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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거절 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공포심
직장 상사, 학교의 선생님 등. 나보다 권력이 센 사람들이 나에게 부탁을 한다면, 거절할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심지어 모르는 사람의 부탁마저도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준다. 바틀비는 자신의 직업이 '필경사'임에도 필사를 하는 일, 필사한 글을 검토하는 일 등 자신이 맡아야 하는 일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의 거절은 고용인이었던 필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떠나지 않고 망령처럼 맴도는 바틀비를 떨치기 위해서 사무실을 옮긴다. 바틀비에게 벗어나긴 어려웠다. 새로 이사 온 변호사는 필자에게 바틀비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한다. 심지어 건물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는 바틀비 때문에 건물주 마저도 필자에게 그를 어떻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며칠 만에 만난 바틀비는 여전히 고집이 있었다. 필자는 그를 시설로 보냈다. 바틀비는 먹는 것을 거부하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죽었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주었다.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그만하기를 바랐다. 변호사의 요구에 수용하고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끝낸다면 불편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스스로에게 모순을 느꼈다.
부당함이 있으면 거절을 해야하고 부정함이 있으면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믿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용기가 존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난 뒤 알았다. 착각을 하고 있었다. 교육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맡은 바 소임에 대해 최선을 다하라는 어른들의 말을 가슴 속에 새겼는지도 모른다. 부당함에 의문을 품고 내가 갖고 있는 소신을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 책에만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틀비를 읽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동안 내가 어떠한 착각과 나의 이상 속에서 나를 왜곡하고 바라봤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바틀비가 왜 거부를 하는지 이유에 대해 알기 보다는 빨리 고용주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직사회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를 바랐었다. 가끔씩 술을 먹고,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만 다른 직원들처럼 그것은 '일시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기적으로 필자의 회사에 무리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이러한 생각이 고착되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폐해가 일어났는지 지켜봤으면서도. 나는 고착된 사회의 일원이 아닌 고착된 사회에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서 금이 갔고 깨졌다.
몸은 이상하게 벽 밑에 웅크리고 무릎은 끌어안고 모로 누워 차가운 돌에 머리를 대고 있는 쇠약한 바틀비가 보였다. 그러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몸을 굽혀보니 그가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무언가가 그를 건드리도록 나를 부추겼다. 나는 그의 손을 만졌다. 그 순간 짜릿한 전율이 내 팔을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다 발로 내려갔다.(p90) 바틀비는 어쩌면 나의 시선 때문에 죽은 것일 수도 있다. 사회에 굴복하고 피해를 그만주라는 나의 무언의 압박 때문에 그는 무기력하게 밥을 먹지 않고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가 죽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바틀비가 죽을지는 몰랐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나의 무언의 폭력이 소설 속 인물, 바틀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더 계속할 필요가 없어 보일 것이다. 불쌍한 바틀비의 매장에 관한 것이라면 상상력이 얼마 안 되는 설명을 대신해줄 것이다. 그러나 독자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에 말해 둘 것이 있다. 이 짧은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서 만약 독자들이 바틀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그를 알기 전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나도 그런 호기심을 십분 공유하지만 전혀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p92) 바틀비는 사서(死書)였다. 책에 나온 내용을 보면 사서는 발신자나 수신자의 주소가 잘못 기재되었거나, 제대로 기재되었어도 양쪽이 이사를 가거나 사망한다든지 해서 반송도 되지 못하는 우편물을 취급하는 우체국의 하급 직원을 말했다. 이러한 그의 전(前)직업이 사서였기 때문에 그의 절망을 키웠을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말한다. 아직도 나는 필자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만 어림짐작은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죽음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절할 수 있는 자유를 억압하는 주체는 거대한 권력이 아닌 삶 곳곳에 숨어 있는 나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거대한 권력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공포심을 유발시키고 용기를 사그라트리는 건 아닐까.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힘이 그 어떠한 힘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