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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ㅣ 윤혜정의 예술 3부작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책을 통해 이토록 깊고 생생한 예술적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윤혜정의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텍스트와 사진이라는 평면적 매체를 넘어, 실제 전시 공간을 거닐며 예술과 마주한 듯한 특별한 감각을 선사한다. 오감을 자극하는 생생한 언어와 진심 어린 시선은 독자로 하여금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게 만든다.
국제갤러리 이사로 오랜 시간 예술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온 저자 윤혜정은, 이 책에서 1990년대부터 쌓아온 자신의 예술적 체험을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펼쳐낸다.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녀의 '예술 3부작'을 마무리하는 세 번째 책이자, 오랜 시간 품어온 예술에 대한 경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책 속에서 소개되는 스물한 명의 예술가들은 모두 저자의 오랜 관찰과 경험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윤혜정은 때로는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때로는 관람객의 시선에서 예술가들의 세계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그의 글에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과 애정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독자의 마음에도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작품 속을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 예술가를 알고 싶어지고, 그 전시를 보고 싶어지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프롤로그에는 윤혜정이 ‘전시를 꾸리는 일’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해왔는지 엿볼 수 있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개인적으로는 통째로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전시를 꾸리다라는 말에는 규모, 계획, 조직력, 의지, 책임, 결단, 열망, 주체성, 실천력, 좌절, 상처, 신뢰, 현재성... 이런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 무언가를 부단히 돌본다는 점에서 일편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이런 마음으로 보면 다소 나쁜 전시는 있을지언정, 함부로 평가받을 전시는 없다.” (p.5)
예술은 결국 우리의 일상을 비추고 기억하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끝내 예술일 수 있다는 저자의 말(p.9)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사려 깊은 정의처럼 다가왔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예술은 결코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다. 그것은 누구의 삶 속에도 조용히 존재할 수 있고, 그렇게 존재함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술가들 가운데, 특히 인상 깊었던 인물은 피에르 위그였다. 작가는 그의 예술을 ‘사변적 허구’라고 설명하며, 그가 만들어낸 현실과 허구의 경계 위를 걷는 작업 세계를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항상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그 세상에 들어가고 싶고, 이 세상에서 걷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p.291)
그에게 현실과 허구는 반목하지 않는다. 서로를 분신처럼 품는다. 이 세계의 질서 안에서 쉽게 간과되는 취약함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위그의 작업은, 윤혜정의 시선과 함께할 때 더욱 강력한 울림을 가진다.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건 시선과 시각이다.” (p.296)
책을 덮은 후에도 마음에 오래 남는 건, 예술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철학과 그것을 소개하는 저자의 존중 어린 태도였다. 모든 장이 끝날 때마다 느껴지는 여운 속에서, 책 제목이 다시 떠오른다.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 점차 이해하게 되는 깊은 진실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예술의 정의와 감상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나의 ‘예술에 대한 영토’는 확장되고 있었고, 그 넓어진 영토 안에서는 더 많은 질문과 감각, 사유가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토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전시장에서 실제로 겪는 경험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잊고 있었던 예술의 중요성을 다시금 재감각하게 해준 이 책에 고마움을 전하며, 앞으로의 나의 감각과 시선이 얼마나 더 확장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