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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다른 여성으로
문은희 지음 / 산해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여자 아니면 남자다. 아니다. 트랜스젠더를 감안하여 다시 말하자. 우리는 대체로 여자, 또는 남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보다 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구상의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지닌 한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런 우리가 가끔 (아니 수시로) 여자로, 또는 남자로 분류되고 묶인다고 덧붙이는 게 좋을 듯.

여성 또는 남성인 우리가 모두 나름의 독자성을 지닌 하나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여성주의적 사고의 출발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여성주의는 곧 휴머니즘이라고…. 그래서, 여성운동은 남성 집단을 대항해 일어섰다기보다는, 인간 즉 여성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비인간'들을 향해 일어선 운동이라고.

인류를 크게 반으로 나눈 여성 집단 안에는 실로 다양한 여성들이 속해있다. 그 여성들의 삶과 경험에서 나온 여성주의는 그러므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할당제를 주장할 수도 있고, 지금 현재 땅바닥에 내팽개쳐져있는 여성의 인권을 보듬어안아 부추길 수도 있으며, 남성과 동등함(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우월함)을 수시로 증명해낼 수도 있겠다. 또, 여성에게 이러이러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한편, 여성이 자기존재와 자기의 일을 독자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여러 여성주의 안에서 문은희 박사의 존재는 과연 어디쯤일까?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피해자의 자리를 찾아들어가 거기에다 자신을 붙들어맨 채 평생을 억울해하면서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하겠지만 실제로는 놀랍게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보다 힘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여자들의 경우 그 힘있는 사람이 시어머니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pp. 168-9

문은희 박사는, 수많은 여성 내담자들과의 상담장면에서 여성 스스로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음을 털어놓는다. 이에 문 박사는,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제까지 어쩔 수 없이 피해자 노릇을 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그 피해자 노릇을 그만둬보자고 속삭인다. 그만둬도 괜찮다고 부추긴다. 또, 그만둘 힘과 용기가 우리 인간에겐(당연히 여성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문 박사는 또 제안한다. 이제 '진정한 여성해방을 이야기하자'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춤추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니 옛 여인네보다 요즘 여성들이 자유롭습니까? 남성들처럼 교육받고 바깥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옛날보다 더 존중받고 평등한 삶입니까? 부모님이 짝 지어주신 대로 얼굴도 모르고 혼인하는 것은 끔찍하고, 남자들이 좋아하는 치장을 하고 미팅에 나가서 선택받기를 기대하며 내숭 떠는 것은 남녀평등입니까?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남성의 기준에 여성들 자신도 스스로 맞추려 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pp. 125-6

여성이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여 독자적이고도 주체적인 여성,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는 여성이 된다면, 그렇게 조금 다른 여성으로 나아간다면, 세상도 조금은 달라질지 모른다. (모든 생물학적 여성이 전부 그렇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안에는 어쩌면, 아직은, 비인간화의 거센 물결을 막을 수 있는 생명의 힘이 남아있는 것 같으니….

 

* <오마이뉴스> 책동네 기사로도 게재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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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아름다움
필립 시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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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멸의 아름다움>은 임박한(!) 죽음을 바라보는 필립 시먼스의 생각과 느낌을 담은 책이다. 한 마디로 '죽음의 아름다움.'

죽음이 어디가 아름다우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기름기와 물기가 다 빠져나간 시신은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아름다울 리가 없다. 어떤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된 사건을 두고 '아름답다'고 표현할 만한 여유가 우리에겐 사실상 없는 것 같다.

장례 예식은 안타깝거나 혹은 서럽거나, 한없이 길거나 지루하다. 장지로 떠나가기 전 관이 놓여있는 곳으로 조문하러 온 문상객들은 서로의 먹거리를 챙겨주는 데에 온 신경을 다 써버리기 일쑤다.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는 느긋함이 우리에게 과연 있을까?

시먼스는 '사건사고'로서의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얘기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고 있다. 나 자신의 죽음을 성찰하는 바로 그 순간 곧 나의 삶을 통찰하게 되는 그 역설적인 진리가 <소멸의 아름다움>에 스며들어있는 것이다.

시먼스는 서른다섯 살에 루게릭 병에 걸렸다. 야구선수 루게릭이 걸렸다는 불치의 병,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화요일마다 제자를 만나던 모리 교수가 걸렸던 그 병,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라는 병이다. 차례차례 근육의 마비가 오면서 마지막에는 온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렇게 나무토막 같이 되어서 죽는 병.

