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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인물들을 위한 소설
작품을 읽고 재미있으면 해당 작가의 데뷔작부터 최근 작품까지 읽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도 그 일환으로 읽게 되었다. 지난 학기(2013년 2학기), 교수님께서 올해 가장 눈 여겨 볼 만한 단편으로 『김 박사는 누구인가』(문학과지성사, 2013)에 수록되어 있는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를 추천해주셨다. 수업시간에 이 작품을 읽고 와서 품평을 하기로 했었다. 종교에 거부감이 있었던 나는 '목사'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책을 덮어버렸다. 종교 색채가 짙을 것 같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지만, 당시 수업 시간에 당당하게 말했다. "소설이 재미없었어요." 자고로 청춘은 패기가 있어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근거를 바탕으로 나름 생각해서 나온 말이었다. 일단 부끄러움의 시간을 갖겠다.
하, 하, 하.
그리고 이기호 작가를 잊고 있었다. 1년 만에 찾은 동네 도서관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두 달만에 만난 『김 박사는 누구인가』를 보자마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수업 당시에는 느낄 수 없는 의무감이 생겼다. 용기(수업 때가 계속 생각나서 내야만 했다)를 내서 책을 뒤적이기를 몇 번. 이기호 작가가 전해주는 인물의 생동감과 삶의 아이러니한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사과는 잘해요』(현대문학, 2009)를 거쳐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2006)까지 읽었다.
「나쁜 소설-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는 솔직히 별로였다. 자. 좋습니다. 이 소설은 저 위 부제처럼 누군가 누군가에게 직접 소리내어 읽어주도록 씌어진 소설입니다. 친구나 형제자매, 선후배 사이도 좋고요. 부부나 연인 사이라면 더욱더 좋습니다. (p9) 를 읽고 시루떡(연인)에게 읽어줄까 하다가 두 세장 읽고 나 혼자 읽기로 했다. 막판에 이야기꾼을 꿈꾸는 독자라면 흥미가 있는 부분이겠지만 그 외에는 딱히 감흥이 없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뒤 소설은 재미있었다. 특히 「당신이 잠든 밤에」와 「국기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 2」를 읽고 제목을 곱씹으면 소설 속 문장 문장 하나가 온 몸에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깊은 작품은 「할머니, 이젠 걱정마세요」였다. 평소 노인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엔 두 소재가 지루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 완성도도 높고 읽는 내내 흥미도 유지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책이 아닌, 할머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를 통해서 뱀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죽은 사람들이 때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죽어 나무가 되고, 또 누군가는 죽어 새가 되고 하였다. 글을 몰랐던 나는, 할머니를 통해서만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촉 낮은 백열전구가 깜빡깜빡거릴 때마다, 두 사람들이 누워 있는 할머니 머리맡에 찾아와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을 보았다. 어린 나는, 그 사람들이 무서워 할머니의 말라버린 가슴에 자주 얼굴을 파묻혀야만 했다. (p237~238) 작품의 시작 부분이었다. 어릴 적 할머니와 살면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살았던 내게는 추억과 함께 뚜렷한 공간이 구축되었고 6·25전쟁이라는 멀게만 느껴졌던 사건이 내 삶에 훅하고 침투하는 것 같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마지막 부분이다. 잊혀져서는 안 될 과거의 아픔(하지만 대부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긴다)을 어떻게든 책임지고자 하는 '나'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목은 '할머니, 이젠 걱정마세요'이다.
그 외에도 소설집에 수록 된 소설 제목만 읽어봐도 인물들의 생동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살아 숨쉬는 인물들이 있어서 이기호 작가의 소설을 앞으로도 꾸준히 읽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