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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다운 게 어딨어 -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6년 8월
평점 :
페미니즘 첫 걸음
우리는 길어야 100년 조금 넘게 살면서 많은 것을 궁금해 한다.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무의식까지 낱낱이 파헤치려 한다. 하물며 흙, 바람 등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하해 각자의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다양한 의견들을 펼친다. 그것들은 하나의 학문이 되고 삶의 규칙이 되며 일상 속에 녹아진다. 화산이 폭발해도 세계 대전이 일어나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삶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여성다움’은 무엇인가? 과연 ‘여성성’은 타고난 것인가, 만들어진 것인가. 이 질문의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해 우리는 인색하기만 하다. 진지한 태도와 다양한 의견을 듣기보다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비난하는 데 더 빠르게 행동한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머 오툴이 용기 있게(당연한 현상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슬프다) 고백한 「여자다운 게 어딨어」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예전의 나는 친구 덕분에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론과 그들이 던지는 질문 등에 대해 대략적 건 알고 있으나 깊지 못하고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잘 몰랐다. 일전에 독서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창비에서 발간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책 내용에 대해서는 지나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이렇듯 평소에 관심 있던 부분들이 어느 정도 겹치겠지만 페미니즘 자체와 나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내가 자라온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꺼내겠다. 초등학생 때 다녔던 학교는 양성평등 시범학교였다. 양성평등 글짓기에서 상을 받으며 어린 시절부터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중·고등학생 때는 학교에서 해주는 정기적인 성교육을 통해 올바른 개념을 잡았다고 여겼다. 대학생 때는 누구보다 자유와 평등을 수호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처럼 지난 20여 년 동안 자라면서 성, 자유, 평등, 사회, 페미니즘 등에 대해 가치관을 성립했고 용납한 범위 내에서 스스로 공부 하며 조금씩 변화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내가 「여자다운 게 어딨어」를 읽게 된 건 순전히 시크릿박스(창비·오마이뉴스 기사공모) 때문이었다. 애초에 페미니스트에 동조하지 않는 ‘여성’이었고 페미니즘을 수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이처럼 변명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 이유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글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한 번 쯤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물었다. 대체로 잘 모르는 분야라고 대답했다. 한 번도 생각 해 본 적 없다는 친구도 있었고 어렵다는 답변도 있었다. 굳이 ‘여성’을 따로 떼어놓고 봐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를 읽기 전의 나도 이와 비슷했다. 헌법 제10조와 제11조가 보장하는 이 평등한 세상에서 여자를 소수나 약자로 칭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민한 여자들의 ‘학(學)’이 아닐까.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대해 괜히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아닐까하며 걱정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스스로 정말 많은 반성을 했다. 같은 ‘여성’인 나조차도 이런 생각을 하며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불편하고 거센 반항 속에서 우리들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 책은 또한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이야기한다. 내 인생에 보편적 의미가 없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 다만 나는 사회적 기대를 거스르는 장난을 좋아하고, 수치심 따위는 내다버린 지 오래이며, 소녀와 여성을 연기하는 데 따르는 쾌락과 위험과 모순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온 여자로서 그동안 얻은 교육을 함께 나누려 한다. 부디 독자들에게도 내 이야기가 가치있기를 바란다.
