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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평점 :
<1> 저자 조사
리처드 니스벳은 미국 미시간대 심리학과 석좌교수로 동서양의 차이에 대한 연구에 주목해왔다. 그는 그의 책 『생각의 지도』는 그동안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던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실험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통념들을 과학으로 증명해 주는 리처드 니스벳의 글을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동양인은 애니메이션을 보여줄 때에도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계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지만 서양인은 사물 그 자체를 파악한다. 동양인은 같은 갈등 이야기를 들을 때 조화를 중시하며 융화를 주장하지만 서양은 양자택일의 논쟁문화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차이가 동ㆍ서양의 경제, 사상, 교육 전 분야에 걸쳐 차이를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과학적 실험을 통하여 두 가지의 극명하게 다른 문화가 충돌하거나 어느 한 쪽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지점을 찾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의 책을 통하여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가진 새로운 시각을 이해하게 된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독자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그의 책은 또 다른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Yes24 제공 정보)
최인철 교수가 한국어 번역본을 맡겠다고 하였을 때 한사코 말렸다고 역자는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과 연구에 대한 열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저자는 스승의 저서를 번역하겠다고 한 최인철 교수에게서 한국의 문화를 본 것이 아닐까? 유교주의적 사상이 몸에 배어 있어서 스승을 섬기려는 그 마음을 읽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더욱 최인철 교수가 할 연구의 가능성의 여지를 막지 않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 독후감
좀 전에 미국인 동료(Jodi)와 통화를 하였다. 택시를 타고 같이 어디를 가기로 했는데 예약을 변경해야 했었다. 그런데 Jodi는 스페인어를 전혀 못 하기 때문에 내가 택시 기사에게 전화를 하기로 하고 Jodi에게서 번호를 받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Well, you need to change our reservation, because he cannot speak English.”
(네가 예약을 번경해야 할 것이야. 왜냐하면 그 기사가 영어를 못 하기 때문이야.)
이럴 때 미국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같은 입장이었다면 나는 “내가 스페인어를 못 하니깐 네가 통화를 해 봐”라고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페인어가 국어인 나라에서 스페인어를 몰라서 영어를 쓰는 것은 내 사정인데, 이 미국 친구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중심이 그녀에게 있는 것이다.
과테말라로 가져올 책을 고르던 때에 ‘컬처 코드’나 ‘생각의 지도’는 꼭 넣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우선적으로 회사 내에서 동료들과 부딪히며 그들을 이해하고자,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더 알고 다가가고자. ‘컬처 코드’를 요약본만 읽어봤었기에 괜히 더 전문적인 책이 구미가 당겨서 ‘생각의 지도’를 가져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음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기대한 만큼 넓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 같다.
우선적으로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이 ‘생각의 지도’는 사실 “약도”이다. 지도처럼 세밀하게 되어 있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약도를 그려 주고 우선 찾아갈 수 있게 돕는 역할은 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마지막에 결론을 내렸듯이 사람들은 서로 닮아가고 있다. - 내 개인적인 견해일지 모르지만 동양인들의 서구화가 더 강하다고 보인다. – 그래서 동양인이지만 서양인의 성향을, 그리고 서양인이지만 그 반대의 것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이 지도로 잣대를 삼게 되면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다. 마치 개발도상국에서 우후죽순으로 건물이 들어서서 몇 년 지난 지도를 들고 가면 오히려 더 헤매듯이. 그러므로 큰 길만 우선적으로 보면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스스로 적용하는 배움이다. 좀 전에 있던 Jodi와의 일에서 나는 ‘생각의 지도’에서 읽은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Jodi의 이 반응처럼 나에게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하게 되면 나는 위축 들지 않아도 된다. 이 곳에서 만나는 많은 한국인들이 스페인어를 못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이들이 한국어를 못 해서, 영어를 못 해서.’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다. 물론 언어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그렇지만.
리처드 니스벳은 어느 정도까지 연구, 조사를 한 것일까? 동양은 주로 일본, 중국, 한국으로 한정되어 있고 서양도 미국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과테말라 사람들의 특성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스리랑카나 인도네시아, 이런 국가들은 어느 범주로 넣어야 할까?
