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세트 - 전12권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한국 판타지의 힘



  중학생 시절, 한참 로맨스 소설에 빠져 있었다. 단골 책방 아주머니에게 <아린이야기>를 추천 받았다. 그때부터 '드래곤'이라는 종족에 빠져있었다. 서양의 괴물이 주는 이색적인 느낌은 흥미로웠다. 레드 드래곤, 블랙 드래곤, 블루 드래곤, 골드 드래곤 등 드래곤마다 각 특성을 찾아가며 <드래곤 남매>, <이세계 드래곤> 등을 읽었다. 같은 분야의 책을 나름 오랫동안 읽다보니 금세 지겨워졌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자연스럽게 책방과의 거리도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골책방에는 현수막이 붙었다.


   '책 판매합니다'


   추억의 장소가 사라졌다.


  우연히 계속 책을 잡게 되었고, 전공까지도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택했다. 대학교 1학년, 멋도 모르고 문학에 대해 논했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으며, 신나게 좋아했으며 신나게 미워했다. 그 과정에서 선배에게 <드래곤 라자>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름대로 판타지 소설에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낯선 판타지 소설 제목을 내 멋대로 평가했다. 역시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내가 지니고 있던 편견은 이 좋은 책을 만나기 까지 오랜 시간을 걸리게 했다.

  첫 직장에서 사표를 쓰고, 두 번째 직장에서 계약이 만료되어 나왔다. 이십대 중반, 친구에게 성공패키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고용센터에 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어졌다. 하릴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처음에는 낮잠을 자고 밤잠을 자고 무한히 잤다. 그동안 미뤄놨던 잠이 모두 소비 되었을 쯤, 오래 전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80대가 되어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던 할아버지를 떠올렸고 그동안 내가 책을 소홀하게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서관을 갔다. 그리고 판타지소설만 모아놓은 책장에서 <드래곤 라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너덜너덜해진 책장을 넘기며 단숨히 12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다. 한국 판타지 문학의 큰 기둥이라고 하는 이영도 작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흔히들 칭하는 '똥철학'은 100%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작년에 읽었던 <미움 받을 용기>를 떠올리고, 아들러 철학에 대입도 해보며 나만의 똥철학을 구축하기도 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놓치는 말, 자신을 아끼라는 말,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말. 이 말은 꽤 오랫동안 많은 매체가 강조했다. 자신감, 자부심, 자존감으로 나아가는 개념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옛날에 잘 몰라서 놓쳤고, 지금은 흔해져서 놓치는 걸까? 여튼 이 책은 후회없이 나를 믿고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깊게 고민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특히 핸드레이크의 일화 속, '우리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은 꾸역꾸역 삶을 살고 있는 내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삶, 가볍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던 지금, 잠시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소복이 눈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꼬마들은 눈발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키 큰 그림자를 보고 크게 놀랐지만 그것이 선더라이더를 탄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크게 감탄했다. -p262 <드래곤라자, 12권>


  마블 영화에 감탄하고, 디즈니 영화에 감동을 받는 우리들은 아직 모르는 게 있다. 아니, 대중들은 알고 나와 같이 글 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다양한 예술을 펼쳐나가는 데 순수 문학만이 답이 아니다. 현대 소설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 되고 있는 고전,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도 초반에는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꽤나 확대 해석이긴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 존해나는 판타지 소설에 대한 편견, 색안경도 이와 같은 줄기가 아닐까싶다. 그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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