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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보급판 문고본)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책 제목을 보며 굉장한 비장함을 가졌었다. 이를 꽉 악물고 고통스럽다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그런 모습이랄까?
역시 미디어 세대여서 이렇게 영상으로 먼저 받아들인다. 아닌가? 인간의 본능인가?
이재철 목사님은 우리, 청년을 가리켜 ‘현존하는 미래’라고 통칭한다. 가슴 저린 표현이다.
나 자신의 현존하는 미래이며 우리 가족의 현존하는 미래이며 또한 민족과 인류의 현존하는 미래이다.
이재철 목사님의 글이든 책이든 처음 경험하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특징은 정의를 내리는 방식의 글쓰기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든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극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목적이란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다라야 할 종착점을, 목표란 그 종착점에 다다르기 위한 방편을 의미한다. 따라서 목적은 하나일 수밖에 없으나 목표는 여럿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개념 정리를 확실하게 해주시는 분이기에 강의 또한 이렇게 주제별로 이뤄진다고 한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구절들을 곱씹어보고 싶다.
“실력파 vs 행동파” – 내가 예전에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 청년부에서 느꼈던 큰 문제점은 우리들의 사회성과 실력이었다.
패기 넘치는 크리스천 청년들이 교회 활동에 집중하다 보니 사회로 뻗어나가는 부분에서 안일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야망과 비전을 혼동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곤고하게 세우기 보다는 많은 욕심과 노력을 야망으로 치부해서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에서의 성공을 등한시하며 교회에 집중하는 그 모습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음을 저자는 여실하게 지적해주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꾼은 베드로와 같은 행동파나 의사였던 누가 또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바울과 같은 실력파이다.
자신이 어느 쪽이던 관계 없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였다면 그 비전을 위해 매진하는 노력하는 자세가 청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의 경우 실력파가 되길 꿈꾼다. 베드로처럼 순간 결단력이 부족하기에 계속해서 내공을 쌓는 실력가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든지 당장에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나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며, 또한 봉사가 바로 삶의 지경을 넓히는 길이다.
하나님 그분 자체를 비전으로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싶어요.’ 라고 말을 하곤 하였지만 나의 비전 자체가 하나님, 그분이라는 것은 깊은 묵상 커리로 다가온다.
치열한 세상의 경쟁과 풍토 속에 빠져 들지 않는 것이 노아와 같은 의인의 삶이 되겠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훨씬 큰 절대적인 목적이 존재하기에 매일같이 목표를 세워야 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로 ‘안정감과 기댐’이 많이 거론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와는 사뭇 다른 참신앙이라고 말한다.
부적을 붙여놓고 그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 앞에서 내가 변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잘 되겠죠. 하나님께서 해 주시겠죠.’라는 표현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부적이 아니다. 잘 믿는다고 모든 것이 된다는 개념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는 참 재미있는 종교이다. 처음에 믿게 되면 모든 것 다 때려 치우고 기도원에 들어가거나 선교하러 떠나야 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 우리 각 사람을 같은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에 역할이 있다.
내 위치에서 작은 것부터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귀하다고 하셨으며 지체들끼리 서로 돕고 협력하여 우리 사회를 하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시는 데에
필요한 달란트를 허락하셨음이다.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본다.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의 강한 용사들에게 이재철 목사님께서는 조목조목 챙겨주신다. 인생관을 재정립하길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은 초신자가 읽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는.
책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단순하게 ‘자기 계발’ 서적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그 뿌리가 다름이 이 책에서는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홍 목사님께서 쓰신 ‘칼과 칼집’과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등불을 들고 길을 열어주는 책이라는 점은
이재철 목사님의 책과 같은 맥락이지만 분명히 두 분께서는 다른 스타일의 글을 쓰신다.
짧게 읽어본 내가 느끼기로는, 한홍 목사님의 글이 부드럽게 흐르듯이 넘어간다면 이번에 읽은 이재철 목사님의 글은
명료하게 딱딱 짚어가며 한 파트씩 끝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청년들과 함께 공유하시며 쓰신 책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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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청년의 때란 자기 가능성의 그릇을 가장 크게 키울 수 있는,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절대적 시기 (7)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
청년들은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 인류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황금같이 귀한 이 청년 시절을 책임과 최선을 다하여 가꾸어야만 한다.
무엇이든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극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목적이란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다라야 할 종착점을, 목표란 그 종착점에 다다르기 위한 방편을 의미한다. 따라서 목적은 하나일 수밖에 없으나 목표는 여럿일 수 있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는 것은 나의 시간들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14)
더 중요한 것, 그것은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를 깨닫고,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 속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17)
<믿음이 시작하는 곳>
그렇다면 이들은 그처럼 옹색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을 향해 왜 영광하고 환호성을 질렀던가? 그것은 예루살렘 주민들 모두, 마치 <기탄질리>의 시 속에 나오는 걸인처럼, 자신들의 욕망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욕망에 찬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허상을 빚었기 때문이다. (25)
돌밭과 옥토의 차이는 무엇인가? 옥토는 갈아엎어진 곳, 완전히 뒤집어진 곳을 의미한다. 뒤집어진 곳에서만 진리는 열매를 맺는다. (29)
<울더라도 뿌려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126:5)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에 완전히 망했다가 한국의 6.25전쟁 덕분에 갑작스럽게 다시 돈을 벌게 된 졸부들의 나라다. (33)
è 이런 식으로도 한국에서 교육을 시켰었구나.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다. (45)
일본은 전체 크리스천 수에 비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로 알려지고 있다.
