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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평점 :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1993)은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이다. 본문은 총 3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 장 '아이슬란드의 혹한'에는 표제작인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 쓰인 배경을 인문 에세이 형태로 작성했다. 두 번째 장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이 책의 요체가 되는 동화이다. 세 번째 장은 '메두사의 소론'으로 신화적 요소를 모티브로 한 키냐르의 시론(詩論)이 담겨 있다.
재봉사 쥔느를 흠모하던 콜브륀은 그에게 아내가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쥔느는 자신의 벨트와 동일한 것을 만들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제안을 건다. 몇 주가 지나도록 동일한 벨트를 만들 수 없어 절망에 빠졌던 콜브륀에게 갑작스레 정체 모를 영주가 방문한다. 동일한 벨트를 소지하고 있던 영주는 콜브륀에게 벨트를 건낸다. 그대신 1년 후 재방문하였을 때 영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자신만만했던 패기와는 달리 콜브륀은 아무리 그 이름을 기억해 보려고 해도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질 뿐이었다. 불안에 휩싸여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던 콜브륀은 자신의 남편이 된 쥔느에게 그 사실을 자백한다. 쥔느는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지옥의 왕이었던 영주의 이름을 알아낸 쥔느는 기쁜 마음에 콜브륀에게 향하며 수없이 그 이름을 되뇌어 보지만, 집에 당도하면 그 이름은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질 뿐이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오고 쥔느는 또다시 영주의 이름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1년 후 같은 시각 콜브륀의 앞에 영주가 나타나는데……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소생하듯 사라지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작가의 이데올로기를 여실히 반영한다. 통용되는 수많은 언어들의 장벽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의 줄기에서 키냐르는 자신만의 언어를 떠올려 구현하였다.
잊히기를, 잊어 버리기를 거부하는 언어의 기능 부전. 불화하는 낯선 낱말 사이에 혼재하는 찰나적 기억은 망각의 지대에서 소멸하고, 나의 입속에서, 그대의 혀끝에서 의미없이 맴도는 이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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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는 그것을 노래하는 음악가, 그것을 발음하는 배우, 그것의 형태보다 의미에 몰두해서 따라 읽는 독자, 즉 그것을 다시 전사(轉寫)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쓴 작가에게보다 덜 어렵게 느껴진다. 작가는 단어를 쓰기 위해 그것을 탐색한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얼음 덩어리 앞에서 일시 정지된 칼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고정된 시선과 경직된 자세로 빠져나가는 단어를 향해 두 손을 내밀어 애원하는 자이다. 어는 이름이나 하나같이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다. 이름이 필요할 때, 그것의 작고 까만 육체를 소생시켜야 할 사유가 발생할 때 그것을 소환할 줄 아는 것이 예술이다. - p.13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으나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이름은 그녀의 입술 주변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데 있었고, 느껴지는데도, 그녀는 이름을 붙잡아서, 다시 입속에 밀어넣고, 발음할 수가 없었다. - p.37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혀가 꽉 끌어안지 못하는 무엇에 대한 노스탤지어이다. 노스탤지어가 최초인 이유는 언어의 결여가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린 대상에 앞서 존재하며, 세상보다도 먼저 나타난다. - p.78
시(詩)란 오르가슴의 향유이다. 시는 찾아낸 이름이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될 듯싶다. 시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반대이다. - p.84
📌덧붙임 : "당신의 책을 꼭 한 권만(한 권이라도) 읽으려는 독자가 있다면 무슨 책을 권하겠느냐?" 키냐르는 역자의 질문에 주저 없이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생'을 탐독할 차례가 다가왔다. 그의 글을 읽으며 점점 그 깊고도 놀라운 통찰력에 빠져든다.
2016. 2. 21
키냐르의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다른 책 1000권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ㅡ에드몽 샤를 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