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블루 -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
김영숙 지음 / 애플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리에 한 번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로트렉과 같은 보헤미안들의 고향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 바로 파리니까. 파리, 그 하나를 엄연한 단어로 보아야 하고 거기에는 예술과 자유라는 뜻을 포함한다고 명명해도 어색할 것이 없는 도시. 그런 파리 여행담이라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다시금 책장을 열었다. 이제까지 나는 많은 여행기를 읽어왔다. 일신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지독한 방향치에 길치인 탓에 여행을 부러워만 했고 정작 스스로는 못 가는 나인지라, 특히나 여행기를 좋아했다. 내가 가진 않은 곳이고 나야 아무리 상상을 한다고 해도 그곳의 정취를 온전히 떠올리진 못할 터, 그래도 여행기는 나에게 하나의 멋들어진 환상과도 같았다. 그런데 파리라니. 이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내가 기대를 가지고 책장을 열었을 때 거기에 펼쳐져 있는 것은 파리가 아닌, 한 여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나 역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여행이 아니라 파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지만, 60년대에 각혈하며 골방에서 죽어가는 그러한 정취를 그녀는 지니고 있었다. 진부하기도 하거니와 어찌나 세상이나 자신이 슬픈지 책장을 넘기는 내가 울컥 화를 내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봐요! 파리까지 와서도 서울에서와 다를 바가 없군요.

파리에서 그녀의 우울이 도진 것인지, 파리가 그녀를 우울하게 만든 것인지 나는 분간할 재량은 없지만 여하튼 시종일관 슬픈 정조로 그녀는 파리보다는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그녀의 우울증이 중심이다. 딱히 파리라고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나. 아니다. 그녀의 심정은 아이들을 남편을 두고 집밖으로 나오면서도 우울했다.

한 권의 책을 온전히 자신이 슬픈 이유들과 감정에의 토로로 채우기 쉽지 않았을 것을 감안 한다면 정말 어느 의미에서 이 책은 대단하다. 읽는 내내 카운슬링이 주특기인 나조차도 짜증이 날 정도로 그녀의 우울은 병이었다. 게다가 난 도무지 이 슬픈 심정을 얼마의 돈을 주고 사서 읽어야 한다는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온전히 자신만의 슬픔이라, 공감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녀가 거닐었던 파리는 그녀의 우울과 시기로 뒤덮여 블루보다도 더 깊은 암흑 속에 있었다. 내 눈에는 파리는 보이지 않고 그저 슬픈 여자의 청승맞은 트로트 한 자락 길게 읽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더더욱 짜증을 유발했던 그 슬픔은 나중에 가서는 도무지 이 여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본인에겐 본인의 일이라 힘들고 떨쳐낼 수 없겠지만 주위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그녀의 깊은 곳까지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은 별 일이 아닌 것을 크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감수성이 지나쳐도 너무나 지나칠 정도였으니까. 내가 과연 시간을 들여서 이 여자의 한탄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책장을 다 덮고 제목을 들여다보았다. 파리블루. 파리가 블루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블루한 것이다. 그녀는 결국 파리까지 블루하게 만들고 돌아왔을 것이다. 나는 되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옆에 눈을 감을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블루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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