무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무엇을 위해 ‘책임감’이라는 사슬에 묶여, ‘의무감’이라는 어두컴컴한 경비 초소에 들어앉아 있었던가? 충직한 늙은 개는 이제 제정신을 잃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 중 또 다른 누군가 혁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낭만주의자처럼 그녀를 숭배했지만, 어떤 파렴치한 놈이 나타나 우리 연인을 처참히 욕보였습니다.”






***

  옆 레일의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며 차축이 거슬리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낸다.

  “리가-이가-이가, 리가-리가-이가…….”

  기차 바퀴들이 신호를 보내듯 규칙적으로 레일을 두드린다.

  “길-동-무, 길-동-무…….”

  길동무. 여기까지 나의 기차 여행을 함께해 준 이 사람에겐 색이라고는 없어 밝은 태양 아래서는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안개와 그림자로 빚어진 듯 그의 빈약한 얼굴 윤곽은 분간하기 어려웠고, 눈은 무거운 눈꺼풀로 덮여 있었으며, 주름진 헝겊 같은 뺨과 헝클어진 턱수염은 거친 삼베로 서둘러 만들어 놓은 듯 보였다. 그의 머리에 얹힌 구겨진 회색 모자 역시 그런 느낌을 더해 주고 있다. 그에게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 그는 다리를 웅크려 올리고 객실 의자 구석에 앉아 성냥개비로 손톱 밑을 파면서 감기에 걸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린다.

  “진리란 믿음으로 충만한 견해라 할 수 있지요.”

  “모든 견해가 그렇다는 말인가요?”

  “그럼요, 모든 견해가…….”

  “이가-이가-리가…….”

  차창 밖으로 가을 아침의 어스름 속에서 검은 나뭇가지들이 팔락거리고, 나뭇잎과 불꽃이 날리고 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이 있지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 이 말이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면 진리인 듯합니다. 지금 이 아이들 입이 아주 시거든요. 우리가 모든 것을 따지고 분석하는 태도라는 신 포도를 먹었는데,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부인하는 태도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는 범포 외투 자락을 당겨 뾰쪽 세운 무릎을 덮어 감싸며 성냥개비로 정성스레 손톱 밑을 쑤시며 말을 이었다.

“적군(赤軍)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아들이 그러더군요.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눈을 좀 뜨고 똑바로 보세요. 이론적으로 보자면 우리 삶의 모든 기반이 아버지 같은 사람과 아버지 세대의 다년간에 걸친 무분별한 비판 때문에 진작 깡그리 파괴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지키려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아들이 그리 똑똑하지는 못합니다. 책에서 주워듣고 어쭙잖게 자기 생각을 갖긴 했지만 정직한 녀석이었지요. 그 아이는 레닌의 테제가 발표되자마자 볼셰비키가 되었습니다. 아들놈이 옳았지요. 녀석은 부정과 파괴의 힘을 믿었거든요. 나도 이성으로는 볼셰비즘에 찬성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반혁명 분자로 체포되었을 때 체카66의 조사관한테도 그렇게 말했지요. 조사관은 젊은 사람으로 꽤나 멋쟁이였는데, 틀림없이 법률가였을 거예요. 나를 심문하는 솜씨가 아주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유데니치67군과의 전선에서 죽었다는 걸 알고 나를 꽤 우호적으로 대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그냥 쏘아 버리면 좋겠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 가슴과 이성 사이의 모순에 대해 암시하는 말을 했더니, 자기 앞의 종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그가 넌지시 말하더군요. ‘당신 아들한테 보낸 편지를 보고 우리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게 당신 형편에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내가 물었지요. ‘그럼 총살인가요’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그렇게 되기가 아주 쉽지요. 우리가 이 지루한 일을 정리하도록 당신이 좀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이오.’ 거리낌 없이 이렇게 대답하면서 오히려 뭔가 미안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더군요. 나도 따라 웃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의무를 다하려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한층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나를 대하며 이러는 겁니다. 그 이상 당연한 게 없다는 듯 딱 잘라서 말이에요. ‘아마 당신에겐 죽는 게 더 낫겠지요? 그런 것 아닙니까? 살면서 자기 안에 그런 분열을 안고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사과하더군요. ‘죄송합니다. 일과 상관없는 질문을 드려서요.’”

“이가-리가-리가, 이가-이가.” 차축이 삐걱거린다.

하품을 하고 몸을 움츠리며 남자는 창밖을 내다본다. 빗줄기가 창유리 위로 흐르고 있다.

그에게 묻는다.

“그래도 그 사람이 당신을 풀어 줬네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말입니다.”

자신의 삼베 얼굴을 내게로 돌리더니 남자는 약간 비꼬며 대드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조사하고 있던 몇 가지 문제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좀 주었지요…….”

“길-동-무, 길-동-무.” 기차 바퀴가 레일 이음새마다 덜컹거린다. 비는 드세어지고, 차축은 한층 더 날카롭게 삐걱거린다.

“이-구이-구이구-이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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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러시아 대표 지식인 막심 고리키 저널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고결한 의지를 읽는다!


가난한 사람들












* 1/29(월)부터 격일 업로드됩니다. (총 5회 진행) 

* 2월 9일 출간될 <가난한 사람들> 미리 읽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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