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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철학은 서구의 개념이기에, 동양의 심학心學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이 동양의 시각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동안 동서간의 융합이 생길 열쇠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심리철학과 심리학이 비슷하지만 다른 영역이라는 것과 같다. 심리학이 인간 행위에 관한 과학적 연구이지만, 심리철학은 개념을 다룬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밝힌 몇 가지의 논리에 관한 접근이 그의 심리철학에서는 어떤 그림자가 있는지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임헌규는 “마음의 본체를 인(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마음의 덕(德)이자 사랑의 이치라고 규정하면서, 마음을 본체-작용, 본성과 감성으로 나누어 제시한 주희의 입장”(임헌규, 『인설』138)에서 현대 영미의물리주의적 심리철학을 비판하면서 마음에 대한 주자철학을 옹호하고 있다. 임헌규가 보여주는 이러한 비판과 옹호는 아마 동양철학, 혹은 유학의 입장에서 서양 심리철학에 대한 유일한 비판처럼 보인다. 그는 다섯가지 측면에서 현대 영미의 물리주의적 심리철학을 비판하면서 주자의심리철학을 옹호하고 있다.『유가의 심성론과현대 심리철학』364-373). 이처럼 서양의 심리철학은 동양의 심학과는 사뭇 다르면서, 비슷한 면을 가지려고 하는 특이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접근하려는 것이 마음의 어느 부분인지, 유식30송과 비교해볼 가치가 있을 듯 한--서적이다.
발견을 예견한다? 예견과 예측은 뉘앙스가 다르다. 예견은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적인 맛이 난다. 그래설까, 소개에 입증같은 증명을 쓰기보다는 에피소드를 통해 맥을 짚어간다고 했다. 인문학이 유행하는 것은, 과학의 잘못이 아니라 탐욕이 부른 재앙 때문이다.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에 따라 재앙이 될 수 있고, 희망이 될 수 있다. 여러 과학사적인 발견은 인문학적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했으나, 현재에는 이원론으로 지배된 자연과 사회가 지배이데올로기를 벗어나려고 하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자연의 회복성을 되찾으려면 갈 길이 멀다. 그런 의미에서, 발견을 예견한다는, 꽤 괜챦은 책이 출판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철학자에게 온통 관심이 꽂혀서는 균형과 조화가 서투르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지젝이 자주 출몰한다. 헤겔을 데리고 온 그의 출몰은 어떨지 궁금하다. 하이데거와 용수 그리고 다르마키르티의 이야기를 한줄한줄 읽고 있는 중에 지젝은 어쩌자고 헤겔을 내 책상을 점령하라고 했는가? 처음에 이상야릇했던 서양의 개념들은 차차 그들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헤겔은 그 선형방정식의 한 변수로 생각해왔기에, 지젝의 헤겔을 통해 반복의 의미를 어떻게 풀고 싶었는지 읽어보고 싶다.
예술이 곳곳에서 봉기하고 있지만, 그림과 음악과 문학 등의 예술은 의외로 의기소침하다. TV같은 미디어의 이야기의 과잉 생산이 초래한 결과다. 그래서 예술을 생산하는 작가가 생존하다가 다른 길을 택하는 일을 자주 발견한다. 필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반인의 수준도 향상되었기에, 예술이론과 비평을 읽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카메라가 생산하는 이미지의 홍수는 너나할것없이 사진가라는 존칭을 받고 싶어하지만, 비평조차 받지 못하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지 않던가. 또한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시각은 상식과 교양을 넘어,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며.
비극이란 희극보다 더 강렬하다. 고진감래라고 하였듯, 비극이 긴 이유를 여러 텍스트를 통해 밝혀내 <비밀>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어둔 듯 싶다. 비극의 하나는 히스테리에서 생성된다. 여기서 생긴 증상은 주로 공포와 억압 현상으로 나타나는 전환Conversion 히스테리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불안같은 히스테리는 자궁을 뜻하기에, 여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여성에게 국한될 성질이 아니다. 그러한 증상들이 모여서 비극을 낳았으리라. 마비, 위축, 장애. 그런 증상이 어떻게 작품에 나타났고, 비극을 형성시켰는지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