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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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강의 신작 소설 『흰』은 작가가 2014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4개월을 지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작가가 분류한 '흰 것'의 목록은 총 65개의 스토리로 세분화되어 소설과 시의 경계를 넘나든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흑(黑)과 백(白). 그녀가 순수하고 하얀 어떤 것의 앞면 떠올릴 때 나는 어둡고 탁한 어떤 것의 뒷면을 생각했다. 행간을 떠도는 흩어진 기억의 편린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자 삶과 죽음의 희비가 교차하는 소실점과 마주한다.
탈각된 영혼, 그 존재의 시원과 경계의 바깥에 의미 없이 지나칠 찰나적 순간. 비가시적인 소멸의 물결은 점차 거세지고 축축히 젖은 그녀의 무릎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경계 안쪽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삶의 안과 바깥, 그 깊이를 헤아리는 공허한 시선이 달떡 같이 흰 과거의 어느 날에 머무른다. 광휘로이 빛나다 부서지는 슬픔의 무게에 포개어지는 시린 아픔. 덩그러이 놓인 침묵의 결은 소리 없는 몸짓으로 전이된다.
들숨과 날숨의 간극에서 예고 없이 찾아든 기억의 접경. 스산한 새벽의 적요가 스민 목소리가 어둠의 장막을 뚫고 시간의 주름으로 휘감긴다. 망각된 의식을 덮고 있던 하얀 무명천이 걷히는 순간이다. 그녀, 또다시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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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 p.21

거리를 걸을 때 내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 스쳐지나가는 표지판들에 적힌 거의 모든 단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 p.26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 p.83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 p.129

📌덧붙임 :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새근새근 잠든 둘째 딸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평화로이 잠든 천사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물밀듯 찾아들었다. 그저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몇 번을 되뇌이며 이미 사라졌거나 잊힌 나의 '흰 것'을 헤아려 보았다.

🎙"1994년 90퍼센트 이상이 폭격으로 파괴된 후 재건된 바르샤바란 도시에 머물면서 그 도시를 닮은 사람을 상상했다. 그 사람이 어쩌면 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로 잠깐 이 세상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에게 삶의 어떤 부분을 주고싶다면 감히 제가 줄 수 있다면 그것들은 아마 '흰 것'들일거라고 생각했다. 투명하고 깨져도 복원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지점을 책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 없는 투명함, 생명, 밝음, 빛, 눈부심 같은 것들을 주고 싶다" (출간 간담회 작가 인터뷰 중)

📚2016년 74번째 도서
2016.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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