"한 번에 찻숟가락으로 하나씩 생명력을 덜어내는" 듯한 고통, 날마다 그 "느리고 성가신 폭력"을 겪어나가는 시먼스. 꼼짝없이 죽음의 덫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그는 기어코(!), 자신의 불완전한 삶이 곧 축복이라는 생각을 발설하고야 만다.

불완전한 삶이 곧 축복이다…? '이 빠진 동그라미'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기에게서 떨어져나간 조각을 찾아서 그렇게 산지사방을 헤매더니만, 애써 찾은 그 한 조각을 찾으니까 정작 그것을 내려놓고 길을 떠나는 '이 빠진 동그라미.' 불완전한 삶의 축복. 비슷한 얘기일까….

시먼스는 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에 <소멸의 아름다움>을 쓰는 순간 '생기 있게' 존재하고 있었다. 생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한국에 그의 책이 발간된 이 시점에도 그가 살아있을까 하는 것. 그리고, 지금은…?

"우리는 모두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모두 높은 곳에서 떨어져 깊은 곳을 향해 한창 하강하고 있는 중이다. 그 높은 곳은 이제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있고, 어른거리는 수면 아래에 언뜻 보이는 심연이 어떤 곳인지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신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면, 은총과 '함께' 은총을 '향해서'도 추락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우리가 고통과 나약함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즐거움과 강력함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우리가 죽음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삶을 향해서도 떨어지자.<소멸의 아름다움> p. 41."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죽는다. 죽지 않고 버틴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적극적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자. 막상 받아들이고 나면 무섭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이상스럽지도 않다. 왜냐고? 죽음을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삶이 강렬하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다른 별칭인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내가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면, <소멸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죽음을 즐겁게 명상하고 느끼려는 독자에게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다가갈 것이라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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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어
안 소피 브라슴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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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인 브라슴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이 작품을 프랑스에서 발표했다. <숨쉬어>는 출간된지 사흘만에 5,000부가 팔려나갔다. 우리나라에는 지난 달 30일에 출간됐다. 브라슴은 자신의 첫작품의 서두를 이런 문장들로 시작한다. 

 

“내 이름은 샤를렌 보에다. 나는 열여덟 살이다. 똑같은 나날들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지켜보며 이곳에 죽치고 있은지도 벌써 이년이 되었다. 유년기를 갓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경멸하고 내게 증오의 시선을 보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샤를렌은 친구(사라)를 죽인다. 베개로 얼굴을 눌러 질식사시킨다. “숨쉬어!”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살인의 시각으로부터 몇 년 전 자살을 기도한 샤를렌이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 말이기도 하다)…. 잠시 후 샤를렌의 친구는 죽는다.

 

샤를렌이 친구를 죽인 이유가 뭐냐고?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 친구 살아 생전에는 그 친구에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범행 후 살인자 샤를렌은 후회는커녕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작품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고통과 혐오와 수치심을 느끼기는 하지만 내가 그 증오스러웠던 삶으로부터 영원한 승리자가 되어 빠져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막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내 사춘기를 회상해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 그리고 나를 비춰보는 거울로서의 타인을 보며 내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던가를 기억해냈다. 샤를렌처럼, 내 사춘기 또한 급격한 정체성(identity)의 혼란으로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내가 누구인지 모호했고, 나와 구별되는 남을 어떻게 다룰지 방침이 서지 않았었다.

 

<숨쉬어>의 샤를렌은 자기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거울로서) 사라를 필요로 했다. 자기자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식으로 타인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샤를렌은 사라에게서 독립해야 했다. 성공적으로 독립했어야 했다. 사라를 해치우는 방식으로가 아닌 다른 방식(인간 대 인간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나아가는 길)으로 말이다.

 

그러나 샤를렌은 다른 방식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샤를렌은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샤를렌에게 말한다. 내가 내 인생을 살도록 좀 내버려둘 수 없어? 그때 샤를렌이 샤를렌에게 대답한다. 사라보다 네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이 확인되면 사라져주겠어.

 

이 작품, 아프다. 그러나 의미있다. 샤를렌처럼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서, 지금 이 순간 (자기정체를 고민하며 사춘기를 겪고 있을) 수많은 다른 샤를렌들이 단지 평안하고 무감각하게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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