<3> 인용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내용과 부합하는 사고 방식을 사용한다. (17)
왜 동양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내가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지’라는 후견 지명 효과를 강하게 보일까? (19)
특정한 사회적 행위들은 특정한 세계관을 가져오고, 그 세계관은 특정한 사고 과정을 유발하며, 그 사고 과정은 역으로 원래의 사회적 행위들과 세계관을 다시 강화시킨다. (20)
1. 동양의 도와 서양의 삼단논법
그리스에서는 국가의 중대사에서부터 매우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들이 공개적인 논쟁을 통하여 결정되었다.
‘호기심’ 아리스토텔레스는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29)
è 나는 호기심보다는 그 호기심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고 과정이 인간의 특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동물들도 호기심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여가란 다름 아닌 지식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è 멋지다!
그리스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중요했다면, 중국에서는 조화로운 인간 관계가 중요했다. (21)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습관적으로 행한 작업 중 하나는 사물의 속성을 분석하고, 그 추상화된 속성에 의거하여 사물을 범주화하는 것(35)
è 나는 이런 방법이 좋다. Old-fashioned studying pattern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음양 이론’ 음양의 원리란 ‘서로 반대되면서 동시에 서로를 완전하게 만드는 힘’, ‘서로의 존재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힘’의 관계이다. (40)
2. 동양의 더불어 사는 삶, 서양의 홀로 사는 삶
자기 개념(self-concept), 미국과 캐나다인들은 주로 성격 형용사(친절하다, 근면하다)를 사용하거나 자신의 행동(나는 캠핑을 자주 한다)을 서술한다. 이에 반해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적 맥락을 동원하여 대답하고(예를 들어, ‘나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직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한다’), 또한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53)
è 동양은 ‘소속감, 소외감’이 강하고 서양은 ‘외로움’이 강하다.
동양인들에게 있어 개인의 만족감은 자신이 집단 성원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54)
è 배운 것, 느끼는 것, 아는 것이 다르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 인간이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55)
è 존댓말, 식사나 진지가 따로 있는 것을 설명한다.
중국어에는 영어의 ‘individualism’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56)
미국인들은 항상 남의 눈에 띄고 싶어하나 한국인들은 늘 남들 정도만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57)
è ‘강점 혁명’의 34가지 범주 중 ‘중요성’을 가진 미국인들이 많다고 볼 수 있는가?
자존감을 추구하는 서양인들과 자기비판(self-criticism)을 통해 자기 향상을 추구하는 동양인들을 극명하게 대비 (59)
è 서양인들을 보면 심히 자신감 있어 보이는 것이 이런 이유겠지.
동양인들은 인간 관계 속에 조화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하지만, 서양인들은 개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동양인들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간 관계의 조화를 추구하지만,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인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정의를 추구한다. 동양인들은 위계 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집단의 통제를 수용하지만, 서양인들은 형평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선호한다. 동양인들은 모순과 논쟁을 회피하지만 서양인들은 법률, 정치,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논쟁을 끌어들인다. (80)
è 요즘 크게 느끼는 대화 소재가 별로 없다는 부분 - 이런 식으로 다양한 영역에 관심이 없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매우 지엽적인 것들만 이야기하고 논의하다 보니깐 다른 사람들의 실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초점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è 동양인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아니, 마음은 그럴지라도 행동 패턴에서 그렇게 도출되는 것을 꺼릴 수 있다.
è 정의 추구? ‘컬처 코드’에서는 이것이 꼭 옳다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이나 그 책이나 모두 ‘문화의 상대성’을 결론으로 끌어낸다. 다른 방식이겠지만.
동양과 서양 내에서의 국가간 차이 - 예를 들어, 지중해권 국가들과 벨기에, 독일은 신교의 영향이 강하고 앵글로색슨 문화가 강한 전형적인 서양과 동양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패턴을 보였다. (73)
è 국가가 다르면, 지역이 다르면 문화도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인데 미국 문화를 서양 문화로 봐 버리는 오류를 자주 범하게 된다. 바로 붙어있는 중국과 일본 사람의 문화를 우리 나라와 같은 것으로 치부하면 적잖게 당황하고 거부하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과테말라 현지인들의 특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미국인과는 분명 다르고 예전에 내가 가졌던 생각은 일명 ‘식민지 근성’이었는데.
‘자유롭고 활발한 토론(lively discussion)’ - 논쟁의 전통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옳은 주장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77)
è 진정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심한 논쟁 후에 감정이 상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나는 아직 이 문제에 있어 민감하다.
