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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네 집에서 뒹굴 거리며 물었다.
- 가볍게 읽을 것 없어?
- 너 빠삐용 읽어 봤어? 그 책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빠져들면서 독서했네.
- (영화로 충분히 봤는데…) 아니, 안 읽었는데 책도 있었어?
- 응.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책 정말 잘 쓰더라.
- 앗, 뭐라고!
언뜻 기억이 났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새 책을 냈다는 출판계 소식이. 한국에 없으니 그런 것들은 그냥 잊고 지냈다. 안 그랬으면 당장 샀었을 텐데.
들떠서 책을 만져보니, 2003년에 히트 쳤던 그의 단편 소설집, 『나무』가 생각났다. 같은 출판사, ‘열린책들’ – 개인적으로 ‘열린책들’의 문고판 hard cover book은 좋아하지 않는다. 글씨가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보여서. – 이며, 같은 느낌의 표지 디자인, 더불어 삽화도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뫼비우스’의 작품이다. 그리고 다른 점에서는 『나무』보다 『파피용』이 약간 두껍고, 종이질도 더 부드럽다. 상당히 거친 옅은 갱지였는데, 부드러운 옅은 갱지로 바뀌었다. 뒷면의 베르나르 사진도 정면을 바라보는 훤한 이마보다는 옆 모습의 ‘흑백’이 더욱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격은 천 원이 올랐네? 그래. 책 값도 계속 상승하고 있다.
일요일 오후에 소파에 누워 편히 읽고 있는 내게 친구가 또 물어본다.
- 재미있지? 마지막에도 조금 놀랐어. 『개미』 이후로 너무 흥미롭게 읽어 버렸어. 넌 하루면 다 읽겠다.
그래, 그렇게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읽었나 보다.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었기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1. 재미로 읽어야 하는 책도 있다.
– 이런 것들은 ‘독서’ 행위 자체의 즐거움만을 위함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즐기지 못한다. 아니, 즐기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심각성병이라고 부르는데, 의미가 없이 only for enjoying인 것들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내 안에 성과 위주의 사고 방식이 내제되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다. 그러나 감히 일본의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에 비하면 피한다고 할 수도 없다.
“실제로 그(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뮈 등 소위 ‘대문학’이라 불리는 고전은 고등학교와 대학 초년 시절에 일찌감치 읽어 치우고, 대학 졸업 후 약 40년간은 한 편의 소설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장정일의 공부』, p. 48)”
독서를 목적으로 하는 독서는 일찌감치 끝내고 더 이상은 독서를 수단으로 하는 독서만을 하며 4층짜리 고양이 빌딩까지 지은 그를 생각하면 정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충분히 즐거웠다. 불편한 자세로 책을 계속 읽으니 어깨가 결려도, 시간이 아깝지 않나 라는 마음 한편의 무거움도 조금은 있었지만, 영화 한 편 보고 나온듯한 상쾌함이 행복했다.
가끔은 무작정 수필, 소설만 읽고 싶을 때도 있다. 『파피용』과 같은 간지 나는 소설을 읽고 나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타서 다리 뻗고 옆에 쌓아둔 소설을 마냥 읽고 싶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전에 비해 이 욕구를 적절한 선에서 조절하는 능력이 배양되었다. 내가 지금 중얼거리는 내용은 위에 적은 소제목 그 자체이다. ‘재미로 읽어야 하는 책”도” 있는 법이다.
2. 작가가 종교에 그리고 기독교에 특히 배타적이었구나.
작가, 베르나르에 대한 정보를 조금 찾아 보았다. 특히 종교 부문에서. 실제적으로 그는 종교에 대한 색다른 이해와 다양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학자라 해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베르나르는 현재 ‘신’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 10여 년의 집필 시간이 소요되었고 주제가 ‘인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다. 글쎄, 인간을 다스리는 신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내용을 주로 하는 마지막 거대 작품이 될 것으로 피력하였는데 개인적으로 중간중간 『파피용』에서 주었던 ‘종교 배타적 입장’은 불편함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내용을 언급함은 스포일러성 발언으로 터부시되기에 조금만 끌어내려 한다.) 14만 4천명이라는 수의 승객을 파피용 호에 태워야 한다. 1,000년의 세월을 우주선이라는 밀폐 공간에서 살아야 하므로 최선을 다해 선별한다. 그런데 목사와 같은 종교인은 바로 배제된다. 정치인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그룹 지어 종교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폐해로 본다.
