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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평점 :
마르셀, 20세기 유쾌한 이야기꾼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유쾌하면서도 일상의 삶을 파고들고 있다. 일상에서 일어날만한 판타지는 마치 소설이 아니라 즐거운 동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여러 개의 단편 중,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칠십 리의 장화>를 말해볼까 한다. 마르셀이 얼마나 재치있는 이야기꾼인지 책을 통해 만나봤으면 좋겠다. 두 편의 이야기 외에 나머지 이야기도 재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생존 시간 카드>는 감탄하면서 읽었다. 이야기 자체가 기발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러한 상상을 한 마르셀이 신기하다.
까탈스러운 상사를 두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골탕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된 뒤티유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에게 벽으로 드나드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43세 때 알았다. 그는 이 병을 고치고 싶었기 때문에 의사에게 쌀가루와 켄타우루스 호르몬의 혼합물인 혼합물인 4가(四價) 피렌트 분(粉) 정제를 일년에 두 알씩 먹으라고 처방 (p16) 받았다. 하지만 한 알을 먹고 새까맣게 잊었다. 몸을 혹사시키라는 처방도 공무원인 직업 특성상 할 수 없었다. 뒤티유욀에게 고약한 상사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우연히 상사를 골탕먹이게 되었고, 상사는 정신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도둑질, 교도소 탈출 등에 쓰더니 급기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는 데까지 쓴다. 평범하기 그지 없던 뒤티유욀의 삶에 특별한 행복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 이튿날 뒤티유욀은 격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는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그깟 일로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히 서랍 속에 흩어져 있는 알약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 알약들을 아스피린으로 생각하고 아침에 한 알 오후에 한 알을 먹었다. 저녁이 되자 두통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게다가 마음이 들떠서 그는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젊은 여인은 어서 밤이 오기를 바라면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의 추억이 그녀의 마음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심어준 거였다. 그들은 그날 밤 새벽 세시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p33) 행복은 달아났다. 그러나 뒤티유욀은 특별해졌다. 그 특별함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떻게 특별해졌는지 이야기를 한다면, 이 이야기의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칠십 리 장화>에서는 마음을 파고드는 문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재미에 비중을 둔 이야기라면 <칠십 리 장화>는 삶을 보다 파고드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앙투안은 가난함에 대해서 크게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칠십 리나 갈 수 있는 장화를 만나고 그 장화 때문에 다치게 되면서 앙투안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절망의 순간에서도 앙투앙은 나름대로 이겨내려고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잘 되지는 않았다.
침대가 이웃해 있는 앙투안과 위슈맹은 노댕이 나간 뒤에도 일 주일이나 더 병원에 머물렀다. 새로 입원한 환자들과 따로 놀게 되면서 두 아이는 더욱 친해졌다. 하지만 그 친밀함이 앙투안에게는 종종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 한 주일 동안에도 앙투안은 가난 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일이 많았다.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털어놓고 이야기할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위슈맹의 비밀 이야기를 들어도 한두 마디 토를 달 뿐 그에 상응하는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었다. 고백할 만한 속내 이야기가 없어서 그저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해야 하는 신세만큼 처량한 것도 없다. (p141~2) 또한 여기서 앙투안의 시련은 멈추지 않는다. 앙투안은 자신의 가난을 감추기 위해서 또 자신을 위해서 미국에 있다는 삼촌, 가상인물 '빅토르'를 만들어냈다. 빅토르 삼촌은 앙투안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위축시키기도 했다. 양심을 찌르는 바늘은 점점 닳아 무뎌지고 앙투안은 스스로도 빅토르 삼촌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앙투안에게 빅토르 삼촌은 빛이기도 하고 어둠이기도 했다. 순수하고 엄마에게 감추는 것이 없던 앙투안은 빅토르 삼촌때문에 '처음'을 여러 개 경험했다. 앙투안의 심리변화는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옮긴이의 말도 간단명료하고 흥미롭다. 번역도 좋았다. 각주나 가독성 등에 세심하게 신경 쓴 게 느껴졌다고 할까. 마르셀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간략하게 파악할 수도 있었다. 뭐하나 빼먹을 게 없는 작품이었다 . 유쾌하면서도 삶을 파고드는 이야기 꾼, 마르셀. 그의 작품을 탐구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