3. 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
서양인은 개별적 ‘사물’을 보고 있고, 동양인은 연속적인 ‘물질’을 보고 있는 것이다. (84)
자연을 등장시키는 광고는 서양에서보다 동양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86)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배경이 중국 사람들에게는 기억을 위한 단서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중국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많이 기울인다는 간접적 증거이기도 하다.
서양인들은 과거를 기억할 때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회상하지만, 동양인에게는 그런 경향이 약하게 발견된다. (89)
배경 조작은 미국인보다 일본인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반응 시간에 있어서도, 원래의 사물이 낯선 배경과 제시되면 일본인들의 기억 반응은 늦어졌지만 미국인들은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93)
동양인들은 자신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자신을 통제해줄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믿을 때 더 행복감을 느꼈다. 서양인들에게는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가 중요하지만, 동양인에게는 누군가와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일체감이 중요한 것이다. (98)
분명 동양인들은 여럿이 있을 때 편안해 하는 듯하다. (100)
è 불편함 속의 편안함을 그대, 서양인들은 아는가?
4. 동양의 상황론과 서양의 본성론
일본의 교실에서는 ‘왜(why)’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how)’라는 질문이 미국의 교실에 비해 2배 정도 많이 오간다.
와타나베는 미국인의 이러한 역사 분석을 ‘후행적(backward)’이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결과->원인’의 순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이러한 분석이 서양인의 목표 지향적 사고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목표 지향적 사고에서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델을 나중에 설정하기 때문이다. (124)
‘어떤 요인이 어떤 사건과 관계없다고 판단 내리기를 꺼리는 경향’, 다시 말해 ‘무수히 많은 요인들이 어떤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종합주의적 사고와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125)
그 정보를 무시하지 못하고,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동양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대해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128-9)
5.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양과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서양
영어는 ‘주어’에 매우 집착한다. 심지어 ‘비가 온다’라는 표현을 할 때에도 ‘It is raining’ 이라고 해서 ‘It’을 주어로 쓸 정도이다. (150)
가령, 일본어나 중국어, 한국어에서는 ‘나(I)’를 표현하는 말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르다. 동양 언어에서 구체적인 맥락과 인간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나’를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151)
‘동등 이중언어자(Coordinate bilingual)’들은 제2외국어를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배워, 그것을 한정된 맥락에서만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언어에 따라 세상에 대한 정신적 표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복합 이중언어자(Compound bilingual)’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제2외국어를 배워 어떤 언어에서든 세상에 대한 표상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153)
그들에게 영어를 쓰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전혀 다른 조직화를 이끌어내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었다.
è 내가 외국어를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첫째, 언어의 효과와 무관한 문화의 효과가 존재한다.
둘째, 문화의 효과와는 독립적인 언어의 효과가 존재한다.
언어 체계가 표상 체계와 관련되어 있는 한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54-5)
6.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과 경험을 중시하는 동양
고대 중국인들은 변증법적 사고라 부를 만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특징은 모순이 되는 주장들을 타협을 통해 수용하는 것이었다.
1) 변화의 원리 (The principle of change)
2) 모순의 원리 (The principle of contradiction)
3) 연관성 혹은 종합론의 원리 (The principle of relationship, or Holism)
서양 사고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동일률’은 상황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일관성을 강조한다. (167)
중국 학생들은 중용을 찾으려고 노력한 반면 미국 학생들은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가를 밝히려는 일방향적 접근을 취했던 것이다. (169)
사람들은 누구나 낙천적이면서도 때로는 우울해 하고, 사교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 내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뻔한 말을 해주는 심리학자나 점술가, 혹은 누가 되었든 간에 그 사람을 ‘족집게’로 믿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부른다. (177)
대립적인 정서의 동시다발적 경험은 동양인들의 보편적인 특성이다. (180)
대부분의 미국 참가자들은 일관되게 긍정적 정서를 보고하거나, 일관되게 부정적 정서를 보고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 참가자들에게는 어떠한 연관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긍정적 정서가 충만한 경험과 부정적 정서가 충만한 경험이 완전하게 양립하고 있었다. 공자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라고 했는데, 이는 동양인들을 두고 한 말이 틀림없다. (181)
è So how? Is it a destiny? Can’t we fix it? 이런 식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싫다. 왜냐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순수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것이 동양인의 특성이라니. 그러니 기쁘면서도 슬픔을 느끼는 것을 설명해도 서양 애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테지. 뭐랄까,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쟁이처럼 보인다. 가장 크게 슬픔을 느끼면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인가? 이 감정을 그저 받아들여야 하나?
