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전 읽기 (배병삼 외, 북섬)
- 그들이 읽은 고전 답습하기
‘고전’이란 무엇인가?
고전(古傳)은 옛 ‘고’와 전할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옛 것을 전해주는 것이란 말인데, 통상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가?
나는 이 책에 나온 김두식씨의 표현을 인용하고 싶다.
“원래 고전이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뜻하는 말 아닙니까”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며 그것은 반복되는 인간사를 앎으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고전’은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다.
다만, 간략하거나 직설적인 ‘정보’위주의 글과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고전은 경외의 대상이 되거나 고리타분하고 나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비쳐지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때, 고전의 강을 건너갈 징검다리가 생겨나니 그것이 ‘나의 고전 읽기’이다.
우선, 이 책에는 10명의 저자가 있다.
그들이 각각 자신에게 영감이 되어 주는 또는 영향을 미친 고전을 하나씩 이야기해주고 있다.
각계 각층의 지식인들이 고전을 하나씩 추천해주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잘 차려진 뷔페 식단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책을 정말 뷔페에 초대된 손님처럼 읽으면 된다.
배병삼씨가 서문에서도 잠깐 언급하듯이 우리는 고전 앞에서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고전을 떠받들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는 ‘숭배는 고전 읽기에 치명적인 독’이라고 표현한다.
고전 지식이 마치 무엇이라도 되는 양
‘공자 왈, 맹자 왈’ 이렇게 양반처럼 콧대라도 세우려고 읽을 생각은 추호도 필요 없는 망상이다.
앞서 잠시 적었듯, 고전을 읽음으로 우리의 지경을 넓히는 기회로 삼자.
현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역량을 하나 꼽으라면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빼놓을 수 없다.
점성술사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것이 아니라 철저한 분석과 충분한 지력이 내포된 것을 말한다.
고전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그 명목을 유지/발전하고 있는 고전이라면,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대단한 감흥을 주고
현실을 직관하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할 것이다.
내 입맛에 맞는,
내게 필요한 영양을 갖춘 고전을 찾아
탐독하기 전에 10명의 저자가 귀띔해주고 있는 것들로 시식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컴퓨터 옆에 놓여진 책의 목차를 펼쳐 놓고 고민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것이 어떤 글일까? 안 되겠다. 그것은 어려운 결정이다.
그저 이 책을 읽고 탐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고전은 ‘장자’로 꼽았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 ‘장자’를 읽는 것이 두렵다.
아직 지혜가 너무 얕아서 ‘장자’를 읽다가 표정훈씨가 대학 때 경험하였던 과오를 고스란히 답습할까 두렵다.
‘장자’는 행복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행복의 길이란 하나의 정형화된 무엇이 아니다.
복잡하게 얼기설기 엮여 있는 시대에서 개개인이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은 모두 다르다.
그러므로 그 여러 갈래 길의 각 가로등 역할이 ‘장자’의 매력이며
한 편으로 일관성의 부재일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장자’를 읽으며 우리는 어떤 가로등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가로등을 만나기 원하는가?
어디에 놓여 있는 가로등이 필요한가?
나의 지혜의 바닥이 살짝 가려질 즈음 ‘장자’를 펼치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리고 먼저 공지영씨가 소개한 비교적 가벼운 톨스토이의 ‘부활’과
한 때 나의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였던 현기영씨가 이야기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고 싶다.
깊은 맛의 음식을 아껴 두고 익숙한 것부터 그리고 상큼한 음식에 우선 손을 대어 보려 한다.
풍성한 ‘고전 식단’을 놓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담소 나누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