더 심한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여 삶을 꾸리는 남, 녀가 ‘아담과 이브’ - 즉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사람들 이름 – 가 된다. 억지적인 설정으로도 보이고 굳이 이러한 결론을 끌어내어서 반감을 주는 이유는 뭘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옮긴이의 말’에서는 파피용 호에서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였다고 전한다. 당황스러웠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첫째로 생존자들이 아담과 이브가 되는 이유는 어처구니 없게도 “실수로 이름을 자꾸만 바꿔 불러서”이다. 소설의 재미, 가치가 급강하하는 느낌이었다. 전혀 멋지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은 초등학생의 일기에서 볼 것만 같은 귀찮아서 적당히 생각나는 대로 적은 듯한 설정(이유)이다. 왜 베르나르는 굳이 이렇게 해야 했을까? 분명하게 예상하였으리라. 크리스천들의 따가운 반응을. 그러나 그는 어쩌면 이를 위해 이렇게 하였으리라. 혼돈이 되어 버린 우주선 안에서 사이비 신흥 종교가 생겨남은 언급할지언정 기존의 종교는 버리고 가야 했고, ‘우연’을 가지고 창조론의 꽃의 가치를 깎는 노력을 하였다.
둘째로 옮긴이의 ‘노아의 방주’와의 비유는 책 내용에서 받은 반기독교의 충격을 뻥튀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설정을 제하면 이 우주선과 방주가 같은 군으로 묶일 그 어떤 요인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피용 호에서는 아무리 선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탔지만, 인간의 악한 본성은 지구에서 일어나던 파멸의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일본 현대 소설들이 많이 내포하고 있는 허무주의의 분위기도 풍겨난다. 각설하고, 나는 노아의 방주가 연상된다던 옮긴이의 어설픔을 신랄하게 비판해주려고 전혀 비슷하지 않은 차이점을 나열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찰나에 나는 결국 작은 신음을 토해냈다. ‘베르나르가 정말 천재구나.’ 싶었다. 그의 치밀함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장편 소설을 읽으며 노아의 방주를 단 한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작가는 그 이미지를 이미 갖고 글을 쓰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나하나 거의 비슷한 설정이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현대판, 소설판 노아의 방주가 바로 지구 탈출 거대 우주선 ‘파피용’이다. 그런데 정말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하나님(신) -> 인간’ 소설에서는 성경의 실제 역사에서의 주인공 하나님의 역할이 모두 인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한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너무 똑같아서 마치 노아의 방주 변주곡으로 파피용을 작곡하였다고 보인다. 무섭다. 우리의 무의식으로 들어갈 그의 이야기가.
3. 지구로 돌아갈 줄 알았다.
작가는 시종일관 그들의 목적지를 비밀에 부친다. 소설의 등장 인물들도 그네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무언가 반전이 숨어있을 줄 알았다. 더군다나 친구가 ‘마지막 부분의 놀라움’을 언급하여서.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나는 마치 1,000년을 우주에서 항해하였더니 지구로 다시 왔더라. 지구에 와 봤더니 1,000년 동안 어떻게 변해있더라 하는 SF를 기대하였는데 아쉽게도 정말 새로운 행성이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평범함이 조금씩 그대로 녹아있었다. 예로, 우주선에서 내릴 때 제비 뽑기를 하여 5명의 남자들이 남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그로 끝이었다. 작은 소재들마저 버리지 않고 아낌없이 사용하는 ‘모든 것의 특별화’ 기법이 없어서 어찌 보면 차라리 현실적이고 깔끔했다. 만약 우주선에 남은 남자들이 그들끼리 살 길을 찾아 소형 우주선을 만들어서 행성에 내렸다 등의 이야기가 붙었다면 군더더기로 느껴졌을 텐데. 적절한 선에서 쳐 내어서 평범한 상황을 살려주는 맛이 좋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길어졌을까? 책을 읽은 시간과 리뷰를 적은 시간이 동일하겠다. (오히려 후자가 길거나.) 중언부언하지 않았나? 근거의 양이 부적절하지 않았나? 초보 운전자는 끼어들어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순간 망설이다가 그 타이밍을 놓치곤 한다. 지금 내가 적는 글들은 이런 초보 운전이라고 생각한다. 누덕누덕 초가삼간을 짓고 있는데 빈대를 너무 빨리 잡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