7.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 그 기원은?
그리스는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무역을 중요한 산업 수단으로 삼았다. 그 덕분에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지닌 상인 계층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187)
중국의 중앙집권적 정치 권력 -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생활하는 촌락 생활은 조화와 화목을 중시하는 행위 규범을 만들어냈다. (188)
고대 중국의 변증법적 사고와 고대 그리스의 논리학은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위해 개발된 인지적 도구들이다. 조화와 화목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논쟁이나 대결의 전통이 생겨나기 어렵기 때문에 어떤 관점의 차이가 발견되면, 모순을 뛰어넘는 중용의 도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논쟁이 장려되는 사회에서는 ‘비모순율’이나 ‘형식 논리’같은 절차들이 자연스럽게 개발된다. (194)
‘장의존성(field-dependence)’ - 어떤 사물을 지각할 때 주변 맥락의 영향을 받는 정도 (198)
8. 동양과 서양, 누가 옳은가?
미국과 같은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는 개인 간의 갈등이 법적 대결로 해결되지만, 일본과 같은 집합주의적 사회에서는 중재와 같은 비법적 대응으로 해결된다. 서양에서는 정의의 실현을 원칙으로 하며, 법적 해결을 시도할 때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되며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는 점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갈등 해결 목적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쌍방간의 적대감을 해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협이 가장 선호된다. 서양인들은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판사나 배심원들이 공평무사한 결정을 내리도록 기대하는 반면, 동양인들은 상황 논리를 중시하는 것이 현명한 갈등 해결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법이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205)
è 서양인들이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것을 경쟁 심리로 봐도 될 것인가?
è 내가 이 책에서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구체적인 적용점이었다!
è 가끔 ‘단호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타협이 없다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내가 정당히 받아야 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할 때.
è 그러나 서양도 서양 나름이듯이, 이 책에서는 미국의 엄청난 변호사의 수를 언급하였지만 과테말라는 또 다르다. 이 곳처럼 국민 소득이 높지 않는 나라에서는 앵겔지수에 변호사 비용이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나 이들 역시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일까? 무료 법률 사무소가 있을 때엔 그 곳으로 엄청나게 몰릴 것인가? 아니면 동양인들과 같은 타협을 할까?
è 얼마 전 이 나라의 원주민을 보호하는 법이 재정되고 그에 따른 무료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했던 내가 아는 어떤 한국인이 원주민에게 작은 실수를 함으로 법정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합의를 해본다고 하였는데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동양인들의 시각에서는 다소 무례하고 불손해 보이는 방법이 서양에서는 진리에 이르는 길로 간주된다.
è 나는 어느 쪽에 더 있을까? 자유로운 토론을 원하면서도 동양의 교육에 익숙해서 불손해 보이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지 않을까?
일본의 이러한 초라한 성과(노벨 수상자가 고작 1명)에 대하여 혹자는 연장자를 존경하는 유교 전통을 그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일본 내 상당수의 과학자들은 논쟁과 지적 토론의 부재를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동료들끼리 서로 비판하고 심사하는 것을 무례하게 생각하며, 논쟁과 지적 토론이 과학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인식도 부족하다. (206-7)
è 그러나 이렇게 비판과 심사에 있어 객관적인 판단이 어렵지 않은가? 그래서 감정이 인다고 여기는데.
è 사실 피드백을 해줄 때에도 거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게 된다. 왜냐하면 단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관계에 있어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누구의 사고 방식이 옳은가?
문화 상대주의. 어떤 문화권이 사고 방식이든 그 문화 사람들에게는 정당하다는 개념 (212)
모순에 대하여 덜 민감한 사고 방식은 지적 호기심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논쟁을 통하여 진리가 발견되고, 설사 진리의 발견에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유용한 가설들이 세워질 수 있다는 서양의 확신에 대해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217)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중문화적(bicultural)이다. (229)
나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간쯤에서 수렴될 것이라는 이 세 번째 견해가 ‘문화 차의 미래’에 대한 가장 타당한 견해라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여 두 문화의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문화 형태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두 문화는 새로운 통합을 맞이할 것이다.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