바닷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불과 2.8%의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한다. (46)
<크리스천과 문화>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17:23하)
십자가는 로마인과 페르시아인이 쓰던 이방인의 형틀이었다. (51)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진짜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58)
è 하나님께서는 실력파와 행동파를 쓰신다. 나는 실력파의 길로 가겠다. 주님, 들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크리스천과 직업>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8)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해답은 명쾌하게 나올 것이다. (62)
먼 훗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의 직업을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느냐? 얼마나 큰 집을 샀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그 대신 “너는 너의 직업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를 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우리는 정말 한 사람에게라도 더 봉사하기 위하여 직업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67)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땀 흘려 일하라. 그 때 이 사회는 하나의 큰 교회로 일구어져 갈 것이다. (69)
è 봉사의 목적을 잊지 마라. 나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다.
<크리스천과 비전>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잠29:18상)
‘묵시’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비전’이다.
‘방자히’란 어려워하거나 삼가는 것 없이 제멋대로 건방지게 구는 태도를 가리킨다.’
‘하루가 다르게 내일을 향하여 새로워지고 있는 사람’
비전이 없는 사람이란, 시선이 눈앞에만 국한되어 있는 사람이다. (70-71)
야망은 욕망의 산물이다.
좀더 밝고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자기 계발은 없고, 오직 도구화된 인간의 욕망만이 존재한다. (73)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나의 비전을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100% 망상이요 야망이다.
하나님 자체를 우리의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75)
요셉이 어릴 때 꾸었던 꿈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다는 말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76)
<크리스천과 신앙>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하)
참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닐, 절대적인 그분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이 늘 변화되어 가는 것
자기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이란 미신 (81)
사람이 죽을 땐 못다 이룬 업적이나 실적을 두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90)
<크리스천과 물질>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더니 (수7:21상)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물질은 반드시 생산적인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물질이 생산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한 그 물질은 사람을 타락시키지 않는다.
도박이 죄인 까닭은, 밤새도록 카드나 화투짝을 아무리 돌려도 거기에는 생산이 전혀 없고 오직 소모만 있기 때문이다. (97)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에게 원하는 돈이 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바른 목적으로 돈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므로 당연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98)
<크리스천과 애국> 나의 형제 곧 굴욕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롬9:3)
애국 애족과 무관한 크리스천은 존재할 수가 없다.
크리스천이란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크리스천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항상 지금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101)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애국이라면 그것은 참다운 애국일 수가 없다. – 앙드레 지드 (103)
크리스천들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애국 애족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104)
è 애국심 제로라고 주장하던 정윤. 내가 싫었던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우리 나라 사랑을 종착점으로 보는 태도. 크리스천의 애국심을 명쾌하게 정의내려주었다.
<크리스천과 역사>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13:23)
구속사적 사관, 신본주의 사관, 역사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란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113)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구속 사관을 가질 때에만 정말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115)
<크리스천과 고난>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하시니라 (마13:9)
고난을 외면한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뿐
그 마음이 먼저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으깨어져야 한다. (124)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방치해 두시는 경우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심판은 없다. 그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의 파멸이기 때문이다. (126)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은 곧 ‘자기 확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29)
è 돕는다는 것은 내 생활과 사고의 반경을 넓히는 것이다.
<크리스천과 부활> 어찌하여 산 자를 죽는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눅24:25하, 26상)
청년들이여, 지금 그대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그대의 일생이 된다. 아무런 의미 없이 영원히 죽어지는 인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부활의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인생이 될 것인가? 그대가 지혜로운 자라면, 무엇이 바른 해답인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143)
<크리스천과 의>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창6:9중)
“You give God first place ihn your life.”
하나님께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145)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쓰는 세 가지 문장
‘딱 한 번만이야, 두 번도 아니고 딱 한번이라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안 해도 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는 거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뭘 그래? 자, 보라구! 다 그렇게들 하고 있잖아!” (147)
실패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게으르거나 방종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최선을 다한 뒤에 주어지는 결과에 대하여 자유한다는 말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공급해 주셨다는 말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명령만 하셨다. 그럼에도 노아는 방주를 완성했다. 그러니 노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겠는가? 만약 한 순간이라도 한눈을 팔았다면 방주의 완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오직 그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149)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욕구를 지니고 있기에, 그 욕구에 부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다음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곤 한다. (150)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10:36) (153)
<크리스천과 용기>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수1:9하)
오늘의 시대는 투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 이 시대는 진실한 신자를 요구한다. 진실한 신자만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용기있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용기의 사람을 통하여 이 땅의 역사를 바꾸어 가신다. (167)
<크리스천과 효도>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삼상22:3하)
자식에게 부모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떤 경우든지 “예”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무조건 “예”하는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169-170)
<크리스천과 선택>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42)
“사람이 바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하려는 그 하나만을 볼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를 살펴야 한다.” – 앙드레 지드 (180)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성경의 어떤 인물의 자신의 본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자체를 선택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2)
è 성경의 인물 중에 그 누구도 평탄한 삶을 살았던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늘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 짖으며 주님의 축복을 받는다.
마리아가 자기 수준에서 주님을 위해 선택한 것을 비판하지 말고 존중해 주라는 것이다. 주님을 위한 선택인 이상 그 역시 옳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엇이든 주님을 위해 선택하는 사람만, 다른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 역시 주님을 위한 선택으로 존중해 줄 수가 있다. (185)
<크리스천과 경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4:7)
<크리스천과 은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15:10)
<크리스천과 영감>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왕하2:9하)
<새 역사의 막은 언제 오르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