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동이 트고 햇살이 서서히 커튼을 물들여 갈 때쯤. 여전히 침대에 웅크리며 보드라운 온기를 맛보고 있을 때쯤. 무엇도 간섭하지 않고 그저 혼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그때쯤. 바로 이 책을 읽으며 그 한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른하면서도 간섭받지 않고 무엇에 쫓기는 것 같지만 온전히 제 시간인 때. 색깔로 표현하자면 미색 햇살이고 빛바랜 핑크빛과 같은 커튼이다.

총 여덟 편의 단편과 엽편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평온하지만 그 이면에는 유지할 수 없는 불안한 한때가 숨겨져 있다. 아직은 불완전한 상황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금기시하는 성적 판타지와 비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마치 막 오븐에서 꺼낸 빵처럼 부드럽고 쫄깃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빵 자체는 위험하지만 맛은 순전히 좋아서 자꾸 먹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해야 할까. 오빠가 누이를 강간하고 남자가 아이를 살해하는 그 순간에도 분위기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봄날의 바람처럼 포근하며 감히 아름답고 비일상적인 것에서 일상적인 것으로까지 둔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모두가 표면에 딱딱하게 싸여진 금기라는 타이틀 이면의 말랑한 속살을 들춰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가진 제목과도 같이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처음 혹은 그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는 딱 맞아떨어진다. 첫사랑은 처음인 사랑이지만 첫사랑이기 때문에 마지막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불구자, 부적응자, 소년 등 아직 온전히 제 힘으로 설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 같이 들어있는 코드는 전체적으로 책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와 같다. 나른하면서도 얇은 막에 둘러싸여 아직은 밖과 단절되어 있는 이미지. 그 안은 한없이 고요하지만 들끓는 밖이 조금은 비치는 세계이다. 그러한 밖과 안, 처음과 끝, 시도와 좌절들이 은밀하게 여기는 부드러운 핑크빛이라는 색을 띄고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그들의 세계는 아직도 고요하고 색은 부드러울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세계는 미완의 세계이며 그들의 정신세계와 같이 한없이 미약하고 어쩌면 순수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가지고 싶다는 욕망, 자라고 싶다는 욕망, 알고 싶다는 욕망, 가지고 싶다는 욕망, 욕망. 이들은 에둘러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방법을 모른다. 손으로 잡고 만지고 맛보고 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풀 수 있는 아이와도 같은 단순한 방법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다 자란 후의 사람이라면 언감생심 꿈에서나 한 번 나올 법 하지만, 이들은 말했듯 아직 외부와는 소통되지 않은 미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고로 그들의 세계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울 대상을 기다리는 끈기도 참는 인내도 없다.

과격하고 사회와 도덕의 잣대로는 용인될 수 없는 파괴적인 힘. 바로 이것들이 우리의 이면 혹은 사회의 이면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속살은 더더욱 말랑하다. 가지지 못하면 부숴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어야만 하는 원초적인 욕구들 사이에서 우리는 인내하고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더더욱 순수하다.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욕망에서 눈을 돌리는 교육을 받았다면 아직은 그 무엇도 침범하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럭 겁이 난다. 사회적 금기와 룰, 법칙 등을 깡그리 무시하고 사는 그 모습에 우리는 우리가 지탱하고 있는 사회와 그 기반이 흔들릴까 두렵다. 우리가 믿는 하나의 법칙 통용되는 습관들은 모두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격자와도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염되고 병들고 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반대로 생각해보면 순수하고 온전히 제 모습을 지긴 가치 있는 것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아직 그들은 따듯한 온기에 젖어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나른한 한때를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막은 머지않아 사회와 집단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칠 것이고 찢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한때이며 고귀한 마지막 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과도기의 광기가 잠잠해지기까지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홍역을 앓듯 한 번씩 지나쳤던 첫사랑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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