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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평점 :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인간의 가장 구석진 내면을 말한다. 길을 잃은 어떤 이가 낮은 자세로 웅크려 자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 인간에게 어둠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말할 수 없는 비밀,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소설가는 비가시적인 어둠을 하나의 이야기로 형상화하는 사람이다. 어둠은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사변적이다.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내면을 작가 고유의 색채로 그려 내는 데 탁월한 소설가로 이승우를 꼽을 수 있다. 마치 현실에 살고 있을 것 같은 '박부길'이라는 남자는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소설가라는 옷을 입은 주인공으로 얼굴을 내보인다. 소설가가 쓰는 소설 속의 또 다른 소설가는 타인과 연결되기도 하고 유폐되기도 하는 비사회적인 '화자'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은 나의 숨결과 혼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작품이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암시하고 있듯 이승우는 자전적인 요소를 소설 도처에 흐트려 놓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모티프가 소설가 같은 특정 인물에게 해당되는 그런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는 소설을 읽는 독자와도 암묵적이면서 심층적으로 예정되지 않은 어느 접점을 거쳐 연결되기에 이른다. 궁극적으로 『생의 이면』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내면은 타인과 분리되고 싶은, 태초의 어둠과 적막이 서린 어머니의 자궁으로 귀의하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연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존재의 형상은 삶이라는 속박된 굴레에 찌든 우리 모두의 얼굴, 그 내면을 닮아 있다.
🔖어떤 책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우리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악몽이라고 비유한 글을 읽었다. 제임스조이스였을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고, 그일지라도 본래의 뜻에 상당한 왜곡이 가해졌을지 모른다. 기억은 사실의 편이 아니라 편들고 싶은 자의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편들고 싶은 자를 편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여서는 안 된다.
진실이 반드시 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을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책의 저자가 조이스라고 할 때,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서 발언한다는 뜻이다.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먼저, 대신해 버린 것이다.
글들은 '내 말'의 대언일 때만, 진실로 의미를 가진다. 그 밖에 다른 글들은 쓰레기거나 허수아비이다. 쓰레기는 용도가 폐기되어 버려진 것이고, 허수아비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삶, 곧 악몽, 눈 뜨고 꾸는, 그래서 더 끔찍한. - p.140
사방이 수렁일 때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이다. 그의 의식은 그의 어둡고 폐쇄적인 자아가 안락을 느끼던 단 한 곳을 기억해 냈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어두운 자아를 ㄴ기꺼이 품어 주던 자취방이었다. 그녀가 그의 삶에 끼여 들어와 빛의 세상으로 불러내기 전까지 그곳은 그의 성전이었다.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않을 든 낮은 천장,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북향으로, 그나마도 벽에 맞대서 뚫린 손바닥만 한 창문, 언제나 습기가 배어 눅눅한 느낌을 주는 방바닥…… 세상과 사귀지 못하고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불만투성이의 어두운 소년은 적의와 슬픔으로 얼룩진 대부분의 시간을 그 방의 어둠 속에서 보냈었다. - p.290
덧붙임 : 소설을 읽다 보니 화자가 너무 깊숙한 나의 내면까지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위태로웠던 나를 그리고 현재에 나를 마주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소설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만한 놀라운 가치의 발견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