p13~4(서문: 조명, 카메라, 액션)
저자인 에머 오툴은 평범한 소녀에서 영국 지상파 채널인 ITV의 <디스 모닝>이라는 TV쇼에 출연하여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를 보여주기까지의 과정을 허심탄회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에 그동안 내가 애써 무시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10만 원을 줄 테니 볼 뽀뽀를 해달라며 성희롱을 당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 다리를 벌리고 자다가 부모님에게 여자답지 않다고 혼이 났던 적, 기차역 앞에서 통학(울산-부산)으로 지친 몸으로 크게 하품을 했다가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여자답지 않다고 혼이 났던 적, 손녀라는 이유만으로 할아버지의 팔베개를 하면 안 된다고 혼이 났던 적, 친구들에게 생일선물로 속옷을 받을 때, 남자친구는 이런 데 관심도 없다고 이야기 하는데도 불구하고 티를 내지 않는 거라며 원치 않은 레이스 팬티를 강요받은 적, 남동생과 같이 놀고 있는 데 나만 집안일을 도와드리지 않는다며 친척 어른들에게 혼이 났던 적. 이 모두가 안타깝게도 ‘여성’이라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더욱 나를 소름 돋게 하는 건 여성스럽지 못하다, 칠칠치 못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혼이 났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을 나는 당연하다고 여겨왔는가. 그 답은 나 역시도 에머 오툴처럼 사회의 통용되는 ‘여성’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여자답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과연 내가 사람다운 것이 아닌 여자다운 것으로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난 뒤,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에 당황했다. 이 질문들은 짧은 시간으로 답변을 내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간혹 어떤 것은 내 근간을 뒤흔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불안했지만 그만큼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비워져 있던 것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자다움을 강요받으며 소소한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얌전하고 조신한 자세,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 긴 머리, 붉은색 입술 등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가 아니었다. 차마 내가 인지 못했던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서부터 시작된 억압과 강요였다.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에게 여성성은 우리가 구매해야 하는 것이라고, 남성과의 차이를 과장하는 방향으로 몸치장을 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성별화될 수 없다고, 여성성이라는 임의적 개념에 맞춰 스스로를 부호화하지 않으면 여성적일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동시에 선택의 주체는 우리라고 세뇌시킨다. 나는 체모를 기르기 시작한 뒤에야, 몸의 문제에서 내게 조금도 선택권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p227(제7장 털 난 아가씨, 별 탈 없나요?)
그렇다. 나는 이 구절에서 전율이 일어났다. 동시에 중국 여자들의 겨드랑이 털에 대해 민망하다고 생각한 나를 반성했다. 명확하지 않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사회 작동체계가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말을 경험으로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몸은 미용이 목적이 아니다. 주변 환경에 맞게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 왔고 그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몸의 털들은 주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2016년 10월 4일 세계일보 건강 부분에서는 <지금 당장 면도를 멈춰야 하는 이유 7가지>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사람들은 흑백논리를 좋아한다. 분류와 정답, 단순한 진실을 좋아한다.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심지어는 불가피하게―여겨지는 정체성들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에도 종교나 유사과학을 들어 설명하려 드는 것도 당연하다.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품지 않는 쪽을 택한다. 어떤 사람들은 젠더 규범이 지금과 같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화를 내고 코웃음을 친다.
p141(제4장 현실 재현의 난관)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왜 이렇게도 무심했는지 함께 하는 것보다도 먼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는지 고민했다. 이미 에머 오툴이 지적하는 것처럼 언어가 지니는 상징과 더불어 다른 이유 때문에 남성중심사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다른 이유는 망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닌 고유의 권리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잊혀 진 것이다. 망각으로 인해 생긴 공백을 상징들이 침범했고 남성중심사회를 더욱 공공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왔다는 무책임한 핑계를 대며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에 우리는 계속해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됐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언어가 주도적으로 등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에서 파생된 말이 주는 이질감 때문에 일어나는 편견과 혐오가 안타깝다. 그 이유는 이 현상이 우리가 얼마나 상징과 사회에 홀려 있는 상황인지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도 밝혔다시피,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운동들에 대해 깊게 알지 못한다. 또한 알고 보니 그 누구보다도 사회 체계를 철저하게 따르며 살고 있었기에 혹여나 내가 쓰는 언어와 관점이 올바른 페미니스트와 다른 게 아닐까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혹시나 예전의 나처럼 ‘남성’, ‘여성’이라는 단어에 홀려 생각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과 함께 이 책을 나누고 싶다. 처음에 읽기 불편할지 몰라도 한 장 한 장 넘기다 주변을 에워싼 모든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는 것을, 주체적인 줄 알았던 나의 삶이 따지고 보면 수동적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이 사회가 너무도 공고하고 단단해 보이는 틀이고 구조이지만 함께 질문을 던지고 고민한다면 언젠가 무너져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말이다.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끝으로 이 글귀를 공유하며 마무리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 페미니스트의 임무는 견고해 보이는 모든 범주를 발가벗겨 그 두서없는 구성을 드러내고, 범주 자체에 의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마그릿 실드릿Margrit Shildrick, 재닛 프라이스 Janet Price
P123(제4장 현실 재현의 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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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서평은 오마이뉴스에서 12월 5일자로 실린 것이며,
창비X오마이뉴스 기사공모에 응모했던 기사의 원본임을 밝혀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66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